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보림사 - 전남 장흥

창현마을 2006. 1. 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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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맥을 잇는 해동선종 종찰 보림사 1

▲ 보물 제 1254호인 사천문과 사천왕상.


명산에는 절이 있다는데

강진에서 청자의 비색을 가슴에 안고 장흥으로 떠나는 23호 국도는 여름이 익어가고 있었다. 장흥. 처음 보는 길인데도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있다면, 길옆에 펼쳐지는 산과 들이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가야 할 땅인데도, 산천의 고마움을 우리는 늘 잊고 산다.

장흥댐을 지나 발길 머문 곳은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남쪽 아래에 있는 보림사. 가지산은 신라 말 원표대사가 인도에 있을 때 신비한 기운이 삼한의 밖 아득히 먼 곳에서 비쳐와 기운만을 보고 자리를 잡았다는 산이 아니던가? 명산에는 절이 있다는데, 그 절 또한 얼마나 명사일까?

보림사 입구에서 안내원으로부터 팸플릿 하나를 얻어 가람의 위치를 파악한 나는 '악' 하며 소리를 질렀다. 국보2점. 보물 8점. 지방문화재 13점. 머무를 시간은 인색한데, 절 안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국보를 담아 가자면 발걸음을 재촉하는 수밖에.

▲ 사천문 앞에서 본 보림사 풍경.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

보림사 일주문은 가지산 만큼이나 화려하고 장중했다. 아무리 '산이 높다한들 하늘아래 뫼이로다'라지만 부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보림사 일주문도 분명 하늘아래에 있는 문이었다. 일주문에서 사천문까지 발걸음을 옮기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절에 가면 가장 나를 무섭게 만드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형상은 꿈에서라도 나타날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곳이 바로 사천왕상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사천문 앞에만 서면 기가 죽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일까?

사천문에서 바라본 보림사 경내는 아주 작은 앞마당처럼 보였다.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동양 3보림으로 통한다. 특히 보림사는 우리 나라에서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온 해동선종 종찰로 알려져 있다.

벌써 사천문 앞에서 주눅이 든 나는 합장을 하고 보물 제1254호인 사천왕상 앞에 이르렀다. 사천왕상의 빛나는 둥그런 눈과 마주 쳤다. 그 눈은 빛나고 있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마귀를 발로 짓밟는 형상이 아닌 마귀가 동반지국천왕상을 발로 들어 받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확인도 하지 못한 채 사천문을 빠져 나왔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전국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상으로, 1955년 사천왕상의 팔과 다리부분에서 금강반야바라밀다경 등 중요한 불서 200여 책이 확인되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내 마음인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이 내 마음인가?

대웅전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절의 풍경은 단아하기 그지없다. 2층으로 된 대웅전 지붕 모서리에는 하늘금붕어가 바람에 대롱대롱 흔들거린다. 마치 세파에 시달린 중생들의 모습처럼. 마음 같아선 느긋하게 108배라도 올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은데, 발길을 재촉하는 일행이 안절부절 한다.

▲ 국보 제 44호인 3층석탑 및 석등.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두기의 3층 석탑과 석등이, 마음의 불을 밝히고 있는 듯 중생들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이 탑을 두고 '우아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국보 제44호로 지정된 3층 석탑 사이에는 석등 1좌가 있다. 복원도중에 초층 탑신에서 사리와 함께 탑지를 발견하였다는 3층 석탑은 2중 기단의 구성은 통식(일반에 널리 통하는 방식)을 따랐으나 갑석이 얇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대적광전 안에서는 들리는 스님의 염불소리가 경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사재로 쇠 2500근을 사서 만들었다는 국보 제 117호인 비로자나불 불상을 카메라에 담아 오지는 못했다.

▲ 꽃 무늬 문양이 화려한 아미타석불입상.

사자산 중턱의 의상암지에서 옮겨온 아미타석불입상 앞에는 두개의 촛불이 깜빡거린다. 아미타석불 입상의 어깨 위는 파손이 심했으나 날개를 걸친 듯한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느껴진다. 몸에 새겨진 꽃 무늬 문양의 장식이 조금은 격이 높아 보이게 한다.

▲ 대웅전과 경계를 이룬 '마음의 경계선'.

단아한 보림사의 풍경 아래 펼쳐진 것은 2층 대웅전과 어우러진 여름의 풍경들이다. 하나하나 정성으로 이어진 돌담이 마치 경계선을 긋고 있다. 늘 내가 세상에 쌓아왔던 경계선처럼. 내 맘의 경계를 더 이상 풀지 못하는 졸장부 같은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경계선의 끝에는 길이 나 있었다.

▲ 보물 제 157호 보조선사 창성탑비.


보조선사의 흔적을 찾아서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팸플릿을 들고 보조선사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대웅보전의 오른편에 자리한 보조선사 창성탑비에 서니 우선 거북이 받침과 용머리가 눈에 띈다. 이마에 흐르는 비지땀을 손으로 닦으며 탑신에 적힌 내용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간다. 그러나 어디 그 내용을 다 파악할 리가 만무하다.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장승을 세웠다는 기록과 차를 약으로 사용했다는 내용. 그리고 선종의 전법 사실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또한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보물 제 157호로, 거북받침돌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조금은 사나운 모습이며,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진 장식이 인상적이다.

▲ 보물 제 158호 보조선사 창성탑.

이곳에서 몇 걸음 더 올라가면 보림사 경내의 시원한 가람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마치 전망대 같은 분위기다. 가지산의 언저리가 하늘 아래 우뚝 솟아 있고 얼굴과 표정이 다른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부처님의 품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이곳을 지키는 것은 보물 제 158호인 보조선사 창성탑이다. 보조선사 창성탑은 보림사를 중창시킨 보조체징선사의 사리를 안치한 탑으로, 팔각원당형으로 팔각지대석 위에 3단의 하대석을 두었다. 상단의 구름모양의 입체적인 모습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 갈 듯 비상을 하는 것같은 느낌이다.

보물 제 155호인 동부도와 보물 제 156호인 서부도를 찾아 나섰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모자라 보림사 동쪽 숲 속은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선종 대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라는데 말이다.

▲ 넘치지도 않은것이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것이

이런저런 아쉬움을 보림사 마당 한가운데서 달래야 했다. 흘러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 보림사의 약수는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약수로써 우리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 '좋다'는 말을 가슴에 담고 마시는 약수는 정말이지 정화수를 마시는 기분이다. 늘 욕심이 흘러 넘쳐 풍요를 갈망했던 내 마음의 고질병을 약수터에서 다스린다.

오래 머무르고 싶었던 산아래 절.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불교문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보림사에서 경내를 돌다보니 더위를 뿜어대던 여름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다.

 

 

 

전남 장흥 보림사 2


   
♣ 보림사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보림사 (전화)061-864-2055/0019]

전남 장흥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지금부터 1천 3백여년(759년) 전에 창건한 신라시대의 거찰이다. 이곳에 처음 절을 지은 것은 보조국사보다 100년 전쯤 사람인 원표대덕(元表大德) 으로 원래의 이름은 가지산사였다. 그 뒤 보조국사 체징이 이곳에서 헌안왕의 뜻을 받아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열었다. 880년 체징이 입적할 때에 무려 800여명의 제자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조국사가 입적 후에 헌강왕이 절이름을 내려주어 보림사가 되었다. 화엄종 사찰로 출발해 선종사찰로 바뀐 것이다.

미국하버드대학 연경도서관에 있는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사적기"는 조선초 세조 3년(1457)에서 10년(1464)사이에 발간된 것으로 보림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여기에는 창건설화가 이렇게 적혀있다.

보림사 창건설화
"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 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의 가지산 보림사는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와 더불어 세계 3보림의 하나라고 한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20여 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대웅전, 새로 지은 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 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

보림사에서 처음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 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년) 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
보통 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한편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안(무릎과 발등)에서 고려말과 조선초의 국보급 희귀본을 포함해 고서 250여 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언해본들이 무더기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오른편에 최근에 지어진 종루가 있고, 정면에 동서쌍탑과 석등을 앞세운 대적광전이 있다. 쌍탑과 석등, 대적광전 안에 있는 철조비로사나불이 모두 신라 때의 것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은 원형대로 복원(52평)되었으며,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대적광전으로 이어지는 남북중심축과 직각을 이룬 곳 동쪽에 대웅전이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옛주춧돌 위에 예전의 모습을 복원한 것인데, 정면5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집으로 겉보기에는 2층이나 내부는 통층이다.
그 뒤편으로 비스듬히 돌아 조금 떨어진 곳에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와 비가 있다.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비와 부분 손상된 부도는 모두 보조선사 입적 후 세워졌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절 앞마을 뒤 잡목 숲 안에 있는 동부도와 절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서부도들이 선종 대가람 보림사를 빛내주고 있는 유적들이다. 보림사 마당 한 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나주 영암 방면에서 23번 국도 따라 장흥으로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마을이 유치면 송정리. 송정리 바로 못미쳐(왼쪽에 유치중학교 지난다) 왼쪽에 보림사 가는 5번 군도로가 나있다. 이 길을 따라 2.5km가면 왼쪽에 용소산장이 나오고, 그 앞에 두 갈래길 중 왼쪽길을 따라 1.5km 가면 보림사이다.
(직행버스) 광주-장흥행(유치면 하차) 05:00-21:30 0:20 1:00
(군내버스) 유치면-보림사 6회 0:10(4km)
  보림모텔 (061)864-1991 장흥 유치면 봉덕리
민박안내 (061)862-2026 장흥 유치농협 지도계
 
안내문의: 유치면사무소 (061)862-0608
장흥교통(061)863-4427, 862-0636
유치 버스정류소 (061)862-2011
  강성서원, 유치자연휴양림, 옥련암

 

 

   보림사 3

▲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보물 1254호)
ⓒ2004 김대호
14살. 내가 철들고 나서 제일 먼저 느낀 두려움은 온통 하얀 꽃으로 치장한 ‘백상여’와 훈련되지 않은 소리꾼의 상여소리에서 느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3대가 큰 벼슬을 하고서도 마을 사람 중 한 사람만 반대해도 들 수 없는 것이 ‘백상여’라고 했다. 그만큼 ‘백상여’는 명예와 호상(好喪)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막 코밑이 거뭇해지던 나는 하얀 한지 너머로 슬그머니 비친 죽은 망자(亡子)의 관을 목격하고 3일 낮밤을 새우고서도 뇌리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울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불경한 소년인가.

▲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117호) 앞에서 기도하는 비구니스님
ⓒ2004 김대호
만월(滿月)을 삼킨 배꽃처럼 희푸른 꽃술을 세운 백상여와 내장을 휘젓고 객혈하는 하얀 소복의 곡소리, 굳게 입을 다문 하얀 만장(輓章)의 음울한 행진, ‘딸깡딸깡’ 풍경을 울리는 소리꾼의 상여소리는 '갸르릉’거리는 망자의 마지막 숨소리를 닮아 있었다.

거기다 잘 훈련된 베이스 합주단처럼 삐져나온 사람 하나 없이 발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와 머리 끝에서 등골을 타고 사람의 심사를 때리는 소리, ‘어허넘차 너화넘 어허 어허 넘차 어이가리 넘차 너화넘 북망산천 머나더니 건너 앞산이 북망이로구나’. 머릿속은 온통 히푸른색이었다.

저수지를 막아 마을이 수몰되기 전까지 백여 가구는 족히 살던 터라 1년에도 서너 번은 ‘꽃상여’를 볼 수 있었다. 초상이 나면 마을 청년들은 상가에 모여 모닥불을 지피고 상여소리 화음을 맞추다가 술기운에 겨워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구성진 노랫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어느새 노래는 춤이 되고 죽음은 ‘대동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축제 중에 축제’인 ‘백상여’는 유년 시절 ‘희푸른 색’ 공포로 인해 아직까지 나이를 먹지 않는 꿈 속에서만은 두려움이다.

▲ 백일홍 꽃에 가린 삼층석탑 과 석등(국보 44호)
ⓒ2004 김대호
13살이 되기 전 가장 무서웠던 것은 절집 입구를 버티고 서있는 사천왕상이었다. 차라리 흑백이었으면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터인데, 멀리에서는 총천연색 단청으로 아름답게 첫 모습을 보이다가 다가가면 갑자기 쏟아질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는 사천왕상. 거기다 사천왕의 육중한 발에 배가 밟힌 사람의 모습을 보고 놀라 하루종일 지은 죄를 꼽다가 내 어린 꿈속은 몽정과 악몽을 하루씩 번갈아 했다.

내가 장흥 칠보산(七寶山) 보림사(寶林寺)를 찾는 이유는 이곳 유치면이 내가 살던 고향처럼 수몰지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림사가 다른 사찰에 비해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탐진댐을 가까스로 비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사천왕상(보물 1254호)을 비롯한 5개의 국보급 유물들이 수난을 받을 뻔 했다.

이곳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나라에서 제일 부드러운 사천왕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천왕상은 핏발선 눈과 날카로운 치아, 위협적인 칼, 활, 금강저(金剛杵, 악마와 번뇌를 부수는 무기)로 대표되는 병장기, 거기다 어떤 사찰에서는 사천왕이 동물을 깔고 앉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나 악귀가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즉, ‘분노와 포효(咆哮)’의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이 사천왕상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 기도하는 사람들. 저들은 어떤 두려움 때문일까.
ⓒ2004 김대호
그러나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은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귀밑에서 흘러내리는 한 올의 머리카락, 머리엔 온갖 꽃으로 치장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다. 치아는 고르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고통 받는 악귀는 찾아 볼 수 없다. 눈은 맑고 찢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눈을 반쯤은 내리깔고 비파를 연주하는 동방지국천왕에 이르러서는 즐겁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자비로운 모습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죽음, 귀신, 전쟁, 강도, 살인자, 욕심, 고독, 흐르는 세월 등등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동양인들은 ‘죽음’을, 서양인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가장 두려워한다고 한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 이후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알 수 없다는 것은 공포를 낳고 그 공포는 뭔가 의탁할 것들을 찾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신(神)은 참 행복하다.

▲ 보조선사 창성탑(보물 157호)
ⓒ2004 김대호
그러나 요사이는 예전과 다른 것 같다. 가끔 목포에 나가 친구들은 만나다 보면 은행이나 카드회사 때문에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죽음’이나 ‘귀신’ 같은 것들이 어느새 순위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귀신이 사람들에게 밀려 나면서 세상살이는 더욱 힘들어졌나 보다.

어떤 이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동식물은 예측할 수 있고 길들일 수 있지만 사람은 그 속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전쟁이나 범죄, 환경 파괴 같은 공포의 원인은 모두 사람이 제공하기 때문이고 보면 사람도 결코 만만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또 어떤 이는 공포는 모두 자기 자신의 문제일 뿐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없다면 공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므로 마음가짐을 바꾸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내게 그런 평상심이 항상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 보조선사 창성탑비(보물 158호)
ⓒ2004 김대호
내 초가를 자주 찾는 한 어르신은 ‘어려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까봐 두렵더니, 철들고 나서 먹고 사는 것이 힘들고, 먹고 살만 하니 흐르는 세월이 안타깝고,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이 가장 무서워지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세상은 무서운 것 천지인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세상에 내가 살다간 인기척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무신론자인 내게 죽음은 ‘유에서 무’로 사라지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이들에게 회한(悔恨)으로조차 기억되지 못할 인생이라면 참으로 헛사는 것이라고 중얼거리곤 한다.

때로는 너무나 가지고 싶은 작은 것들은 손에 쥐지 못하고, 가지고 싶지 않은 큰 것들을 손에 넣을 때가 있다. 그러고 보면 ‘소유’처럼 헛된 것이 없다. ‘무소유’처럼 비인간 적인 것이 없다. ‘빈손지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노스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나는 아직 마음이 여물지 못한 애송이임이 틀림없다.

▲ 보림사 입구 전경
ⓒ2004 김대호
사천왕은 초기불교 경전인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에 나타난 인도의 신으로 수미산(須彌山)에 살면서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 왕들인데, 대승불교에서 불법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사천왕은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서역을 거쳐 중국과 한국에서는 갑옷을 입은 무장으로 바뀌었다.
보통 동방 지국천왕상은 칼을, 서방 광목천왕상은 칼과 창을, 남방 중장천왕상은 비파를, 북방 다문천왕상은 당(幢)을 가지고 있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됐으며 임진왜란 이전(중종 10년)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나무를 잇대어 상을 만들고 표면에 천을 붙이고 회를 칠한 뒤 채색을 했는데 조각이 아름답고 채색이 화려하고 작품성도 뛰어나다.

 

 

    보림사 3

 

  

한국 禪宗 1200년 종가의 기품 그대로

국토박물관 순례/17. 장흥 보림사(寶林寺)]


크기도 당당하고 장식문양이 정교해 부도의 장자(長子)다운 기품과 근엄함이 살아있는 보조선사 창성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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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뜻밖의 베스트셀러로 되고 나서 나는 많은 지역인들로부터 향토애 넘치는 부탁의 편지를 받아왔
다. 요지인즉 자기네 고장도 답사기에 써 달라는 것이다. 그런 중 한 번은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에 살고 있는 한 장흥사람이 다음과 같은 항의성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은 ‘남도답사 일번지’로 강진을 꼽았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장흥이 일번지를 강진에 내준 것이며, 강진과 장흥은 차로 반시간도 안 걸리는데 왜 발길을 해남 땅끝으로 돌려 답사객들이 외면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장흥사람은 자기 고장의 자부심을 이렇게 말하며 끝맺었다.

“문화유산으로 치자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제1가람인 보림사가 있고, 현대문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송기숙·이청준·한승원이 모두 장흥사람입니다.”

장흥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째 개창 사찰이다. 대적광전 앞 국보 44호 쌍탑과 석등은 9세기 전형적인 양식으로 우리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기준이 되고 있다.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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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보림사에 무수히 다녀왔다. 20여년 전, 거의 폐사나 다름없을 때부터 비포장 흙길의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보림사에 다녀왔고, 문화유산답사회를 이끌면서 '남도의 산사를 찾아서' '9산선문의 호남4문 순례' '환상의 부도여행' 등 여러 주제로 답사를 다닐 때도 보림사는 빠진 적이 없었다.

한국미술사 내지 한국문화사에서 장흥 보림사가 갖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다. 9세기 하대신라의 문화를 말하면서 장흥 보림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면 그 책은 무조건 엉터리 책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알다시피 9세기 하대신라는 문화의 중심이 경주(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는 호족발흥의 시기였으며 사상적으로는 교종에서 선종으로 넘어가는 때였다. 그 문화변동의 상징적 유물은 호족의 이미지를 닮은 철불의 등장이고, 대선사의 사리탑인 부도의 유행이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삼층석탑과 석등의 장식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장흥 보림사는 9산선문 중 첫 번째 개창 사찰이고, 철조비로자나불, 보조선사의 부도 및 비석, 그리고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 모두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유물들은 하나같이 절대연대를 갖고 있는 명작이어서 9세기 불교미술의 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보림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의 비문에 자세하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래 원표(元表)대사가 창건한 절로 체징이 당나라 유학 후 설악산 억성사의 염거화상 문하로 들어가 정진한 다음 왕의 부름을 사양하고 이곳 가지산 보림사에 와 선종을 일으키니 여기는 오늘날에도 그 맥이 전해지는 가지산문의 본가이며, 도의선사, 염거화상, 보조체징으로 이어지는 한국 선종의 종가로 된 것이다. 그래서 9산선문 중에서도 제1가람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이다.

체징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보조라 내리고 그 사리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지어주며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했다. 그것이 지금 보물 157호와 158호로 지정된 보조선사의 부도와 비석이다. 그런데 이 비문의 글씨는 무슨 사연에서인지 첫 행부터 7행 중간 선(禪)자까지는 김원(金)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에는 김언경(金彦卿)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 이런 비문은 세상에 다시없는 것이다.

보조선사 창성탑이라고 불리는 체징스님의 부도는 9세기 팔각당부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크기도 당당하고 장식문양이 정교하여 부도의 장자(長子)다운 기품과 근엄함이 살아있다. 대적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은 일찍이 국보44호로 지정된 9세기 전형적인 양식으로 지붕돌의 곡선이 과장되고 연꽃무늬의 새김이 대단히 장식적이다. 특히 이 쌍탑과 석등은 상륜부가 완전하여 우리 나라 삼층석탑 복원의 한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 중 보림사의 최고 명품은 뭐니뭐니해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117호)이다. 앉은키가 2.74m나 되니 그 장대함을 능히 알만한데 무쇠를 녹여 이처럼 거대한 불상을 주조했다는 사실 자체로 당시 지방문화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 불상에는 왼쪽 팔꿈치 위쪽에 8행 60자에 이르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어 858년에 김수종(金遂宗)이 왕명을 받들어 1년에 걸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조선사비문에는 860년에 김언경이 주성했다고 되어 있어 이 해석을 두고 두 가지 설로 나뉘는데 하나는 김수종과 김언경이 같은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고, 하나는 김언경이 공을 가로챈 소이라고 보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장흥 보림사는 9세기 하대신라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을 갖고 있으니 장흥사람들이 나를 원망할 만한 일이다. 특히나 장흥사람들이 고향에 대해 갖는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다. 우선 장흥이라는 지명 자체가 고려 인종의 왕비가 장흥출신의 임씨인데 왕비의 소생 중 세 아들이 의종.명종.신종으로 이어지니 왕비의 고향이 길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내려진 곳이다.

장흥사람들이 장흥을 문림(文林)이라 일컫는 것도 괜한 말이 아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은 거의 호남문단 차지였는데 백광홍(白光弘)의 '관서별곡(關西別曲)'을 비롯하여 장흥출신이 무려 25%나 차지하고 있다. 또 조선후기의 실학, 특히 지리학의 대가였던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98)도 장흥 출신으로 지금 장흥읍내에는 그의 동상을 우뚝 세워 여기가 문향임을 안팎으로 과시하고 있다.

또 장흥은 그 자연 풍광 자체가 넉넉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장흥을 답사하는데 탐진강 줄기가 이루어낸 부산평야가 풍요롭고 사방으로 둘러있는 억불산 천관산 사자산 제암산 산세들이 하나같이 준수하고 기이하여 오래도록 차창 밖에서 눈길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곁에 있던 장흥 출신 화가 김선두는 제암산의 철쭉과 천관산의 억새는 천하의 장관이라며 제 흥을 이기지 못해했다.

고백하건대 내가 장흥 답사기를 이제껏 쓰지 못한 것은 장흥의 동쪽 득량만을 가보지 못해서였다. 바지락 피조개 석화 꼬막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살아가는 장흥사람에게 이 갯벌은 풍요의 뻘밭일 것 같은데 한승원의 소설 '그 바다 끓며 넘치며'는 오히려 치열한 생존의 바다이자 들끓는 관능의 바다로 묘사되어 있다.

"득량만의 쪽빛 물굽이에 홑이불 자락처럼 자욱하게 덮이어 있던 안개덩어리가 동남풍에 밀려 응달의 해송 숲으로 거대한 원시 양서류처럼 기어오를 제면, 이 골짜기는 살아있는 암컷처럼 암내를 풍기곤 한다."

그 질퍽한 득량만의 바다내음이 내 발목을 붙잡아 놓은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그 응달개포라는 곳을 본 다음에 장흥답사기를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보림사 찾아가기 

유홍준 교수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중앙일보/2004.04.23





 

 

 

 출처 :  글 1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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