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산천재(山川齋)

창현마을 2006. 7. 27. 16:48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산천재(山川齋)

 

-햇볕 잘 드는 산천재 툇마루에 앉으면 겨울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오고 들판가로 갈대가 바람에 일렁입니다-

2006-01-06 12:26:48

 

 

 

지리산 밑이 내가 태어난 세거지(世居地)이고 그 땅에서 보면 언제나 천왕봉을 조망할 수가 있으니 지리산은 나의 모태(母胎)이다.

봄이 오고 땅이 녹아 경호강의 물길이 빨라지는 즈음이나, 여름 달맞이꽃 뒤에 숨어 풀벌레 울음소리 들을 때, 서리 내린 늦가을 해질녘에 논두렁을 태우며 빨갛게 지는 해를 보는 것, 요즘 같은 한 겨울 얼어붙은 강이 한낮 햇볕을 받고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거나 무료함에 잠시 낮잠을 자고 나면 마당가에 소복이 눈이 쌓이는 풍경들, 이런 것들이 내 정서와 마음을 키워주었고 지금도 배설되지 않고 살아있는 자양분이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지금 자주 갈 수는 없어도 고향이나 근처를 가는 발걸음 속에는 가슴께에 묻어두었던 이런 기억들과 산, 들, 강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계절마다의 고향 내음으로 언제나 푸근하다.

지리산 근처를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산과 강이다.
천왕봉을 가장 단거리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가는 길이고 시천면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대원사 계곡과 유평리를 거쳐 정상으로 가는 다른 길이 있다.

◇ 겨울 산천재의 풍경, 햇살이 따사롭다 ⓒ 데일리안 배강열


산천재(山川齋)와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이 두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인 양천(兩川)혹은 두물머리중 중산리 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강을 일러 덕천강(德川江)즉 덕산(시천의 다른 이름)을 흐르는 강이라 부른다. 이 강은 여러 계곡의 물을 받아 산청군 전체를 감싸 흐르는 경호강(鏡湖江)이 되고 나아가 남강(南江)으로 합수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덕천강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한여름 ,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노란 꽃잎을 벙글어 여는 저녁 무렵 다슬기가 강바닥 돌이나 바위에 다닥다닥 붙어 숨을 쉬는 때 이거나 계절에 관계없이 물소리가 큰 소리로 사방에 흩어지는 서편으로 보이는 지리산 천왕봉을 보면서 세파에 시든 소소한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이른 아침이다. 그 옛날,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 - 1572) 선생도 덕천강가 두물머리 산천재(山天齋)에 서서 혹은 엄동설한 눈을 이고 앉은 천왕봉을 보고 덕천강가를 걸으며 선비로서의 올곧은 길을 가는 다짐을 했으리라 짐작한다.

◇ 남명선생의 오언절구 ⓒ 데일리안 배강열
題德山溪亭 (제덕산계정)柱

請看千石鐘 (청간천석종)
非大O 無聲 (비대구무성)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남명 조식, ´제덕산계정´(題德山溪亭)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 산천재(山天齋, 사적 제305호)는 명종16년(1561)에 남명이 손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불에 타버린 뒤 한동안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순조 18년(1818)에 고쳐 지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남명 조식 선생이 61세부터 7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본채와 더불어 정면 2칸의 아래채, 남명 선생의 고서와 목판각이 보관되어 있는 초라한 서재(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4호)가 하나 딸려 있을 뿐이다. 선생의 고향인 삼가면 토동(兎洞)에는 그곳에서 생활하던 비교적 젊은 시절에 세운 산해정(山海亭)과 뇌룡정(雷龍亭)이 지어져 있다.

남명(南冥)조식(曺植) 선생은 창녕 조씨로 승무원의 판교인 조언형의 아들로 합천군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나 영남 사림을 대표하여 이황(1501 - 1570)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던 실천적 사상을 가진 선비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경상좌도의 퇴계, 경상우도의 남명´이라고 칭송하였지만 퇴계선생은 벼슬길에 나아가 예조판서, 대제학 등 평생 82개의 숱한 관직을 누리며 당대 최고의 학문을 세상에 펼쳤다.

이에 비해 남명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가 죽고 숙부(叔父)인 언경가(彦慶家)가 멸문(滅門)의 화(禍)를 입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時局)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게 되었고 후학양성과 자신수양을 하면서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잘못된 국사를 비판하였다. 권력에 줄서지 않고 백성과 역사의 편에 서서 평생을 지내온 것이다.

강이 보이는 평지에 자리한 산천재는 뒤 쪽 중산리로 향하는 20번 국도에서 보아도 그저 대가집 재실(齋室)의 규모를 넘지 않는 모습으로 남명 선생의 기품 단아한 선비의 풍모 그대로의 모습이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순응하여 자연의 품속으로 안겨드는 산천재, 이런 류의 서실(書室)은 안동에 있는 이황 선생의 도산서당(陶山書堂)이나 경주 안강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 1491-1553)의 독락당(獨樂堂)과 비교된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많고 많은 서원중 제일로 꼽는 서원 셋을 들어 삼산(三山)이라고 하는데 모두 사액서원들로서 바로 남명선생을 배향한 덕산서원(덕천서원), 퇴계선생을 배향한 도산서원 그리고 회재선생을 배향한 옥산서원이 그것이다.

세상에 나아가 학문과 뜻을 펼쳤던 이황 선생의 도산서당(陶山書堂)은 규모면에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위압적이며, 역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회재 선생의 독락당(獨樂堂)은 그 품새가 화려하다. 또한 독락당은 옆을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보(堡)를 막아 두어서 회재가 물을 막으면 농수(農水)가 마르는 형국을 하고 있다.

◇ 전서체와 해서체의 산천재 현판 ⓒ 데일리안 배강열


내가 성장하는 세월을 두고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찾은 곳이라 산천재의 기억은 붐,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빼곡히 들어 있음에도 지난해 말 겨울 초입, 마른 풀을 밟고 들어선 산천재는 따뜻한 햇살을 툇마루에 걸어둔 채 나를 반겼다.

이른 봄이거나 초겨울에 어느집 대청이나 툇마루에 걸린 햇살은 안정감을 준다. 그런저런 느긋한 생각들을 하고 앉아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모르게 되고 언뜻 보면 시간을 죽이는듯 하여도 때로는 가장 마음이 행복한 시간이다.

옅으나 맑은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즐거이 툇마루에 앉아 남쪽을 보면 가까이 덕천강의 일부를 메운 새 길이 보이고 강을 접한 인근으로는 갈대가 바람에 떨리며 무성하다. 그 너머 들판은 휑하니 빈 채로 겨울을 나고 있는데 가벼운 졸음 오기를 기다리는 여유를 즐기다가도 고개 돌려 천왕봉 머리를 보고는 마치 남명선생 앞에 앉아 글을 배우던 서생의 모습이 되어 나도 모르게 저으기 긴장을 한다.

햇볕을 받고 탱탱하게 건조된 산천재 기둥의 주련(柱聯)에 쓰인 글귀는 봄이다. 그 냥 봄이 아니라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선비의 봄, 청량한 향기를 뿜어내는 고결한 품성을 느낄 수 있는 학자의 봄을 느낄 수가 있다.

德山卜居 (덕산복거)

春山底處无芳草 (춘산저처무방초)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근제거)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銀河十里喫有餘 (은하십리끽유여)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을건가?
십리 은하 같은 물, 먹고도 남으리.

-남명 조식, ´덕산복거´(德山卜居, 덕산에 터를 잡고서)

◇ 귀를 씻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벽화 ⓒ 데일리안 배강열


마냥 주저앉아 있다 툇마루에 올라 고개를 들어보면 회칠한 벽의 산천재란 현판 위에는 세 면에 가득 소박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좌측으로 밭을 가는 농부의 그림, 중앙의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신선들 그리고 우측의 개울에서 귀를 씻고 있는 선비의 그림이 그것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벽화를 그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런 그림들이 시사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선비들의 일상과 더불어 최소한 삶의 방식을 어떻게 유지해야 겠다는 일면을 보여 준다는 생각이든다.

세상을 관조하는 듯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 편안한 신선의 모습은 일관되고 높은 경지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선비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경자(耕者)로 돌아가 잠벵이를 걷고 소쟁기를 끄는 모습은 관념에 머무르지 않는 학문, 실천적인 생활태도, 평민들의 삶에 다가서는 선비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20대의 젊은 시절 남명이 겼었던 가난과 가난한 선비의 눈으로 본 백성들의 생활고를 몸소 체험한 경험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구나 개울에 귀를 씻는 선비의 모습은 어떤 경구(警句)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지조를 지키고 일관된 삶을 지향하는 선비는 그릇됨과 교만함을 경계하고 늘 자신을 되돌아보는 삶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 쟁기질 하는 선비를 그린 벽화 ⓒ 데일리안 배강열


산천재 뒤 안에서 길 건너의 남명기념관과 묘터 쪽을 본다. 경(敬)과 의(義)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 지리산 첩첩산중에서 평생 자신을 갈고 다듬었고, 학문적 가치가 현실에서 옳은 가치로 되살아나기를 고대했던 남명선생의 그림자를 밟는 느낌이다. 경(敬)과 의(義)는 조산 유학의 빈약했던 한 부분인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산천재는 행동철학(行動哲學)의 발상지 이기도하다.

이런 연유로 나중에 임진왜란이 나자 가정먼저 그리고 가장 많은 후학들이 의병장으로 난세를 구하려는 구국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등 3대 의병장과 더불어 60여 명의 의병장을 배출한 덕천재의 후학들이 보여주는 실천적인 선비의 삶과 정신세계는 다시 남명선생을 돌아보게 하는 동기가 된다.

바람이 거칠지 않은 지리산 시천면 사리의 산천재는 무심히 오늘도 덕천강을 보고 있지만, 넓지 않은 뜰을 거닐던 나는 낮은 지붕을 가진 산천재 문간에 서서 고개 숙여 남명선생에게 예를 갖추고 오리 쯤 떨어진 덕천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출처 :데일리안/배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