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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곡지
지정번호 :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 지정일자 : 1986년 3월
3일 소재지 : 시흥시 하중동 208 시대 : 조선 세조조
관곡지(官谷池)는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과 인연이 깊은 연못이다. 평소 농학 발전에 대해 깊은 연구와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은 세조
9년(1463)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남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 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위치: 하중동208)에 재배를 해본 결과 점차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삼아서 안산군의 별호(別號)를 세조 12년(1466)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뒤 수초(水草)가
성(盛)하여 못(池)이 폐(廢)해지자 헌종 10년(1844)에 안산군수에 부임한 권용정(權用正)이 이듬해 봄에 하중동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못을
파냈는데, 여름이 되자 연꽃의 잎이 중국 전당의 것과 같이 두 줄기가 자라난 것이었다. 또 못을 관리하기 위하여 하중동 주민 중에서 여섯 명의
연지기(蓮直)을 두고 여섯 명 중 혹 누락자가 생기면 즉시 하중동 주민으로 대체했다. 이들 연지기에는 각종의 노역(勞役), 부역(賦役),
포세(布稅), 양곡세(糧穀稅)를 제외시켜 주고 오직 못만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담홍색이다.
이 못은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權曼衡, 사헌부감찰)의 집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의 소유가 되어
관리되어 오고 있다. 특히 정조 21년(1797)에는 정조가 수원 현륭원(顯隆園)을 행차하는 길에 안산 관아(安山官衙, 안산시 수암동 256)에
유숙할 때 안산관내의 선비를 대상으로 과거를 실시하면서 어제(御題)로 시제(詩題)를 <강희맹이 사신으로 중국 남경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전당에서 붉은 연꽃씨를 채취해 왔는데. 그로부터 안산군의 별호를 ‘연성’ 이라고 했다>로 정할 만큼 관곡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연당 한가운데에 있던 관상소나무는 관곡지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고 농학자로서의 기품을 상징하고 있는 듯했으나 1990년
9월에 폭우로 고사되었다. 못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인데, 시흥관내의 연성초ㆍ연성중학교 등의 교명과 연성동의 동명 및 시흥시의
향토문화제명인 연성문화제(蓮城文化祭)의 명칭 등은 이 못에서 연유해 명명되었다.
우리나라 최초 연 재배지인
경기도 시흥시 하중동 관곡지(官谷池) 주변에는 4만여㎡ 규모의 연꽃단지가 있다. 인근 안동 권씨 소유의 건물 안에 관곡지라는 5백30여년
된 유서 깊은 연못이 하나 있다.관곡지는 조선시대 명신이며 농학자인 강희맹(1424∼1483) 선생이 세조 9년(146 3년) 중국
난징(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를 채취, 귀국한 뒤 연을 재배해 전국으로 확산시킨 가로 23m, 세로 18.5m크기의 연못으로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시흥시는 옛 관곡지의 명성을 되찾고 연근 재배로 농가소득을 증대하기 위해 마을 주민에게
예산을 지원, 관곡지 주변 논 4만여㎡에 수련 20여종을 심었다. 이곳에 대규모의 연꽃 농장이 들어선 것이 올해로 만 2년째다. 약
3만여 평의 연꽃단지에서 무안 백련, 향백련, 홍련 등 여러 종의 연꽃과 50여 종의 수련을 재배하는데 관상을 겸하면서 연근을
생산한다.
8월말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연꽃은 오전 10∼11시 사이에 만개하기 때문에 사진을 촬영하려면 가급적 오전에 오는 것이
좋다고 시흥시는 설명한다. 관곡지는 서해안고속도로 목감IC에서 물왕저수지를 지나 연꽃마을 아파트단지를 찾으면 된다.
▲문의
시흥시청 농업기술센타 031-310-2577 관곡지 연근농장 031-404-7578 시흥문화원
031-310-2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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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간선도로 - 목감IC 좌회전 시흥시청방향 - 물왕저수지 - 하중동
관곡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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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명선생 묘와 신도비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 87호 지정일자
: 1985년 9월 20일 소 재 지 : 하상동 산2번지 시대 : 묘 → 성종 14년(1483), 신도비 → 성종
19년(1488) 강희맹(姜希孟,1424~148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농학자로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좌찬성(左贊成)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ㆍ『촌담해이(村談解이)』ㆍ『금양잡록(衿陽雜錄)』ㆍ『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등이 있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한 단 아래 좌우에
문신석인(文臣石人) 한 쌍이 서 있다. 이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다른 묘역에 배치된 것보다 훨씬 간소하게 되어 있다. 상석 바로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도 없고 망주석(望柱石)도 없다. 이러한 것은 생시 선생의 청렴한 성품이 묘역 내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연판문(蓮瓣文)을 새기고
있으며, 비신의 뒷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한편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으며, 그
후 500년이 지난 1988년에 비각(碑閣)이 세워졌다.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1.95m, 폭 80cm, 두께 20cm로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비명을 짓고, 글씨는 홍문관 박사(弘文館 博士) 박증영(朴增榮)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를 하였다.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양부(養父)인 강순덕(姜順德, 1398~1459 이숙번의 사위. 사헌부 감찰) 묘를 비롯하여, 선생의 백씨 강희안(姜希顔,
1418~1464 인수부윤) 묘, 선생의 장남 강구손(姜龜孫, 1450~1505, 우의정) 묘, 손 강태수(姜台壽, 1479~1526 순천부사)
묘, 증손 강복(姜復, 1508~1529, 충좌위 부사용) 묘, 고손 강극성(姜克誠, 1526~1576 장단부사) 묘 등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선생의 재사(齋舍)인 연성재(蓮城齋), 1965년 건립)가 있고, 묘역 앞에는 하지골(荷池谷, 연꽃 연못의
뜻)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연성1지구 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에 폐동된 뒤 1999년에 대단위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자 하지골의 뜻을 지닌
연꽃마을로 명명되었다.
소래산, 군자산, 대부도, 오이도, 시화방조제, 월곳포구,
소래포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