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신륵사 - 경기 여주

창현마을 2006. 2. 4. 23:55
 
 

 

 

 

 

 

 

 

 

 

 

 

 
 

 

 

위    치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홈페이지 : www.silleuksa.org 
연 락 처 : 신륵사 (전화 031-885-2505 / 팩스 031-885-5936)      
개    요 : 신륵사는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金炳
           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
           서 다시 신륵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근.현대사에 있어 신륵사의 활동은 크게 알려지지
           않으나, 1925년 열반당 14칸을 새로 짓고, 1929년 강성인 姜性仁스님이 주지 재임시 김인
           주 金仁柱가 화주化主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신륵사는 여주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상류 봉미산 기슭에  있는
           오래된 전통 사찰로서,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절은 강가
           쪽 암반 위에 벽돌로 쌓은 다층 전탑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벽절이라고도 불렸다. 나옹화
           상이 이 절에서 입적을 했고, 그의 보제존자석종은 1379년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
           표적인 부도 양식을 띠고 있다. 성종 옆에 있는 석종비문은 목은 이색이 썼다. 역사가 깊
           고 규모도 웅장하며 주위의  경관도 뛰어난 사찰로 경내엔 화려한 극락전을 비롯, 조사당
           명부전, 다층석탑, 다층전탑, 석종, 대장각기비 등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8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곳 일원은 1977년에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개장시간 : 일출후부터 일몰시까지 (연중무휴)
이용요금 : 개인 - 어른 2,000원 / 청소년,중고생 1,500원 / 초등학생 1,000원
           단체 - 어른 1,500원 / 청소년,중고생 1,300원 / 초등학생   800원
이용시설 : 주차장(500대) , 퍼팅장, 배구, 족구, 농구 등 체육시설, 유료 뱃놀이 시설
도로안내 : 경부,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여주톨게이트 ⇒ 우회전(37번국도이용) ⇒ 4㎞직진후
           터미널사거리에서우회전 ⇒ 1.5㎞ 직진후 여주대교 ⇒ 여주대교 건너서 곧바로 우회전 ⇒ 
           신륵사(여주톨게이트에서 신륵사매표소까지 7㎞)
교통안내 : 1)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영동선 여주행 동부고속버스
            * 첫차06시30분부터(30-40분 간격 1시간10분소요)
           2) 동서울터미널에서 여주행 직행버스
            * 첫차07시30분부터(1시간 간격 1시간30분소요) 
주요문화재 : 1) 신륵사 조사당(보물 제180호)     
             2)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3)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4)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5)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6)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7)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
             8) 신륵사 극락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   
주변명소 : 영월루, 세종대왕릉, 명성황후생가, 고달사지, 목아불교박물관 
정보제공자 : ① 469-850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신륵사 종무소 
             ② 469-800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홍문리 4번지
                        여주군청 문화관광과 (031-887-2064)

 작성기준일   2005년 11월14 일

* 현지사정에 따라 정보가 변경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사항을 사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신륵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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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당 뒷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석등과 석종.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석종부도는 고려말의 대표적인 부도양식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이백리, 여주읍에서는 동편으로 불과 1킬로미터에 위치한 신륵사(神勒寺).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일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가람(伽藍)이다. 신륵사는 천송리의 아담한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를 틀고, 멀리 아스라히 다가드는 산세의 윤곽을 뒤로 한 채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다. 신록의 청아한 빛이 남한강 굽이에 실려 여간한 절경이 아니다. 그런 연유로 이름난 시인과 묵객(墨客)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묏부리 얽은 바위 그 하나하나에 따뜻한 숨결 솟구치는 힘 배어 있으련만 바람은 그저 잊으라 하는구나. 먼 능선 굴참나무에만 웅겨붙어서 금빛 햇살 물 위에 엇비껴 일렁이고 뗏목은 유유히 흘러가는구나. 태고의 느린 가락을 실은 채, 허물어진 성벽 곳곳에서 남포가 터지고 꾀꼴새 두려워 이 골짝 저 골짝으로 피해서 우짖는데도 시인은 남한강을 바라보며 인간 생명의 젖줄이요 혈맥을 발견하고, 그 속에 내려 앉은 갖은 시름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는 듯하다.

승들의 숨결 담긴 전설과 유물이 풍부한 국내 유일의 강변사찰
여주는 이렇게 강을 끼고 있기에 쌀이 많이 나고 그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옛부터 쌀은 이천이나 여주 것이라야 했고, 그것을 솥내가 나지 않도록 곱돌에다 넣어 밥을 만들고, 이 때 연기 냄새가 밥맛을 그르치지 않도록 뽕나무를 때도록 했다는 말이 전해 온다. 여주가 마밥이며 떡 종류가 가지가지인 까닭은 이처럼 곡창지로서 가지게 되는 면모인 것이다. 신륵사로 향하는 여주의 들판은 가을을 기다리는 논밭으로 마냥 풍요롭기만 했다.


신륵사 대웅전의 전경. 이절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화상이 입적한 절로, 다층대리석탑, 석종부도 전탑 등 보물급 유물이 7점이나 보존되어 있다.
신륵사는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시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성종(成宗)때에 세종의 원찰(願刹)이 되기도 한 곳이다.그리고 일제하 기미년 3.1운동 때에는 당시의 주지스님이시던 김용식 스님이 앞장을 서서 면민들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탄압을 받았던 곳이라 전한다. 신륵사라 쓰여진 편액(扁額)의 중후한 글씨체에서부터 그 굳건한 역사를 읽어내게 했다.
사내에는 다층석탑, 조사당, 석종, 석종비, 석등, 전탑 등7점에 달하는 국가지정 보물이 안치되어 있었다. 선인의 발자취가 그런 유물들 속에 남아 여행객의 마음을 경건하게 하였다.
다층석탑은 우리 나라 석탑으로는 드물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기단면석에는 구름 속을 헤집고 노니는 용의 형상을 한 운용문(雲龍紋)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형상화한 파도문(波濤紋), 그리고 상하대석(上下臺石)의 연화문(連花紋)이 입체감 있게 새겨져 있다.
연꽃의 형상을 눈여겨 보고 있노라니 부처님의 너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부처님이 영산회상의 법좌에 올라 청초한 연꽃을 들어 뭇스님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여기에 응하는 이가 없었고, 마하기섭만이 부처님의 참뜻을 깨닫고 미소지었다. 여기서 염화미소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구차한 말로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고 읽어내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느라 삭막해져 대화는 단절되고 만다.
여기 신륵사에서는 물을 끼고 있는 까닭에 연잎으로 밥을 지어먹는 전통이 있다. 아침 이슬에 새초롬한 빛을 띠는 넓적한 연잎에다 불린 찹쌀과 연씨, 그리고 연뿌리를 썰어 넣는다. 이것을 곱게 묶어 찐 후 연잎을 헤쳐 먹는 것인데, 그 이름은 '연잎밥'이라 할 것이다.다층석탑의 연꽃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운치있는 식생활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다층석탑 바로 앞에는 삼존불을 봉안하기 위해 마련된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다. 내부의 삼존불은 광해군 2년(1610)에 인일, 구천 두 스님이 조성하였고, 뒷면의 탱화는 광무 4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 꼭 다문 부처님의 입술에 떠도는 미소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향 연기가 은은했다.
조사당에는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를 모시고 있는데, 원래는 세 화상의 영정만을 모셨었으나 현재는 나옹화상 목조상까지 봉안되어 있었다.
이 세 분 중 나옹화상은 신륵사에서 열반하셨다. 그래서 강변에서 수습한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석종부도가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안치되어 있다. 보주(寶珠)위에 조각된 불꽃무늬가 하늘로 치솟을 듯 살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8각 기단 위에 8각의 화사석과 옥개를 덮은 나옹화상의 석종부도(石鐘浮屠)가 있다. 거기에는 용무늬와 비천상(飛千像)이 새겨져 있는데, 하늘과 땅의 조화에 늘 마음쓰던 선조의 의식세계가 흐르는 옷깃에 내려앉았다.

신륵사의 풍광을 더욱 수려하게 하는 남한강의 도도한 물결. 충주와 오대산에서 발원, 여주를 끼고 흐르는 남한강은 나지막한 봉미산과 함께 신륵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전(塡)을 쌓아올려 만든 굴뚝. 다층전탑으로 유명한 신륵사의 면모를 강조하는 듯한 독특한 굴뚝 양식이다.

신륵사의 대웅전인 극락보전 앞의 다층석탑(보물 2백25호), 우리나라 석탑으로는 드물게 대리석이 석재인 이 탑의 기단면석에는 운용문과 파도문, 그리고 상하대석에는 연화문이 입체감 있게 새겨져 있다.
나옹화상의 전설이 간직된 강월헌의 수려한 풍광
조사당 앞에는 향나무가 서 있는데,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국케 한 무학대사가 심었다고 한다. 그런 구전을 믿기에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수령이 약 육백 년이라 추정되고, 나무 등걸의 붉은 빛과 잎새의 푸른 기운이 드센 걸로 보아 사실일 성싶기도 했다.
신륵사 뜰에는 사철나무들이 옹기종기 심어져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런데 가지를 치고 둥근 모양으로 키워져 인공적인 감을 주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원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원래 한국의 사찰에는 정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들이 즐기자고 있는 곳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수도를 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가 불교가 크게 융성하면서 극락정토의 장엄함을 신도들에게 보여주고자 불당의 둘레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으레 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조그만 섬을 띄웠다. ** 피안의 세계요, 그 주위의 물* 그리고 그 사이에 얼추 다리를 ***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길을 터놓았다. 그러나 우리네 사찰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원은 앞뜰이 아니라 뒤뜰이 된다. 남향으로 집을 지어 밝은 햇빛을 받아 마시고, 뒤로는 숲과 산이 정원으로서 자리를 지킨다. 이리저리 비틀고 전정(剪定)하여 기형의 나무를 만들지 않고, 제 스스로 가지를 뻗어 올려 쑥쑥 하늘로 손짓을 하는 그런 나무들이 정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륵사 안뜰의 잘 다듬어진 나무들은 옹색한 느낌을 주는 듯했다.
얼마 있으면 가을을 찬미하듯 국화꽃들이 신륵사 주변에 들어차게 되리라.
고대 중국의 천자들은 봄에 청색, 여름에 적색, 계하(季夏)에 황색, 가을에 백색, 그리고 겨울에 흑색의 옷을 입었다고 한다. 늦여름의 황색과 가을의 백색을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여지없이 황국화와 백국화이다.
이러한 동양인의 색감을 드러내듯 이 곳 신륵사에선 '국화송편'이란 것을 즐겨 먹었다. 국화송편은 우선 송편을 만든다. 국화 잎사귀를 얹어 전을 부친 다음 조청이나 꿀에 재워 놓았다가 송편에 싸서 먹는 음식이 그것이다.

풍광이 수려한 남한강변에 유람 온 선남선녀가 많았다. 화사한 웃음은 가을을 성큼 앞당기려는 듯 곱기도 하다. 그들은 강월헌을 찾아서 늦여름의 정경과 아릿한 전설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강월헌 아래 강가의 마암에서 용마가 날뛰어, 나옹화상이 절에서 신비로운 굴레를 가져다 씌우니 양순해졌다는 전설을...
달래강 푸른 물은 금탄(金灘)을 접하였고 새재 푸른 봉우리는 월악산(月岳山)에 이어져 드높다. 남북으로 보내고 맞는 일이 어느 때이라.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아득하도다.
조선조 전기의 서거정(徐居正)이 읊었다는 한시다. 여기서 금탄이라 서울로부터의 남한강 뱃길이 머무는 지금의 탄금대 부근을 가리킨다. 남한강의 뱃길과 새재의 육로가 충주에서 맞닿게 되는 지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서거정이 남한강가를 거닐며 하염없이 흐르는 물에다 인간세파의 엄혹한 현실을 실어 안타까이 노래했던 것이다.


조사당 앞에 있는 향나무, 무학대사가 그의 스승 나옹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둘레가 30여 미터나 되는 독특한 모양이어서 귀한 정원수로 평가되고 있다.
신륵사에는 그런 인간사를 안타깝게 여기듯 명부전(冥府殿)이 자리하고 있다. 명부는 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이며, 이 명부전이란 지옥 중생을 구원하고 자신의 성불도 마다한 재원지 장보살을 봉안한 전각이다. 그리고 염라대왕의 상도 그 옆에 그려져 있다.
명부전 안을 눈여겨 보며 김시습이 쓴 금오신화 속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이야기를 생각했다. 박서생은 중용과 주역에 통달하고 극락이니 지옥이니 귀신이니 하는 설을 강력히 부정하였다. 어느날 밤 꿈에 염라국에 가서 염라대왕과 세상을 미혹시키는 사물에 대해 문답을 전개하게 된다. 염라대왕은 박서생이 강직해서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기백을 장하게 여겨, 죄인을 심판하는 염라국의 통치자 자리를 물려준다. 그것은 꿈이었다.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난 박서생이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천년고찰의 체취가 담긴 듯한 경내의 돌담이 무궁화와 어우러져 한층 정감을 돋운다.

대들보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인 조사당(보물 1백 80호). 지공화상, 나옹화상, 무학대사의 영정만을 모셨으나 최근에는 나옹화상 목조상까지 봉인되어 있다.

국내에 남은 전탑중 가장 우수한 신륵사의 다층석탑
사람들은 현실을 중시하고 죽음에 대해 그리 두려워 하지 않다가도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어서야 퍼뜩 깨우치곤 한다. 삼라만상의 변화무상함과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뇌리를 스치는 것을....
나옹화상을 다비(茶毘)하던 곳에는 다층석탑이 서 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이 탑은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몇 기(基)의 전탑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까이 다가들어 차곡히 쌓인 돌들을 눈여겨 보니, 반원 두 줄과 당초무늬가 양각된 것이 눈에 띈다. 세세한 부분에까지 정성이 미친 것이다.
신륵사에선 앞에 말한 두 음식 외에도 '표고버섯 찹쌀 전병 무침'과 '우엉구이'가 유명하다. '표고버섯 찹쌀 전병 무침'은 표고버섯과 애호박, 그리고 찹쌀을 넣어 전병을 만들어 양념에 무친 것이다. 그리고, '우엉구이'는 우엉을 7cm 길이로 썰어서 살짝 데친 후 칼등으로 찧어 부드럽게 하고, 고추장으로 간을 한 밀가루 반죽에 묻혀 구워 내는 것이다.
상큼 다가든 가을 향기에 해가 짧아져가는 듯했다. 신륵사 주위를 배회하다 보니 흠뻑 자연에 빠져들었다. 어떤 시인의 서정이 그대로 다가들어왔다. 봉미산은 나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남한강은 나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 강변의 언덕 위에 서 있는 다충전탑(보물2백26호)
가까이 들여다보면 반원 두줄과 당초무늬가
양각진 것을 알 수 있다.

나옹화상을 다비(茶琵)한 남한강변 절벽에 그의 당호를 따서 세운 누각 강월헌(江月軒)의 모습.
이곳에 올라보면 수백리를 흘러운 남한강과 들판이 펼쳐져 가슴을 틔게 한다.

 

 

출처 : 글 1- 관광공사홈

   글 2- 산촌홈

                   사진  - 소구리갤러리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