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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나의 여행은 한때 마한 또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익산시 왕궁리에서 시작해서 계백장군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황산벌에서 끝날 것이다. 백제 유적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이곳은 그래도 꽤 긴 백제 문화의 회랑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불렀던 '호남가' 한 자락을 흥얼거린다. 만장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이요 이곳 사람들이 "왕금이" 또는 "궁평"이라고 부르는 왕궁리 왕궁터는 금마면 소재지로부터 전주행 국도변을 따라 약 3km 남쪽 금마산 자락의 끝에 있다. 아직도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는 탓인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다. 1989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조사에서는 남북으로 492m, 동서로 234m의 석축성벽이 드러나고, 대규모의 왕궁성 및 사찰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속속 발굴되고 있다. 고대 궁성 관련 건물의 대지 조성과 축조, 공간구획에 대한 새로운 자료가 확보되고 체계적인 궁성 설계에 의한 축조 양상도 확인됐으며 정원석으로 장식된 석축과 장대석 및 자갈로 바닥면을 만든 출입 시설도 드러났다. 발굴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백제의 금마 도읍설 등 감춰진 백제 역사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을까. ![]()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 때 작품이 아닌가 싶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는 왕궁리 5층 석탑은 당당한 느낌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제아무리 공든 탑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탑의 숙명이다. 나라는 무너진 지 오래건만 숙명을 거스른 채 홀로 서서 망국의 한을 되씹고 있는 석탑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왕궁리 5층 석탑은 백제 문화의 슬픈 아이콘이다. ![]() 왕궁평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셨던 절인 제석사지가 있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제석들’이라고 불렀다 한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는데 다시 절을 지은 후 탑 아래 심초석에 넣어 두었던 불사리와 동판 금강반야경을 넣었던 칠함을 안치했다고 한다. 탑 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목탑의 중심 찰주를 받치는 초석인 심초석이 남아 있어 이곳에 목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한다. 몇 안 되는 백제 절터로서 문헌기록에서 절을 지은 시기와 폐허가 된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무왕대의 왕궁평 유적과의 관련성, 백제 유적으로는 처음으로 암막새가 나왔다는 사실 등이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익산 쌍릉은 행정구역상 익산시 석왕동에 있다.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 (횡혈식석실묘)이다. 봉문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크기는 차이가 나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두 무덤은 발굴 전에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었는데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한다. 근처에 있는 미륵사가 백제의 무왕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보아 무왕과 그의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다. ![]() 7세기 초 백제 무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사지 서석탑은 현재 1층 기단까지 완전 해체한 상태이다.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 보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돼 1999년 해체·보수·복원하기로 결정하여 해체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1993년에 복원한 동탑은 절터 남쪽 당간지주 옆에 서 있는데 마치 한복 입은 어머니 옆에 무스를 잔뜩 바른 아들이 서 있는 것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다. 미륵사지에는 2기의 당간지주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2기의 당간지주가 약 90㎝의 간격을 두고 서 있는데, 크기와 양식, 조성수법이 같아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본다. 지주의 안쪽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다. 바깥쪽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띠를 돌린 후, 그 중앙에 한 줄의 띠를 새겨두었다.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 지주의 안쪽 면에 3개의 구멍을 각각 뚫어놓았는데, 맨 위의 것만 직사각형 모양이고 나머지는 둥글다. ![]() 미륵사터를 나와 함열 쪽으로 가는 4번 군도를 따라 3km쯤 가면 삼기면 연동리 4거리가 나온다. 사거리 왼쪽에 근래에 지어진 석불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 대웅전 안에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들어 붙인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오른 손은 배 앞 무릎 위에, 왼손은 가슴에 대고 중지와 무명지를 구부린 손모양이 특이하다. 이 석불좌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연꽃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희귀한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그 가치가 높다. ![]() ![]() 석불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태봉사가 있다. 태봉사가 자리 잡은 태봉산은 마한의 왕 기준이 세 아들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에 한 스님이 산신기도를 드리다가 산신의 현몽으로 아미타삼존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지금의 태봉사를 세웠다고 한다. 태봉사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부채꼴 모양의 거대한 광배에 3구의 석불을 돋을새김 한 것이다. 사각형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둥글고 원만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작고 규격화되어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왼쪽의 보관을 쓰고 합장한 보살입상은 본존과 비슷한 얼굴에 체구는 날씬한 편으로 관음보살로 생각되며, 동자승 형태의 오른쪽 보살상은 손에서 보이는 세부표현의 투박성 외에는 역시 날씬한 모습으로 나한상이라기보다는 지장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삼존불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상을 표현하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백제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불상은 아들을 점지하는 영험이 있다고 하여 지금도 득남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 논산 사거리에서 대전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8km쯤 가다보면 황반벌 휴게소 왼쪽에 부적농협이 보이는데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3km쯤 가면 충곡2리에 닿는다. 계백묘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부적면 수락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있다. 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 전장에 나가기 전에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의 용맹스러운 활약으로 4번의 싸움에서 이겼으나 수적인 열세로 말미암아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이곳을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계백의 목이 잘렸다고 전하는 '수락산'과 계백의 시신을 급히 거두어 가매장했다는 '가장곡'이 바로 이곳이라는 점과 계백 장군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바로 뒤편에 있다는 점이다. 무덤의 동남쪽이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황산벌이라는 점도 있다. 원래 무덤 일원은 석곽이 노출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충남도기념물 74호 계백장군유적전승지로 지적된 계백묘 근처엔 2005년 3월에 개관한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는데 유물 154점과 기록화, 영상 등이 전시되어 계백장군의 충절 정신과 예학의 전통문화를 한눈에 볼 수있다. 군사박물관을 나와 가는 길에 잠시 충곡서원에 들른다. ![]() 충곡서원은 백제 장군인 계백과 성삼문·등 사육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가 1933년 복원하였다. 경내는 계백 장군과 사육신에게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과 숙소로 사용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현재는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곡서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앞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올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이곳에서 맞는 일몰은 무척 장려하고 아름답다. 일몰의 희미한 빛 사이로 어디선가 진양조의 거문고 한가락이 들리는 듯하다. 80년대 난 거문고의 진양조 가락에 얹어서 강인한의 시 '전라도여 전라도여!'를 즐겨 낭송했던 적이 있다. 발치에 섬진, 영산강을 두고 제 설움에 돌아눕는 만경, 금강을 다둑이고 크막하게 갈재가 뻗쳐 솟은 재를 넘는 옛날도 옛날 소금 장수 시드러진 가락에 무더기 무더기 찔레꽃도 피고 산도둑놈 거친 숨소리에 소쩍 소쩍 새도 울어라. 달하 먼 발치로 내다보고 섰는 혼곤한 꿈빛의 고향이여. 이 나라의 가장 후진 백성들의 한숨이 모여서 삭는 곳 오늘도 질척이는 갯땅, 오 갯땅이여. 한 그릇 찬밥덩이 앞에들 놓고 죄없이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들고 그래도 남은 사람들끼리 꿀꺽꿀꺽 돌려 마시는 한 사발의 찬물 시리고 아픈 이 나라의 어금니여. 강인한 시 '전라도여 전라도여!" 일부 하루해가 긴 여름날엔 날엔 환청이 너무 많다. 삶의 지평선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석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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