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창현마을 2006. 7. 27. 16:45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산천재(山川齋)를 거쳐 남명 선생을 따라


지리산 언저리를 걸어봅니다. 겨울바람이 시원합니다-

2006-01-11 22:54:21

 

행동철학을 몸소 실천한 남명(南冥) 선생이 만년을 지나 임종에 이르렀을 때, 제자 동강(東岡) 김우옹이 "만일 선생님께서 돌아가신다면 무슨 호칭을 써야 하겠습니까?" 하니, 남명이 이르기를 "처사(處士)로 부르는 것이 옳다. 이를 쓰지 않고 관작(官爵)을 부르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재야에서 학문과 도덕에 힘쓸 뿐 벼슬에 나가지 않는 선비를 처사라고 부른다. 처사는 그냥 벼슬에 나아가지 않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정신세계와 행동을 합일하는 일에 평생 충실한 지성인을 이른다.

먼저 들른 산천재(山川齊)라는 명칭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에서 따온 말로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임을 상기해 보아도 처사로서의 남명 선생의 지성, 그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三政丞이 不如 一大提學이요, 三大提學이 不如 一處士라!" 라는 말이 있다. 삼정승이 대제학 한 명에 못 이르고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말인데 이는 남명 선생을 두고 이르는 말처럼 들린다.

겨울 한낮이라지만 지리산 발치의 시골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차다. 싸늘한 이마를 문지르고 손을 부비며 시천면(矢川面) 원리에 자리 잡은 덕천서원(德川書院) 가는 길, 대원사 방면으로 가는 길과 갈라지는 즈음의 시장가에는 이곳의 특산물인 곶감이 한창이다. 지리산 인근의 동네들마다 그리고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었다는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겨울 밤 단지에 넣어 보관하였으나 반 쯤 얼어버린 감을 숟가락으로 파먹던 그런 기억들은 항시 꺼내 보아도 포근하다.

◇ 국도변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의 모습 ⓒ 데일리안 배강열

천왕봉에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중산리(中山里) 가는 길가, 면 소재지를 벗어나는 즈음의 20번 국도변에 덕천서원이 있다. 길 왼쪽에 강을 바라보는 정자 하나가 세심정(洗心亭)이고 오른편에는 낮고 편안하게 자리한 덕천서원이 있다.

세심정은 많은 곳의 서원들에서 볼 수 있는데 공부를 하거나 수양을 하는 과정에서 늘 초심(初心)과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돌아보기 위함일 것이다. 물가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마음을 읽어 늘 반성하고 계획하는 습관을 들이려는 노력으로 꼭 정자를 짓지 않고도 서원 옆 물가의 바위에 세심대(洗心臺)라고 글을 새기기도 한다.

세심정 옆에는 남명 선생의 시비가 있다. 시비에 음각 된 시 한 수는 굳건한 바위처럼 혹은 섬찟하게 느껴지는 기개를 엿볼 수가 있다.

온몸에 쌓인 사 십년 간의 허물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덕천서원 입구에는 곧게 뻗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안고 서 있다. 잎은 다 떨어져 없지만 잎이 무성하면 하늘을 덮을 듯한 기세인데 공자를 숭상하는 의미를 넘어 서원과 조화 된 빛바랜 풍경 하나로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로 서원이나 향교의 혹은 서당 주위에는 대개 은행나무를 심고 뜰에는 유명한 학자를 배출한다는 의미를 지닌 회화나무나 선비의 올곧음을 상징하는 대나무나 매화가 심겨져 있는 것을 곧 잘 관찰할 수가 있다.

◇ 오래된 은행나무가 지키는 덕천서원(德川書院) ⓒ 데일리안 배강열

우리나라 유림(儒林)은 서원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인재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선비들의 여론이 집약되었다. 그러한 기능을 담당한 서원중 가장 손꼽히던 곳이 이른바 삼산(陶山, 玉山, 德山) 서원(書院) 이었다고 한다.

이 중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 선생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 1575년에 건립된 서원이다. 처음에는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이름하여 남명조식선생(南冥曺植先生)의 위패만을 봉안했다가 나중에는 수우당(守愚堂) 최선생(崔先生)의 위패를 같이 모셨다. 10년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하재로 소실 되었고 진백곡(陳栢谷), 이모촌(李茅村), 하창주(河滄洲) 등 이 중건(重建)했으며 광해원년(光海元年 1609)에 사액(賜額)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숭덕사(崇德祠), 서원의 중심 건물로 강학을 하던 경의당(敬義堂), 기숙사 역할을 하던 동제(東齋)인 수경제(修景齋)와 서재(西齋)인 진덕재(進德齋), 그리고 시정문(時靜門), 세심정(洗心亭)이 있는데 수년전 담장과 홍전문(紅箭門), 등이 지어졌다.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실천적 유학자 남명 선생이 평생을 두고 행동철학의 원류를 이끌어 낸 사상의 핵심이 경(敬)과 의(義)이다. 물론 이것이 남명 선생 고유의 이론은 아니다. 퇴계도 경(敬)을 중시 하였고 다른 유학자들도 같은 생각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다만 남명 선생의 경우 죽는 날까지 경(敬)과 의(義)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유학자라는 뜻이다.

경(敬)이 안으로 마음 수양하는 쪽에 필요하다면 의(義)는 이를 밖으로 실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남명도 경(敬)으로써 수양하여 근본을 세운 다음 이를 행동으로 발하여 밖의 만 가지 변화에 대처함에 의(義)로써 과단성 있게 행동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모든 성정(性情)을 통합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경(敬)으로서 마음의 주체를 세워야한다. 다시 말해 학문을 통해 뜻을 세우고 부단한 수양을 통해 실천적 방향을 모색해 의(義)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명 선생은 성성자(惺惺子)]라는 쇠방울을 차고 다니며 정신을 스스로 일깨웠는데 성성(惺惺)은 혼미하지 않고 깨우쳐 있다는 말로서 방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즉 경(敬) 사상에 대한 선생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경의당(敬義堂)을 중심으로한 덕천서원 풍경 ⓒ 데일리안 배강열

남명 선생의 이러한 실천적 모습은 생활 중에도 여러 면에서 엿볼 수 있다. 일 예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경(敬)이며, 바깥으로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義)라는 뜻의 글귀인 (內明者敬 外斷者義), 내명자경 외단자의)를 새긴 보검을 항상 차고 다니면서 자신을 경계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임종을 앞두고 양쪽 창문에 써서 걸어 둔 경(敬), 의(義) 두 글자를 일러 남명 선생은 "경(敬), 의(義) 지극히 절실하고 긴요한 것이다. 배우는 자가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익숙해지면 마음속에 한 가지라도 사사로움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게 되는 구나" 라고 하면서, 자신이 평생 힘썼던 경(敬), 의(義)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이런 선생의 사상은 소위 단성소(丹城疏)로 잘 알려진 을유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남명이 55세(1555년.명종 10)되던 해 10월 11일, 고향의 뇌룡정(雷龍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중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제수 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당시는 을유사화에 이어 문정왕후와 그 외척인 윤원형(尹元衡)일가가 세도를 부리며 전횡을 일삼던 시절이었고 뜻있는 선비들은 낙향하여 실의를 달래던 때였다. 선생은 고지를 받은 한 달 후 상소를 올린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 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입니다. (중략)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고아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 하늘의 재앙과 억만 갈래로 갈라진 민심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수습하시겠습니까."

황량한 들판을 굽어보는 덕천서원 중심의 경의당(敬義堂) 앞마당은 잔디가 몸을 눕혀 바람에 흩날린다. 마당에 열 십자로 난 길 가운데 서서 뒤로 숭덕사(崇德祠), 앞의 홍전문(紅箭門)밖 세심정 쪽을 바라다 보며 엷으나마 햇볕을 온 몸으로 받는다.

◇ 남명선생을 모신 숭덕사(崇德祠) ⓒ 데일리안 배강열

언제나 난세 아닌 때가 없다. 따라서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현재의 삶 속에서도 선생의 곧은 절개와 사상은 녹녹치 않을 가치가 있음을 절감하는 겨울 한낮이다.

바람결에 부처 온 선생의 시한 수가 혼탁한 세상에 영합하지 않은 선비의 마음을 내보이며 세월을 덮고 간다.

꽃봉오리 늘씬하고 푸른 잎 연못에 가득한데
덕스런 향기 누가 이처럼 피워내랴
보게나 묵묵히 뻘 속에 있을 지라도
해바라기 햇빛을 향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연꽃을 읊음(詠蓮)´-

 

 

 

출처 ; 데일리안/배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