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이라기보다는 이곳은 여행지라 소개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조그만 무인도에 불과하던 곳에 암자를 짓고 멋진 추억을 가슴속에 깊이 새길 수 있게 만든
그래서 입에서 입으로 무섭게 번져 전해진 감성을 일깨워주는 낭만적인
그런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그마한 암자이지만 무학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시간이 흘렀다
그것이 중복해서 올려놓게 된 이유라................
< 글 1 >
▒ 산과 바다, 그리고 절 ▒ 충남 서산 간월암 ▒ 오도(悟道)로 인도하는 달 밝은 바위섬 암자 |
어느날 갑자기 스님이 되겠다며 표표히 집을 나선 이웃이 있었다. 내 공부방이 있는 시골마을 양짓말에서는 얼마 전 김씨 성을 가진 농부가 벼를 베다 급사하는 변고가 생겼다. 과묵하지만 수줍음 많았던 김씨가 돌연 이승을 졸업한 뒤 그의 집안에서는 좀 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김씨의 아우 되는 사십대 중반의 사내가 느닷없이 중이 되겠다고 가출해버린 것. 그 의외의 소동은 양짓말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런 기억으로 남을 한바탕 희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나 얼마간의 씁쓸한 감회를 맛보아야 했다. 일찌감치 상처한 김씨가 아우에게 상속시킨 유산은 알량무비한 것이었다. 아직도 나어린 자식들에 대한 부양의 책무만이 자동 이양되었을 뿐이니까. 형제애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 짐을 감당하기가 현실적으로 버거웠을 게 틀림없었다.
형과 마찬가지로 찢어지게 가난했으나 형과는 달리 나약하고 염세적인 성품이었던 그 불운한 아우는 언젠가는 농약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는데 대중없는 자신의 팔자를 탓하며“젠장맞을, 중질이나 할 거여유”라며 어느 여명의 새벽에 첫버스를 타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는 닷새쯤 뒤에 실컷 얻어맞고 난 사람 같은 표정으로 털레털레 귀가했다. 며칠이고 일언반구조차 없이 구들장을 짊어지고 눈만 껌벅거리던 그는 이제 정신을 차려보겠다는 양 냉수를 한 양푼 들이켠 뒤 “웃겼슈. 퇴짜 맞았네유”라고 털어놓아 마을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는 요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절망에 빠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우울한 낯빛으로 툇마루에 온종일 나앉아 소줏병을 쓰러뜨리는 일에 전력하다가, 발작과도 같은 광란에 휩싸이는 일과를 거듭하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쇠절구 속의 가루처럼 미구에 산산이 부서져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계속되는 폭풍우 속의 생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안에서 그는 무기력하게 떨고 있는 셈이다. 행운의 여신이 입맞춰주는 복을 누리는 대신 운명의 심술에 의한 비애만을 얻어걸친 그는 그 사나운 팔자에 대한 나름의 적의와 반감을 가지고 입산을 도모했을 게 분명하다. 입고있던 마지막 단벌바지를 전당포에 맡길 때와도 같은 절박감으로 절간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퇴짜를 맞음으로써 현실도피의 망념으로부터 깨끗이 깨어나야만 했다.
이로써 고문 같은 삶의 고통, 무섭게 일그러진 운명의 치차에 끼어드는 일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리라. 그 각성이 그에게 더 큰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을 게다. 하지만 그의 운명이 그에게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때까지는 당분간 한없는 절망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 그런데 그게 어디 그만의 불운한 행로일 뿐이겠는가.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고향을 등진 채 무일푼으로 배회하는 쓸쓸한 여행자에 불과한 게 아닐는지. 정처 모를 낯선 유랑 속에서 때로 절망에 겨워 옴에 걸린 견공처럼 온몸을 떨어대는.
내 마음 안에 부처가 있다는 것,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할 뿐 모두가 부처가 될 성품을 지녔다는 게 불가의 법훈이다.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속에 대한 집착과 분별하는 마음으로부터도 떠남으로써 삼매(三昧)를 얻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이 ‘그러나’에 있다. 그러나 집착과 욕망과 번뇌로부터 완전히 나를 포기함으로써 고요한 참마음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아득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욕망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우리의 마음속을 날아다니는 이 사바의 수레바퀴 속에서. 탐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며 불안으로 흔들리는 이 부나비 같은 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바위섬 위 작은 암자 하늘은 쾌청했으나 센 바람이 사나운 날이었다. 홍성을 지나 서산 땅에 접어들자 서산 방조제의 탄탄대로가 나타났다. 천수만을 뒤집어엎을 기세로 거창한 간척사업을 감행한 대역사의 현장이다. 간월호라는 담수호와 불구가 된 천수만이 둑길 양편에서 제법 높을싸한 물결을 너울거리는 중이었다. 수천 수만의 겨울 철새들이 수면 위에 내려앉아 흔들리는 물결 따라 종이배처럼 뒤뚱거렸다.
운무와도 같은 일대 장관이었다.
점점이 내려앉은 새떼들은 한편 의미에 가득 찬 통신 부호들처럼 보였다. 저 천진한 새떼들의 울음소리와 비오는 날 논물에서 합창하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황량할 것인가. 아스라이 직선으로 뻗어나간 방조제 한 모서리로 바위섬 하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썰물 때라서 그 섬의 아랫도리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섬에 바로 간월암(看月庵)이 있다. 늘 푸른나무들 우거진 바위섬 상부로 간월암의 기와 지붕이 불쑥 내밀어진 채 햇살을 담뿍 머금은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햇살 나뒹구는 바위섬은 눈부셨다. 바다위에 봉분처럼 돌출한 작디작은 바위섬 하나. 그리고 그 섬을 화관(花冠)처럼 치장한 암자.
금시에 물결따라 돛단배마냥 스르륵 미끄러져 나아갈 듯 한없이 작고 가뿐해 보이는 바위섬 위에, 너댓 식구살기에 알맞은 단출한 여염집 구색으로 차분히 걸터앉은 간월암. 그러나 하염없이 아담한 덩치, 초라할 지경의 단조로운 전각들의 행색에도 불구하고 간월암은 만만치 않은 역사의 숨결을 호흡해 왔다. 일찍이 원효가 이 절에서 한 시절을 영위했다는 풍설이 전달되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李太祖)의 스승이었던 고려 말의 왕사(王師) 무학(無學)대사는 이곳에서 바다 위에 뜬 달을 바라보던 중 벼락불에 감전된 듯 홀연히 오도(悟道)했다.
근세의 걸출한 선봉(禪峯) 만공(滿空)화상이 또한 이 바위섬에서 오랜 나날을 머물렀고. 만공은 단명할 상(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래서 그 부모는 어린 만공을 김제 금산사에 데려가 사나흘간 부처의 가피를 구하는 치성을 드렸다. 그런 행사 뒤 소년 만공은 기필코 승려가 될 것을 작심했다고 한다. 낌새를 알아차리고 기겁한 부모들이 소년을 집안에 가둔 채 마음을 돌리도록 다그쳤다. 이에 굴하지 아니한 만공은 마침내 짚새기 몇 짝 둘러메고 야반 삼경에 줄행랑을 놓아 곧바로 입산해버렸다. 겨우 열 셋의 나이 때였다.
소년 만공을 출가로 인도한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때 이르게 스스로 피어나는 꽃처럼 그토록 어린 나이에 스스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킨 것이었으니. 열 셋의 나이에 차마 세속의 일이 번뇌스러웠던 것일까. 설마. 만공은 이상하고 특별하고 묘할 인연의 끈을 점지받았던 것 같다. 소년 때의 결행을 두고 훗날 만공은 이렇게 돌이켰다. ‘생후 처음 절간의 불상들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솟구쳤다. 그뿐인가. 스님들을 보았을 때에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달을 보는 섬 환희심. 만공은 그런 표현을 하고 있다. 고요하고 한가한 숲 속에 살기를 원하는 이가 이윽고 고요하고 한가한 숲 속에 이르러 세상의 모든 안락 중 최상의 낙을 느끼듯, 소년 만공은 절간에 갔을 때 용솟음치는 환희를 느꼈다는 게 아닌가. 비범한 기틀을 지닌 동량지재(東樑之材)의 싹은 그렇게 발현되었다.
그리하여 행자 시절부터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火中生蓮)’ 소리를 들으며 열 마리 닭 속에 섞인 한 마리 봉황처럼 탁발한 자질을 드러내었고. 언젠가 중이 될 뻔한 때가 있었다. 재수 시절 월출산의 한 절간에서 두 계절을 눌러 지낼 때였다. 하숙생 명색이었지만 절간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 서푼짜리도 못되는 우울하고도 미숙한 열정으로 피가 뜨거웠던 그 젊은 시절, 이런저런 운수납자들과 어울려 지낸 두 계절 내내 행복했다. 지내놓고 보니 그 역시 방황이자 헛된 탐닉이었을 뿐임을 알았지만 홀몸 하나에 의탁된 스님네들의 자유로운 분발이 신성해 보였다. 묘하게도 만나는 스님들마다 “그대는 중상이여”라고 거들었다. 하지만 내 욕망의 뿌리는 워낙 세속적인 데에 뻗어 있었다. 현자와 도인에 대한 선망에도 불구하고 정작 욕망의 가지는 전혀 다른 차원에 머물 뿐이었으니.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면서 간월암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밀물 때면 길이 물 속에 잠겨버려 헤엄을 치지 않는 한 간월암에 닿을 수가 없게 생겼다. 썰물 때 개펄 위로 드러나는 자갈길을 통해서만 간월암 있는 바위섬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간월도라는 섬이 있었다. 간월암이 들어앉은 바위섬은 그러니까 간월도에 딸린 부속섬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간월도는 천수만 간척공사로 육지화하고 말았다. 이제 옛날의 간월도는 간월도리(里)로 불리며 관광지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조선 때 대궐로 진상했다는 어리굴젓, 그리고 새우나 조개류 따위가 명물 행세를 하면서. 한가한 낚시꾼들, 미식가들, 철새를 보려는 탐조객들, 장장 이십여리에 이르는 방조제와 넘실거리는 바다를 구경하려는 여행자들, 아울러 간월암 순례자들까지 자못 많은 외지인들이 들이닥쳐 사시사철 복닥거린다.
앞으로 서산시에서는 이곳 일대에 날아드는 철새들을 주재료로 번쩍거리는 관광지구로 개발한다고 외쳐대는 판국이라서 어떻게 둔갑되고 변장될지 점치기 어렵다. ‘달을 보는 섬’ 간월도는 본디 피안도(彼岸島)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천 년 전 백제 때부터. 피안도.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열반의 세계.
백일홍과도 같은 생명의 현세를 초월하고, 윤회의 고리가 끊겨나가는 상락(常樂)의 영역. 그 이름도 거룩한 피안도는 개발의 진군 나팔소리 요란한 오늘의 사바세계에서 섬으로서의 수명을 끝내게 되었다. 개펄 위 다보록한 자갈길을 걸어 간월암에 이르자 지지구재재구 참새떼 소리 시끄러이 고막을 흔들어댔다.
법당 지붕 위에서, 산죽 울타리 숲에서, 해풍에 시달려 한껏 뒤틀린 목암주 가지 틈새에서 중구난방으로 울어대는 새들의 소리는 그러나 사실상 음악에 다름 아니었다. 덕분에 공기조차 한결 싱그럽고 향긋하게 느껴졌다. 무성한 사철나무 울짱 안에서 간월암의 분위기는 더없이 안온했다. 바다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던 사나운 바람도 멎어 있었다. 암자 둘레에 배열된 수목들이 방풍림 구실을 제대로 해내는 덕이었다.
네 화상의 존영 간월암의 구성은 조촐 간명하다. 법당 하나에 산신각과 요사, 그리고 미완의 종각이 이 역사 깊은 절간의 전부였다. 법당 전면의 둘레에 에두른 담장 중심께에 관음상 탱화를 모신 간이식 전실이 다소 이채롭지만 전체적인 짜임새와 생김새는 단순하고 평이하다.
된통 털털한 스님이 근무하는 덕택인지 너저분한 잡물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그러나 뜨락에서 자라는 많은 초목들은 바다 기운과 햇볕의 세례 속에서 원기롭게 자라고 있어 보기에 흡족했다. 모녀로 보이는 두 여인이 연신 절을 하고 있는 법당 안은 초겨울답게 써늘했다.
관음보살상과 석가모니불이 나란히 봉안되었으나 너무도 왜소한 체신들이어서 전각 내부가 헐렁해 보였다. 이 절의 궁색한 살림의 징표인지 벽면 한쪽은 흙벽의 맨살을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불단 후벽의 좌측면에는 네 화상의 존영(尊影)이 걸려 있었다. 간월암에서 도를 이룬 무학과, 무학의 스승인 나옹(懶翁)왕사, 나옹의 스승인 지공(指空)선사, 그리고 1914년에 간월암을 복원한 중창주 만공의 초상을 나란히 봉안해 두었다.
작고 초라한 암자의 형국일망정 훼손될 리 없는 천년 고찰의 위세와 유서가 네 대각들의 존영으로부터 과시되고 있었다. 간월암에서 달을 보고 홀연 도통한 무학스님은 그 길로 원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거기에서 지공 선사에게 법(法)을 전수받은 나옹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고 5년간의 수행에 임했다. 나옹은 마침내 무학의 진면목을 인가해 법의와 발우를 전함으로써 자신의 법통을 잇도록 했다. 무학은 스승에게서 계월헌(溪月軒)이라는 법호와 자신을 ‘둥근 밝은 달(團團明月)’에 비유한 전법게도 받았다.
법당에 걸린 간월암 편액은 만공스님의 작품이다. 무학의 현묘한 통찰력과 직관을 번번이 빌려다 쓴 이태조의 배려 덕분에 간월암은 조선 초 한때 쌩쌩한 번성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불교 말살의 이념에 치어 퇴락의 길을 모면치 못했다. 이것을 다시 복구한 스님이 바로 만공이었다. 그러니까 무학대사로부터 성립한 간월암은 중도에 폐허되었다가 만공에 이르러 재도약을 꾀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전설적인 선걸(禪傑) 경허선사에게는 세 명의 수법제자가 있었다. 흔히 삼월(三月)로 통하는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월로 불리운 만공이 바로 그들이었다. 만공은 가장 막내에 속했다. 그러나 수월·혜월과 달리 만공은 뒷세상에 참으로 많은 것을 남겼다. 뜨거운 법문을, 파격의 행장을, 아울러 겸허와 얽힌 기발한 선화들을.
만공의 달인 풍모
만고의 그릇 크기와 혜안을 감지케 하는 대표적인 일화 중에 이런 게 있다. 만공이 주석했던 수덕사 사하촌 나무꾼들은 다음 같은 타령을 즐겨 불렀다. "저 산의 딱다구리는/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우리집 멍텅구리는/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남녀의 이불 속 행사를 재미나게 노래한 이 패설(悖設)풍의 타령을 철부지 사미승 하나 나무꾼들에게서 배워와 오나가나 흥얼거리는 게 아니가. 만공은 손뼉을 치며 찬탄했다.
“거 참 좋은 노래다. 절대 잊지 말도록 하여라.” 그런 어느 봄날 왕실의 상궁들과 나인들이 몰려와 만공의 법문을 청했다. 만공은 흔쾌히 응락하고서 사미승을 법당에 불러들여 그 ‘딱다구리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부르도록 분부했다. 질겁한 청중들이 얼굴을 감싸쥐는 판에 만공은 태연히 법상에 올라 이런 온지의 법문을 토했다.
“뚫려 있는 구멍, 뚫려 있는 이치를 찾는 게 바로 불법(佛法)이 아닌가. 탐(貪)·진(瞋)·치(痴) 삼독(三毒)의 노예가 되어 있는 어리석은 중생들이야말로 뚫린 구멍도 못 뚫는 멍텅구리이다. 대도(大道)란 원래 막힘과 걸림이 없이 훤칠히 뚫린 것이니…. 이 노래는 기막힌 법곡(法曲)이다.”
스승 경허를 닮은 만공은 실로 걸림도 막힘도 없는 큰 자유인의 행장으로 일관했다. 일곱 여자의 다리를 베개 삼기도 해 이른바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라는 문구까지 생겨났다. 황소 같은 몸집으로 괴력을 내뿜어 저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을 팔씨름으로 꺾었으며, 조선 불교를 말살하려는 일제 총독을 거침없는 사자후로 질타해 간담을 서늘토록 한 일화도 유명하다.
만공의 입적 풍경도 달인의 풍모에 걸맞은 것이었다. 1948년 10월 12일, 만공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들여다보다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와 나의 이승 인연이 다 되었네 그래. 그럼 잘 있게나.” 그리고는 문득 열반해 버린 것. 만공의 다비를 모시던 날, 오색 광명이 뻗치는 공중으로 신기한 백학 한 마리가 비상했다는 게 불가의 통신이고. 밀물이 시작됐는지 바위섬 벼랑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철버덕거렸다.
푸른 하늘 한 구석에 낮달이 떠 있었다. 서녘으로 넘어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붉은 해와 이제 곧 임무를 교대한 뒤 달은 교교히 밤바다를 비출 것이다. 달빛 세례에 휩싸여 바다는 숨막힐 듯한 은빛 광채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무학을 오도 견성(見性)으로 인도했던 달의 비의는 무엇이었을까. 진면(眞面)의 달, 실상(實相)의 달은 밤이면 밤마다 떠오르지만 우리의 눈은 허상의 월면(月面)만을 더듬고 있는 꼴이 아닐는지. 눈은 떴으나 사실은 맹인인, 어두운 미로에 처한 이 한없이 쓸쓸한 육신의 삶….
<글·박원식 사진·심병우 기자> |
< 글 2 >
길을 묻다
썰물땐 육지로… 밀물땐 섬으로… 서정적 수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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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의 일몰. 한 여름을 달궜던 뜨거운 태양이 기울면서 뿜어내는 붉은 노을이 암자전체를 휘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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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암 경내서 기도하는 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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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글1 - 사람과산
글2 - 회상님블로그
사진 - 일부 소구리홈갤러리발췌및
남제님블로그발췌
1. Buddam-Shara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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