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경주 석굴암석굴

창현마을 2006. 9. 20. 09:25

 

 

 

경주 석굴암석굴

“인간이 조성한 부처님 아닌 듯, 8세기 중엽 조각기술의 백미”

통일신라의 국력과 기술, 신라인의 불심(佛心)과 재능이 총체적으로 결집되어 탄생한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은 8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조성연대가 거의 확실하고, 당대를 대표하는 40여 구의 불.보살상들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불교유적이다. 1

 

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석굴암 석굴은 같은 대열에 올라 있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 중국의 둔황 석굴보다 한 차원 높은 불교의 정신세계와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석굴암 석굴의 위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사진설명: 발견 당시의 석굴암 석굴로 본존 여래상과 금강역사상이 보인다. >

 

석굴암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인 신라 경덕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에 의하면, 김대성이 751년에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시공되기는 했으나, 왕실의 원찰, 혹은 국찰(國刹)로서의 석굴암 창건을 기원한 경덕왕의 후원이 없었다면 완공은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석굴암은 김대성이라는 한 개인이 아닌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룩된 건축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석굴암 변천에 관한 내용은 〈불국사고금창기〉에도 나타나 있는데, 1703년(숙종 29)과 1958년(영조 34년)에 중수했고, 조선 말기에 와서 조예상이 또다시 중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실의 원찰 또는 국찰로 명성을 떨쳤던 석굴암의 석굴이 한 동안 세인들의 관심 밖에 있다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한 해 전이었다. 발견 당시의 전후 사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1938년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발간한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책에, 명치 42년(1909), “경주 인사에 의해 처음으로 소개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내용이 단순.모호하여 실상을 아는 데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1909년 한국을 다녀간 독일학자 안드레 에카르트 박사가 처음 발견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것은 ‘경주 인사’가 석굴암을 처음 발견했다는 시기와 에카르트 박사가 한국을 다녀간 시기가 우연히 일치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인사’가 에카르트 박사가 아니라면 최초로 석굴암 석굴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사진설명: 제1차 보수 공사 장면으로 10대 제자상이 해체된 상태로 놓여 있다.>

 

경주에서 나서 평생을 고적답사와 신라 문화재발굴에 평생을 바친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 선생은 석굴암 석굴 발견의 자초지종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둘러싼 석벽에 10대 제자 조각상 도열

인도 아잔타.중국 둔황석굴보다 우수

일제의 무모한 보수로 누수 등 부작용

해방후에도 방치하다 1961년에야 관리

 

 

“석굴암 석굴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한일합방 직전인 통감부 시대의 어느 경주 우체부였다. 그날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불국사를 거처 토함산의 동산령(東山嶺)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우편배달을 가던 이 우체부는 범곡(凡谷)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 문이 있고 천장이 무너져 있었다. 들여다보니 돌부처가 많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우편배달을 마치고 3, 4일 뒤에 돌아 온 그는 이 사실을 우체국장에게 알렸다. 일본말이 서투른 그는 ‘돌사람(이시노히도)’이 굴속에 하나 가득 차있다고 설명하니 우체국장도 놀랐다. 얼마 후 당시의 군수 양홍묵을 비롯하여, 부군수, 고적 애호가, 금융조합 이사, 사진사 등 일본인들이 현장 답사를 했다.

 

석굴의 존재 사실을 보고받은 초대 통감 소네 아라스게(曾根荒助)가 경주로 찾아와 석굴을 직접 둘러봤다. 합방이 된 후에는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와보았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서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뜯어 서울로 운반하라는 명을 내렸다. 과연 청부업자들이 내려왔으나 모두 데라우치를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총독부는 1913~15년에 제1차 보수 작업을 시작했다.”(동아일보, 1961년 11월1일자 기사 참조)

 

석당 선생이 말한 ‘경주 우체부’가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말한 바로 그 ‘경주 인사’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석굴암 석굴 발견 이후 총독부가 1차 보수 작업을 시행했으나 시멘트를 과도하게 사용한 관계로 습기 발생에 의한 풍화작용 등 다른 여러 가지 예기치 못한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일제는 1917년 7월에 2차, 1920~1923년에 제3차 보수 공사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수.침수.결로 현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불상에 이끼가 끼는 등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진설명: 보수공사 후의 석굴암 석굴로 입구 양쪽 벽을 큼직한 사괴석으로 축대 쌓듯이 처리한 모습이 어색하다.>

 

일인학자들도 솔직히 인정했듯이 수리 공사 후 석굴암 석굴은 원형과 많이 달라졌고, 보수작업은 오히려 고적을 오손하는 결과만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원형이 훼손된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처음 공사 전까지 있었던 감실(龕室)의 석상 2기와 석굴내의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놓여 있던 대리석 오층석탑이 행방을 감춘 사실이다.

 

처음 답사에 참가했던 한 일본 사람은 1929년 경주 도청회의실에서 열린 고적 강의에서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훔쳐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우리 정부에 의한 석굴 보존 대책이 수립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1년 9월부터 석굴암 보수 및 봉원공사 계획 수립과 동시에 기초 조사에 들어갔다.

 

조사를 통해 얻은 결론은

 

①불상 부식과 침식의 주된 원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시멘트를 남용하였기 때문이고,

 

②전실(굴 입구의 방) 입구에 기와집이 있었으나 고증을 잘못하여 일본식으로 변조, ‘터널’처럼 만들어 놓았고,

 

③전실 입구 좌우 면에 있던 2기의 팔부중상을 ‘ㄱ’자로 꺾어 굴 내부를 향하게 변형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보수공사는 침수.결로 방지와 원형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실 입구의 팔부중상을 원래 모습대로 모두 일렬로 세웠으며, 전실 앞에는 순 한국식 팔작집을 짓되, 집 기둥을 비롯한 구조는 충북 괴산 미륵리 절터 등을 참고했다.

당시의 석굴암 석굴 보수?복원공사는 우리나라 문화재관리 역사에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석굴암 석굴에 얽힌 일화들 중에 문화재 보존에 무지를 드러냈던 한 지식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1959년 11월경의 일이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측이 석굴 내부의 불상을 석고로 복제해 본국으로 가져 올 수 있는지 여부를 우리 정부에 물어왔다. 이에 정부는 홍익대학교 조각과 교수인 김경승씨에게 그 가능성을 검토시켰다.

 

김 교수는 원형을 조금도 상하지 않게 하고서도 석고형을 따낼 수 있다고 정식 보고하면서 적지 않은 예산까지 청구했다. 석고상 표면에 얇은 종이를 씌우고 각 부분의 형을 석고로 뜨면 불상을 훼손하지 않고도 복제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관련 학계에서는 석고로 형을 뜰 경우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불상 훼손은 막을 수 없다고 통박하면서 복제 작업 철회를 요구했다.

 

반대 여론에 떠밀려 석굴암 불상 복제 작업이 취소되었는데, 다행히 그 일은 문화재보존에 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설명: 보수공사 후의 석굴암 석굴로 사천왕상, 금강역사상, 팔부중상이 보인다.>

 

 

석굴암 석굴 입구 좌우 석벽에는 팔부중과 사천왕, 금강역사 등의 석상이 문을 지키고 있고, 석굴 주실(主室) 중앙에는 1장 1척이나 되는 본존 여래 석조좌상이 높이 5척의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다.

 

본존 위 궁륭천장에는 〈삼국유사〉에서 “석홀삼렬(石忽三裂)”이라고 표현한 ‘세 조각으로 갈라진’ 연판(蓮瓣)이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박혀 있어 신비감을 더해주고 있다.

 

본존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석벽에는 보살, 천신, 석존의 10대 제자 등의 조각상들이 시위하듯 서있다.

 

본존 앞쪽의 좌우 벽에는 문수보살상.보현보살상, 범천.제석천상이 부조되어 있고, 보살상에 이어서 사리불.마하목건련.마하가섭.수보리.부루나.마하가전연.아나율.우파리.라후라.아난 등 10대 제자상이 도열하고 있다.

 

본존 뒤쪽 벽면 정중앙에는 정면을 바라보고 서있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그리고 벽 위쪽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각 감실 마다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2상이 없어지고 8보살상만 남아 있다.

 

감실 보살상의 이름은 각각 금강장보살.관음보살.지장보살.유마거사.

 

문수보살.미륵보살.허공장보상(대세지보살).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이상의 각 불.보살상의 면모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