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궁궐 알아보기 2 - 창덕궁 3 ; 인정전과 인정문
인정전(仁政殿)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이다.
■ 인정전의 역사
동궐도의 인정전 인정전
인정전은 태종 5년의 창덕궁 창건때에 건립된 것을 태종 18년(1418)에 박자청에게 고쳐 짓도록 하여, 7월 착수되고 같은 해인 세종 즉위년 9월에 준공된다. 그뒤 36년이 지난 단종 떄에 해체보수공사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광해군 떄에 중건된다. 1623년의 인조반정때에는 인정전만은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 정조 6년(1782) 9월에는 이전에 없던 품계석을 인정전 앞뜰에 설치하였고 이 품계석은 다른 궁에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뒤에 순조3년(1803)에는 다시 소실되고 이듬해에 중건된다. 50여년 뒤인 철종 7년(1856)에는 건물이 퇴락하였다는 이유로 또 한차례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시행하였으나 건물의 형태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건물의 골격은 순조때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창덕궁에 서양식 가구와 실내장식이 도입되는 시기인 1908년 무렵에 인정전의 내부에 커다란 변하가 생긴다. 회흑색의 전돌로 깔린 실내바닥을 서양식 쪽널마루로 만들고 전등이 설치되었다. 출입구를 제외한 창문 아랫부분의 외벽에 전벽돌로 쌓았던 화방벽이 철거되고 대신에 목재의 큼직한 머름대와 궁판으로 바뀌었다. 또 창문 내측에 별도의 오르내리창이 설치되며 휘장을 설치하기 위한 거튼 박스도 만들어지고 지붕의 용마루에는 이왕가를 상징하는 배꽃문장으로 장식하여 왕궁이 아닌 가문의 건물로 격하시켰다.
■ 인정전의 구조
정면 5칸 측면 4칸해서 20칸 건물로 창덕궁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기둥과 비붕을 잇는 형식은 지붕을 한껀 들어올리며 크게 만드는 다포식에 단청을 화려하게 칠했다.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놓고 추녀마루 끝에는 잡상을 아홉 개씩 놓았다. 내부 역시 이에 걸맞는 차림을 하고 있다. 겉에서 보기에 지붕이 2층이지만 속은 한층으로 터져 있어 넓고도 높은 공간이다. 그릭고 단위에는 용상이 용상뒤에는 "일월오봉병"이란 병풍이있다 (해와달은 음양을 뜻하며 다섯 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 서 남 북 중앙의 다서산 "오악"을 가리킨다 그위에는 화려한 장식을 한 닫집-보개가 설치되어있고 그 천장위에는 목각으로 만든 두 마리의 봉황새가 날고 있다. 모두 왕을 상징하는 것이요 왕의 위용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인정전 내부 인정정 천장의 봉황 조각
그리고 정전의 정면이 5칸인 것은 조선 궁궐에서 공통적인 특징으로 이것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황제가 아닌 임금은 5간이어야 한다는 제한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기단이 이중의 월대로 구성된 것도 다른 궁과 공통된 점이며 중국의 삼중 월대랑 비교되는 것이다. 월대에는 전면과 좌우 측면에 계단이 있으며 전면부의 어계의 앞면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였고 그 중앙부의 답도에는 봉황을 새겨 놓았다. 봉황은 인정전 내부의 중앙 천장에도 보좌위의 닫집에도 새겨져 있으며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뒤에 경운궁(덕수궁)의 중화전에 새겨진 용과 비교된다. 인정전은 외삼출목에 내사출목의 다포양식으로 공포 바깥쪽의 쇠서는 끝이 위어오른 양서가 셋있고 그위로 끝이 휘어내린 수서와 둥글둥글한 모습의 운공이 놓인다. 보머리는 앙서위에 놓이게 되며 끝머리가 세 번 꺽인 모습의 삼분두형식이다. 기둥의 머리쪽에는 앙서 밑에서 창방 하부에까지 연속된 안초공(기둥머리에 얹어서 주심포를 받드는 부재)이 설치되고 첨차이 밑면이 둥글 게 처리된 교두형의 모습과 조각된 부재의 형식에서는 조선 말기의 수법이 잘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외관상으로 하층의 창호는 사면에 고창을 두고 정후의 중앙칸에만 문이 네짝 사분합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삼분합문이며 2층에는 교살창만이 사면에 설치되었다. 현재 하층문의 여닫는 방법은 모두 밖으로 여는 형식으로 되어이으나 일제 시대에 개수되기 전에 촬영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의하면 정면 양단부의 협칸은 문 상단부에 삼배목(정첩과 같은 기능을 갖는 꼭지가 셋으로 나뉜 재래식 철물)을 설치하여 아래를 밀어 밖으로 열 게 하거나 뗄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머지 문들은 모두 안쪽으로 열 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창경궁의 명정전에서도 안쪽에 문둔테가 남아 있으나 밖으로 열도록 변형되었고 경희궁 숭정전에서도 안으로 여는 모습이 사진에 나타나 있다. 이처럼 문을 안쪽으로 열 게 되는 이유는 각종의 궁궐위궤도에서 볼 수 있듯이 행사나 잔치가 베풀어질 때에 정전 앞에 차일을 설치하고 임시의 단을 마련하여 의식을 진행하기에는 안쪽으로 여는 것이 현리할 것이고 또 그런 행사에서는 정전의 기단 위가 가장 상석으로 이용되는 사실에서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의 건물에는 차일을 차지하기위한 쇠고리가 기둥과 평방에 박혀 있으며, 상월대의 넓적한 상면에도 든든하게 박혀있는 쇠고리를 볼 수 있다. 건물 내부는 고주 사이로 운궁과 낙양 초각을 설치하고 화려한 보개 천장이 중앙천장에 신설되었다. 이 가운데 부분에는 꽃구름과 황금빛의 봉황과 여의주가 나무로 조각되어 매달려 있어 보는 위치가 달라지면 구름위로 봉황이 날아가는 듯이 느껴진다. 운궁에는 쇠코`결련의 문양을 그리고 궁판에는 "보상화문"을 투각하였다. 인정전의 현액은 검정 바탕에 흰색글씨로 양각 되었고 액자는 칠보문을 그렸다. 액자의 네귀에는 구름모양으로 조각되었고 현판의 글씨체는 "서영보"의 솜씨라 한다.
■ 오얏무늬의 정체
여기서
잠깐 오얏무늬 모양의 휘장에대해 살펴보자 아꽃은 모얏꽃이다. 대한제국부터 오얏꽃은 황실의 문장처럼 썼다. 대한 제국의 두 번째로 격이
높은 훈장 이름도 "이화대훈장"이었고 문서나 복식에도 이화문양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우리 건물 어디에도 이런 식으로 용마루에 장식을
한예는 없다. 따라서 인정전 의 구리로된 오얏무늬라든지 지붕 용마루의 오얏무늬라든지 이런 것은 아마 일본인들이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위해 순종을 "이왕" 고종을 "이태왕"이라 불렀고 망한 나라의 왕실을 이왕가 이왕실이라 불렀고 또한 조선을 이씨의 나라
그러닌깐 (일본은 옛부터 여러개 성씨가 군주인 나라로 나눠져 있었다(천황 밑에는 그런 왕들이 많다) 그들은 우리나라 조선 역시 일개
"이씨의 나라"로 생각하고 이씨조선 "이조<李朝>"라고 말을 하였다. 천황이 다스리는 여러왕들중 하나정도로... 그러닌깐 이조란 말은
가히 좋은 말은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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