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불영사 - 경북 울진 : 불영계곡

창현마을 2006. 2. 14. 20:01

 

 

 

 

 

 

 

 

 

 

 

'저 못에 부처님이 비쳤다'
울진 출신 남사고의 수도 거처
인현왕후 살린 도승의 전설도
지금은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
題字 : 서산 권시환

산위의 바위그림자가 부처님의 형상으로 비쳤다는 유래를 갖고있는 불영사의 연못.
산위의 바위그림자가 부처님의 형상으로 비쳤다는 유래를 갖고있는 불영사의 연못.
울진군 울진읍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20여분 가다보면 불영계곡으로 이어지는 수려한 산세를 만난다. 푸른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과 깊은 계속, 황금색으로 물든 산은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걸음을 잠시 멈춰 시선을 돌리면 깎아놓은 듯한 암괴석들로 가득찬 바위절벽과 오색으로 갈아입은 나무가 가져다주는 운치에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불영계곡을 따라 난 국도에 외롭게 선 '불영사' 표지판 아래로 200여m쯤 내려가면 일주문을 만난다. 1992년 7월에 세워진 이 일주문은 높이 8.2m, 폭 4.5m 크기로, 단청이 아름답다. 여기서 300여m쯤 내려가면 아치형 상로교(길이 60m, 폭 m)가 나타난다. 교각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특이하고, 사찰 입구 교량으로는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든다. 원래 이곳에는 계곡을 이어주는 낡은 불영교가 있었는데 2002년 태풍 '루사'로 유실, 복구사업으로 새로 만들어졌다.

이곳 계곡깊이 자리잡은 천축산 불영사의 창건은 신라의 의상대사의 행적과 관련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진덕여왕 5년(651)에 의상대사가 뒷산 단하동과 해봉에 올라가 북쪽을 내려다보는 순간 산세가 서역의 천축과 같은 명산으로 보여 천축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그는 산아래 큰 못에서 지내던 아홉마리의 용을 주문을 외워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는 잠시 구룡사라 불렀다. 그 뒤 절의 서편 산 정상에 있는 바위의 그림자가 부처님 형상으로 항상 호수에 비쳐들었다고 해서 불영사(佛影寺)로 개칭했다고 한다. 지금도 용이 산으로 굴을 뚫고 넘어간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절터의 동쪽으로는 청단봉, 삼각봉이 있고 이 봉우리 아래에 좌망대와 오룡대가 자리하고 있다. 또 남쪽으로는 향로봉, 종암봉, 단하봉, 해운봉 그리고 서쪽으로는 부용성, 학소대, 용혈, 북쪽에는 금탑봉, 의상대, 원효굴 등이 자리잡고 있다. 절내에는 크고 작은 10여채의 건물이 있는데 대웅전만 창건 당시의 건물일 뿐 나머지는 조선시대부터 최근에까지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범종각은 1978년 9월 종과 함께 만들어져 타종식이 열렸다.

천축산 불영사는 의상 대사가 이름을 지었고 고려때 와서 한때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고도 불렸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도승 의봉 법사가 절을 떠나 전국의 명산을 찾아 돌아다니다 15년만에 다시 돌아왔을 당시 이곳 한 촌로가 부처님이 귀향하게 됐다며 기쁘게 맞이한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도 잠시, 다시 불영사라는 절 이름을 되찾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조선 태조 5년에 외침을 받아 사찰은 전소되고 이듬해 소운 대사가 사찰을 복원했다. 당시 울진 현령 백극제(白克濟)가 죽었는데, 그의 부인은 꿈에 '불영사에 사체를 안치해 백일기도를 드리면 되살아 난다'는 백발노장의 말에 따라 백일기도를 드렸고, 환생한 백극제는 부처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법당을 지어 환생전(還生殿)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법당 동쪽에 위치했던 이 환생전은 임란때 소실됐다. 이 즈음 울진출신 격암 남사고 선생이 이곳을 거처로 삼아 수도했으며, 임시 울진의병 사령부(1905~1906)로 사용되기도 했다.

연산 6년에 원남면 금매리 출신인 도승 양성법사가 사당을 새로 중건한 뒤 이곳에 머물다 세상을 떠나 화장됐는데, 이때 사리(舍利)가 나와 불영사 남쪽 동구 밖에 부도를 세워 사리를 모셔둔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양성각(養性閣)이다.

선조(임진년) 정월 초하루 아침, 불영사 남쪽 뜰 앞 소나무에 날아든 학 두 마리가 오랫동안 슬피 울다가 어디론가 날아간 뒤 절간 소반 위의 물그릇들이 상천하고 샘물이 황톳빛으로 변해
울진 불영사 전경. 주변 산세가 너무나 수려하다.2
울진 불영사 전경. 주변 산세가 너무나 수려하다.
불영사 대웅보전. 보물로 지정돼 있다.3
불영사 대웅보전. 보물로 지정돼 있다.
불영사 입구의 불영계곡. 명승 제6호로 지정된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다.4
불영사 입구의 불영계곡. 명승 제6호로 지정된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다.

석달동안 물을 먹지 못하는 징조가 있었는데, 그 해 4월 임란이 일어났다. 이듬해 7월 왜구의 침입으로 영산전(靈山殿)을 제외한 사찰 건물이 불태워져 수많은 난민이 생기고 학살되기도 했다. 광해군 원년(1609) 성원 법사가 영산전을 재건했고, 숙종 27년 진성 법사가 보수했으며, 영조 원년(1725) 천왕 법사의 재건으로 고종 36년(1899) 설운 법사가 증수했다.

숙종 22년 인현왕후 민씨가 장희빈의 고자질로 쫓겨나 5년동안 친정에 머물렀다. 민씨는 고민 끝에 자살을 기도하고 독약사발을 앞에 두고 한없이 울다 지쳐 잠들었는데, 잠결에 나타난 백발노승으로부터 '나는 천축산 불영사에 있는 도승인데 이틀만 기다려 보라'는 말에 따라 이틀을 기다렸더니 왕명으로 복위돼 환궁하게 됐다고 한다. 민씨는 환궁에 보답하기 위해 불영사 경내 주변 사방 십리 내의 땅을 사찰의 소유로 하사하고 축현당까지 중건했다.

숙종 27년에는 진성법사가 관음전을 수리하고, 영조 원년에는 천왕 법사가 불탄 대웅보전과 황화실, 설사당을 재건하고, 고종 36년 설현 대사가 대웅본전, 관음전, 명부전, 영산전, 조사전, 응향각, 황화실, 설선당, 칠성각, 산신각, 무영탑 등을 증수했으며, 1925년 칠성각을 새로 증축했다.

신라 고찰 불영사는 최근 비구니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일운 주지스님의 노력으로 법당과 요사채, 일주문 등이 증축돼 도량이 확장되고 있다.

대웅전 주변에는 의상대사가 심었다는 수령 1천300년, 지름 150㎝의 굴참나무는 말라죽어 밑둥치만 남아 오가는 행인들의 돌탑 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사찰주변이 새롭게 많이 정비돼 수령 수백년씩 된 각종 나무들, 특히 법당 앞 수령 600년 된 느티나무, 은행나무만이 천년고찰의 애환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불영사의 문화재 보물 3점, 불영계곡은 명승 제6호

대한불교 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인 불영사는 현재 70여명의 비구니들의 수도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대웅전 주변에는 현재 노승들의 선방 등이 증축되고 있다.

보물 제730호인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조선중기에 지어졌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의 크기도 일정치 않은 자연석 그대로 사용해 절간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1984년 해체때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했다.

보물 제1201호인 대웅보전은 법당을 중심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법당 내에 있는 영조 원년(1725)에 그려진 탱화로 미뤄 대웅보전도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계단 좌?우에는 상반신이 노출된 거북이 대웅보전을 마치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 절터의 불 기운을 누르기 위한 방법으로 거북 돌을 이곳에 받쳤다는 얘기도 전한다.

보물 제1272호인 영산회상도 탱화는 조선 영조 9년(1733) 석가모니불이 영산회상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살들의 배열 가운데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강조한 것이 특이하다.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162호인 부도는 연산군 6년(1500) 불영사를 중창하고 입적한 양심당의 부도이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35호인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3층으로 탑신과 상륜부까지 갖춘 탑이다. 통일신라 하대의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두대간의 운치를 간직하고 있는 인근 불영계곡은 명승 제6호로 지정돼 있으며, 길이 15㎞에 걸쳐있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어우러져 동?식물의 서식처는 물론 학술탐사지역으로 소중한 곳이다.
 
출처 : 글 1 - 영남일보
                      사진 - 소구리홈갤러리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