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봄의 진달래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취산 자락에 흥국사(興國寺)가 있다.
흥국사 사적기에 “국가의 부흥과 백성의 안위를 기원하기 위해 경관이 좋은 택지를 택해서 가람을 창설했다.”라는 말이 있으며 덧붙여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이 흥할 것이다.”라는 글이 남아 있다.
흥국사는 고려 명종 25년(1195)에 보조국사 지눌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고려 사회는 무신정권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때 변방의 국찰로서 나라의 안정과 융성을 기원하는 기도처로 세워진 이 절은 불법보다는 호국을 우선하는 사찰로 세워진 것이었다.
흥국사는 그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수군(義僧水軍)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절집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후 인조 2년 계륵대사가 중건하였고 1760년경에 총 건평 624평에 649명이 상주하던 큰 사찰이 된 후 여러 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렀다.
남아있는 절 건물은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등 15동이며 흥국사 홍교 등 여러 문화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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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 공업단지를 지나 흥국사에 도착했을 때는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만나는 유물이 계곡의 양켠에 걸쳐있는 무지개다리(보물 제 563호)이다. 인조 때 만들어진 이 다리는 길이가 40m이고 높이가 5.5m, 폭은 11.3m, 내벽3.45m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무지개다리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부채꼴 모양의 화강석 86개를 맞추어 틀어 올린 이 무지개다리는 완전한 반달을 이루고 있고, 단아하고 시원스러운 홍예 양옆으로 둥글둥글한 잡석으로 쌓아 올린,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벽이 길게 뻗쳐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무지개 다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국난을 대비해 흥국사에 주둔시켰던 승병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데에 불안을 느낀 관아에서 지맥을 끊고자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300명이나 되는 승병이 하는 일없이 놀며 지내고 있으므로 그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하여 다리를 놓았다는 말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바라보고 매표소를 지나면 흥국사 부도밭에 이른다. 이 절을 창건한 보조국사와 중창했던 법수스님의 부도 등 12기의 부도가 이른 봄 햇살을 받고 있다. 이 부도밭을 지나 만나는 사적비는 숙종 29년 당시의 명필이었던 이진휴가 썼다. 천왕문과 봉황루 그리고 범종각을 지나자 심검당과 적묵당에 에워 쌓인 대웅전이 나타난다.
오랜 세월 저편의 이야기를 풀어 내주고 있는 듯한 흥국사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돌계단에는 거북이, 게, 용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대웅전을 반야용선(半夜龍船)으로 해석한 데서 나온 ‘법화신앙’적 표현이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고통의 연속인 중생을 고통 없는 피안의 세계로 건너게 해주는 배로 보기 때문에 대웅전의 축대는 바다가 되는 셈이다. 대웅전 앞에 서있는 괘불지주에도 화려한 용이 조각 되어있고, 석등에도 민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난기 가득한 거북이 받침 위에 사각의 돌기둥이 놓여있으며 그 위는 공양상이 네 기둥 역할을 하는 특이한 형태의 화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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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화려한 다포식 팔작지붕 집으로 앞에서 보면 붕긋 솟아나는 영취산의 봉우리가 용마루 뒤에 솟아올라 육계처럼 보인다. 이 대웅전 안에는 영조 35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는데 가로가 8.2m, 세로가 11.15m로 화면 전체에 보살상 한 분이 그려진 보기 드문 대형 괘불이지만 사찰의 큰 행사 때에나 볼 수 있을 뿐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불가에서의 인연에 연유해서인지 대웅전 안에서 흥국사의 스님으로부터 흥국사와 불교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원통전으로 향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5호로 지정된 흥국사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이 땅 어디 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으로 붙여진 전각이다.
1624년에 중창되었다고 하는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면서 4방 툇칸에 활주를 세워 공간을 두었고 전면에는 1칸의 공간에 마루를 깔아 입구로 통하게 하였다. 원통전 회랑의 툇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아들인다. 담벼락 옆으로 찔레나무가 찔레순을 피우고 나는 몇 개를 따다가 일행들에게 하나씩 먹으라고 권한다. “먹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은 내게 묻고 나는 “먹어도 괜찮다”고 다시 말한다.
정부당국에서 ‘구제역에 걸린 고기를 먹어도 인체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떠들어대도 믿지 않는 시대인데 사람들은 그래도 내 말을 믿는다. ‘맛이 어떻느냐’는 나의 물음에 ‘봄 내음이 내 몸 안을 휘젓고 지나가는 듯하다’는 누군가의 말에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안다. 아직 봄물 들지 않은 나무숲에 봄은 따사로운 햇살로 내려앉고 문득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린다. 들린다. 들린다. 아이들의 지절대는 이야기 속에 지나가는 뭇새들의 노래 소리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소리가. <글·신정일 사진·김현준>
흥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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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 17번지 |
홈페이지 : 여수시 www.yeosu.go.kr 개 요 : 흥국사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가 흥하면 절도 흥한다" 는 나라의 융성을 기원 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여수국가 산단 가까이에 위치한 영취산의 깊은 숲속에 보 조국사가 1195년 (고려 명종 25)에 창건한 흥국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팔상전 등 문화재가 배치되어 있다. 흥국사 대웅전(보물 제396호)은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며, 대웅전 후불탱화는 보물 제 578호로 지정되어 있고 흥국사의 입구에 있는 홍교의 수려한 자태는 보물(제563호)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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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제공자 : 1) 555-701 전남 여수시 학동 100번지 여수시청 관광홍보과 (061-690-2222 / 전송 061-690-8113) 2) 555-200 전남 여수시 중흥동 산 17번지 흥국사 종무소(061-685-5633) |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문화유적지 흥국사♣♣ |
지정번호 : 보물 제 39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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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대웅전은 석가불상을 모신 조선조
때의 많은 대웅전 가운데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건물이다. 둥글게 높이 솟은 영취산 줄기의 뒷산을 배경으로 웅장하게 자리잡은 이 대웅전은 우선
배치 구도부터 범상하지 않다. 정방의 초석 위에 기둥은 배흘림의 둥근
원주를 세워 마당에서 보면 고대(高大)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기둥 위로 창방(唱枋)과 평방(平枋)이 연결되고 그 위에 주두(柱頭)와
공포(供包)가 결구(結構)되는데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이며, 공포와 공포 사이의 내벽에는 원불(願佛)
벽화를 그리고 시주자의 명단이 적혀 있어 당시의 신심을 알 수 잇따. 대웅전 내부의 고주 후벽에는 흙벽에 한지를 덧붙여 반가사유(半迦思惟)의
백의관음(白衣觀音) 벽화를 모셔 몹시 특이하다.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사분합(四分閤)의 빗살과 정(井)자의
복합문을 달아 개방하는데 문 하단부 판막 부분과 창살 부분을 분리하여 창살 부분만 열게 한 것이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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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 563호 |
흥국사 홍교는 1639년 계특대사가 축조한 것으로 돌아치의 원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이 잘 되어 오다가 1981년 폭우로 인하여 일부분이 붕괴되었다가 이듬해인 1982년 다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흥국사 홍교의 결구법은 모두 86개의 장대석을 각을 지게 짜올려 반원을 이루도록 서로 맞물린 것으로 아치형이다. 다리 주위로는 자연석의 작은 돌들을 그냥 쌓아 올려 아치형이 결구를 좀 더 튼튼하게 보완해 주고 있다. 홍예의 중심 맷돌은 용머리를 새겨 돌출시켰고, 양 홍예 난간부분에는 귀면사을 조각하여 잡귀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대석 위로는 거대한 판석을 올린 후 흙을 덮어 통행하는 사람과 짐의 무게를 거뜬히 지탱해 주도록 장치하였고 통해에도편리하게 하고 있다.크기는 전체높이 5.5m,전체길이 40m, 홍예폭 11.3m, 내벽폭 3.45m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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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 578호 소 재 지 : 여수시 중흥동 17 규 모 : 458 × 407cm 시 대 : 조선후기(1663) 지 정 일 : 1974년 7월 9일 |
대웅전에 봉안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후불탱화, 흥국사 대웅전후불탱 - 화면 가운데에는 석가모니불이, 그 주위에는 6구의 화불, 4대보살, 사천왕상, 6대제자, 용녀, 용왕, 범천, 제석, 팔부신상 등 외호청문성중이 에워싼 원형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 탱화는 군도식 구도로 상층효과를 살려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에워싼 것이며, 사각형의 얼굴 형태에 신체는 비현실적으로 묘사했으며, 선은 경직되었다. 그러나 옷깃의 날카로운 필선은 17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주홍색은 약간 탁한 주홍색과 두광에 칠해진 색이 튀는 양록색을 썼으며 꽃무늬나 옷주름선 등에는 고상한 금색이나 금체를 구사하고 있어 고상하고 풍위있는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보물 제578호로 지정되었으며 화기에 의하면 강희 32년(1693)에 화원 가선대신, 의천이 제작한 불화로 왕실의 번영과 안녕 그리고 국태 민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 화기(畵記)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강희삼십이년계유사월일(康熙三十二年癸酉四月日) 영축산흥국사영산회필(靈鷲山興國寺靈山會畢) 공안우태위주상삼전하만세수만세국태민안(功安于泰爲主上三殿下萬歲壽萬歲國泰民安) 법륜상전(法輪常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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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유형 문화재 제 45호 |
관세음 보살이 모셔진 곳을 관음전 또는 원통전이라 하며, 그 사찰의 주불전일 때만 이름을 사용한다. 원통전은 그 이름대로 관세음 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다른 이름으로 관세음 보살이나 아미타 삼존불을 모시고 후불탱화로는 주로 아미타불화를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개는 관음도를 봉안하고 있는데, 특히 다른 벽면에는 단독 관음도를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단독 관음도는 극락전에도 봉안되거니와 옛부터 관음을 주존으로 하는 관음도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관음 보살 신앙이 가장 성행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고려 명종 25년(1195) 보조국사가 지은 건물로서 조선 명종 13년(1560) 법수대사가 중수하고, 인조 2년(1624) 계특대사가 재중수한 후 1974년 해체, 보수되었으며, 1988년 지붕의 기와를 점검하다가 암막새에 '승정육년 관음전' 이란 명문을 확인함으로써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승정육년은 1633년인데 이 때에는 이 '원통전'을 '관음전'이라 불렀으며 17세기 전반기에는 원통전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정자형으로 팔작지붕의 한면이 현관구실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포는 주심포와 다포계의 혼용양식으로서 엄밀히 말하면 주심포계 건물로 주심포 계통이 다포계를 절저히 모방한 수법이 공포 세부에서 보인다. 그리고 익공계의 양식도 내포되어 있어 재미있는 절층 양식이다. 더욱이 내동을 중심으로 사방퇴간이 붙고 따로 3칸의 배전같은 건물이 부가된 것은 평면상 사찰 건물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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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유형 문화재 제 187호 |
양손을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으며, 작은 입과 눈, 약간 치켜 뜬 듯한 눈과 반달같은 눈썹은 한국 사람을 너무나도 닯았다. 근엄하면서도 웃는 듯한 사랑과 연민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 손과 발의 모습은 매우 섬세하며 두광은 녹색으로 처리하고 신광은 금선으로 투명하게 처리하였다. 남해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고, 극락조와 감로병, 버들가지가 그려져 있으며, 선재 동자가 보살을 우러러 보는 자태는 경건하고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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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글 1 - 한국의산
글 2 - 관광공사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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