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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괘불 - 보물 제1265호
<< 무량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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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무량사에 간다. 산들이 은밀하게 품을 열어놓은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보령에서 성주터널을 지나 다시 만수산 골짝으로 파고 들어야 무량사에 닿는다.
아침 동살에 비친 산사는 정갈하다. 석등과 석탑, 극락전이 열을 지어 서있고 마당 한 쪽엔 수령 300~400년은 됨직한 느티나무와
허리굽은 반송, 꼿꼿한 편백나무가 박혀 있다. 잘 찍어놓은 풍경사진같이 나무 한 그루도 흐트러짐이 없다.
극락전과 석탑, 석등이 참 아름답다.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극락전(보물 356호)은 2층이다. 마곡사 상대웅전, 금산사
미륵전(3층), 쌍봉사 대웅전 (3층) 등 몇 안되는 고찰에서만 볼 수 있는 형식. 세월에 바래 단청이 희미해졌지만 장중하다. 석탑(보물
181호)은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많이 닮았다.
위엄을 갖추었지만 무겁지 않고, 세련됐다. 불교를 알지 못하는 무지렁이의 눈에도 아름답다. 석등(보물 233호)은 화려한 장식은 없지만
미끈하고 날렵하다. 이끼 낀 담장, 닳을 대로 닳은 싸리비, 이슬에 젖어 반짝이는 배롱나무…. 세상에선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것들도 산사에선
곱고 아름답다.
만수산의 만수(萬壽)나 무량사의 무량(無量)은 헤아릴 수 없는 극락정토를 뜻한다. 이름처럼 무량사는 속가와는 한참 떨어져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다. 해가 저물자 그나마 답사객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먹물 같은 어둠이 스며드는 저물녘 박새가 까치밥을 쪼며 짝을 부르는 소리,
까막딱따구리가 소나무에 둥지를 트는 소리가 귓구멍을 파고 든다. 산을 태우던 단풍에 빼앗긴 마음이 언젠가부터 바스러지는 낙엽 소리를 쫓고 있다.
아시는가. 늦가을은 귀가 열려서 온갖 자연의 소리에 더듬이를 세우게 된다.
어느새 초승달이 떴다. 공양보살의 밥그릇 씻는 소기라 경내에 깔렸따. 출타 중인 주지가 돌아와 홍가사를 차려입고 범종으로 산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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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1,200년이나 됐지만 무량사엔 주지 한 명, 기도승 한 명, 주지의 도반 한 명 등 승려가 모두 3명뿐이다.
무량사는 아직 속세의 때가 묻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절이 참 절답다.
출처 : 경향신문
눈처럼 근심 쌓인다고요? 무량사로 가십시오
강렬함에 수직성까지 더해지면 난폭해집니다. 정수리로 내리꽂히는 여름 햇살도 그렇습니다. 열기뿐만이 아니라 완강한 수직성으로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압도하는 법 없이 우뚝한 것들은 수직과 수평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흔히 최선의 인간됨을 말할 때 ‘냉철한 머리에 따뜻한 가슴’을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수평적 사고가 결여된 인간의 카리스마 과잉이 독재로 귀착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오래된 동리의 동구에는 으레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흔히 ‘정자나무’라 불리는 그 나무는 ‘당산나무’이기도 합니다. 신목(神木)이면서도
절대적 권위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높이만큼 팔을 벌려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입니다.
솟아오른 산과 누워 흐르는 강, 일러 산천(山川)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덕을 함께 갖춘 느티나무가 당산나무로
기림을 받는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닐 것입니다.
이유미씨의 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1,000년 이상 된 나무가 예순네 그루인데, 그중 스물다섯 그루가 느티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느티나무에서는 노송(老松)에서 느껴지는 늙음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그 그늘에선 할아버지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강물처럼 흐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수산(萬壽山) 무량사(無量寺)-. 산의 수명으로 보자면 세상 모든 산이 만수산일 터이지만, 무량사가 있음으로 해서 만수산(575m)은
고유명사가 됩니다. 무량사의 주불은 아미타불입니다. 한자로 아미타불을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라 번역하는데,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이자
한량없는 수명의 부처라는 말이겠지요. 쉽게 말해서 서방 극락세계의 주재자가 바로 아미타불인 것입니다. 이런 부처가 머무는 도량이니 이름하여
무량사이고, 그것을 품에 안은 산이니 당연히 만수산일 것입니다.
만수산과 무량사는 느티나무 같은 절입니다. 형상으로도 그렇고 역사적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무량사의 동·북·서 방향을 감싸안은 만수산은
모난 구석이라고는 없습니다. 교과서식 용어로 노년기 산의 전형을 보여주는 산입니다. 무량사의 주불전인 극락전(보물 제356호)도 팔작지붕의 2층
구조로 우뚝 솟아 위엄이 넘치지만 위압적이진 않습니다.
실제로 무량사 경내에는 두 그루의 기품 넘치는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5층석탑이 있고 석탑 앞에 극락전이 있는데, 그
셋의 조화가 비범한 눈에도 신묘한 어우러짐으로 자각됩니다. 천왕문을 프레임으로 보이는 그 모습은 절대미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무량사의 신앙정체성은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행적을 통해서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5세 신동으로 불린 천재시인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보고는 출가승이 되어 산천을 떠돌다가 이곳 무량사에서 육신의 옷을 벗습니다. 한평생 탈속의 삶으로 일관한 그가 굳이 왕생극락을
빌 까닭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무량사를 찾았을까요. 만류하는 행자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험하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백 년이 지나도 나를 귀찮게 할 관리 하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만저만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험하고 외진 곳으로 치자면 오세암이 훨씬 앞자리이니까요. 그에게 있어서
서방정토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변함없는 산천이야말로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다함없는 수명의 아미타불이 아닐는지요. 백제 말기 123년간의 수도 부여가 오늘날 소읍에
지나지 않는 것이나,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건국도 풀끝 이슬 같은 인간사의 허망함을 증언할 뿐입니다. 따라서 김시습은 오세암처럼 속세와 격절된
공간으로서의 자연보다는 인간을 품어주는 자연에서 영원을 봤을 것입니다. 만수산이 바로 그곳이었겠지요. 또한 무량사는 1488년(성종 19)에
그가 중수한 적이 있을 만큼 인연이 각별하기도 합니다. 무량사에는 그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 있는데, 현재 걸어 두고 있는 것은 사진
복사본입니다. 그리고 그의 부도는 산내 암자인 무진암 옆에서 정확한 내력을 알길 없는 8기의 부도와 함께 서 있습니다.
무량사는 당연히 백제의 사찰일 것이지만 전해오는 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839-856) 대에 범일(810-889) 국사가 창건했고,
신라 말에 무염(801-888) 선사가 중수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당시의 건조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후 고려 고종(1213-1259)
대에도 대규모로 중창을 했지만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조선 인조(1623-1649) 대에 중창이 이루어질 때 진묵(1562-1633) 선사는
아미타불 점안(點眼) 후 취흥에 젖어 시를 읊조렸다는 얘기도 전합니다. 초탈의 자유인 김시습을 기리는 선사다운 파격으로 여겨집니다.
무량사의 현재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로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사격은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지만,
도량 곳곳에 서린 위엄은 섣부른 비교 따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합니다. 만수산의 울창한 산림과 도량의 조화도 인간과 자연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펼쳐 보입니다. 사실 이런 상투적인 표현이야말로 무량사의 진면모를 깎아내리는 일임을 잘 압니다. 우둔함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만
간단하게나마 그 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무량사의 주불전인 극락전(보물 제356호)은 조선 중기 건축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법주사 팔상전이나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보전과 같은 몇 안 되는 중층 구조인데, 절로 머리를 숙이고 우러르게 하는 위엄이 서려 있습니다. 오만의 끝을 향해 치닫는 초고층
빌딩에서 느끼는 위압감의 정체가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임을 절절히 깨닫게 합니다. 아무리 걸작이라 할지라도 문화재적 가치로만 절집을 바라봐서는
안될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이루었으되 인간의 손길이 지워져버린 그 모습은, 근원으로의 자연에 바치는 경외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만유의 본성이 공(空)임을 강조하는 불교가 형상을 세우고, 절대자로서의 신을 부정하면서 부처에 대한 예경을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극락전의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통층 구조입니다. 웬만한 크기의 불상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는 구조인데, 흙으로 빚어 개금한
아미타삼존불은 동양 최대의 크기입니다. 중앙의 주불은 아미타불로 그 높이가 5.4m이고, 좌우에 협시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4.8m입니다.
만약 그 정도의 크기가 아니었다면 내부 공간은 속절없는 황량함으로 부조화를 이루었을 것 같습니다.
극락전 앞의 5층석탑(보물 제185호)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백제계 석탑이라 합니다. 장중하면서도 경쾌하고,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백제계 석탑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5층석탑 앞의 석등(보물 제233호)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리나라 석등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밖의 전각으로는 미륵전 영역에 명부전과 우화궁이 있고, 서쪽으로 석축을 쌓아 단을 높인 영역에 영산전과 영정각, 천불전이 있습니다.
북서쪽 기슭으로 작은 계곡을 건너면 산신각이 있습니다. 짙을 대로 짙어진 녹음을 밟으며 이들 전각을 둘러보노라면, 근심 걱정 다 내려놓아서
오히려 낯선 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산문을 나서며 김시습의 시비 앞에 섰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산그늘에 몸을 누인 그의 심회가 바람처럼 다가왔습니다.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지면 관계상 원문은 생략하고 정한모 선생의 번역문만 옮깁니다.)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 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지면 관계상 원문은 생략하고 정한모 선생의 번역문만 옮깁니다.)
혹시 머리맡에 근심이 눈처럼 쌓이는 날들이 길어지거든 무량사로 가십시오.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의 만수산 자락에 안심(安心)의 요람이
펼쳐져 있을 겁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 사진 정정현 차장
/ 사진 정정현 차장
◆ 무량사 숙식
일주문 앞 사하촌(만수리)에 5군데 정도의 식당이 문을 열고 있다. 외산면 소재지가 2km거리에 있어서 숙박 시설은 없다. 대부분의
식당은 명승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단으로 손님을 맞는데, 2대에 걸친 광명식당(041-836-5176)의 동동주는 답사꾼들 사이에 꽤나
유명하다. 현재는 아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동동주만큼은 노모의 손길로 옛맛을 유지하고 있다. 삼호식당(041-836-5123)은 무량사 신도들도
즐겨 찾는 식당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대천(20km), 청양(23.4km), 부여(27km)에서 다양한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출처 : 글 - 월간 산
사진 - 산사랑이야기님,
유리님, 응천님, 메이짱님블로그갤러리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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