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안동권 시리즈 3 - 임청각

창현마을 2006. 5. 9. 10:22

 

 

         안동권 시리즈 3

 

                       -   < 임청각 >

 

 안동권 시리즈의 두번째로  임청각을 소개할 까 한다.

 

 임청각은  안동시내에서 앞에서 소개한 월영교를  가다보면  법흥동 고가교차로를  조금

 지나서  왼편에 있는데 ,   임청각앞을  중앙선 기찻길이  가로질러 놓여 있고, 그나마도

 소음 차단벽을 꽤나 높이 설치해놓아  사전에 미리 파악 해서  가지않는 다면  그냥지나

 치기 쉬운 곳이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바로 앞에 국보 16호인 신세동 7층 전탑이 있어,  함께 둘러  보게

 됨으로서,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경우는  적지않을까  생각되고  여행의 시너지효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臨淸閣)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아름다운 집이다.

 조선 세종(世宗:1418∼1450)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1368∼1429)의 여섯째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 을 지낸 이명이 지은 별당형 정자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의 일이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구절에서 따온 것이며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 가에서 시를 
 짖기도 하노라.’라는 싯구에서‘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라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도  한다.

 

 지금은 50여칸만이 남아 있지만  원래는 아흔아홉칸으로 지어, 정승집 전통 양반집으로서

 매우 그 규모가  컷었다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50여칸만으로도 큰편 규모라 생각은 되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종택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여러 안내문구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워 보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99칸집 여러종택들을 보면  그규모들이 거의 비슷한

 규모로  큰집이었다는 걸 보아왔으므로해서..........

 

 오히려 그다지 넓지 않고 옆으로 길게 자리 잡은 터에 조밀하게 집을 앉혀 가로로 길게

 뻗은  바깥 채가 돋보이는 특색이  눈에 들어 온다.

 

 아쉬운 것은  일제시대때 중앙선 철로를 놓으면서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되어 반

 정도만 남은 것이라 하니  안타까운 일일뿐더러, 지금도 중앙선 열차가 지날 때 마다 

 그 진동으로 인해  소중하게 관리 보존되어야할  문화재가  손상을  입을 것만 같아,

 이 또한 안타까움 일이 아닐 수없다.

 

 아무튼  이 건물과 관련된 사람들의 얘기대로 대단히 큰 건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양반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양반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노비여자들의 공간인 안 행랑채,

 노비남자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로 건물군이 남녀별, 계층별로 뚜렷한 구분을 이루고

 있으며,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높이가 2m나 되어 건물의 위계질서를 매우 분명하게 하고 있다.

 

 또한 사랑채로서 별당형식을 취하여 옆에 뚝 띄어서 지은 멋진 건물 군자정(君子亭)은  

 별서(別墅)가 아닌 사랑채이면서 정자이다.

 군자정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을 파고 연뿌리를 심어 연지를 조성했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연꽃을 볼 수 있어,  옛 부자양반의 호기롭던

 모습을 엿보이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의  임청각이 이런 저런 이유보다도 더더욱  돋보이고 유명하게 된 것은

 집의 규모때문이 아니라 바로 일제시대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그만치 아홉분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로군정서 독판(西路軍政署 督辦),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 지금의

 국가원수직)등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의 활약이  단연 두드러졌으며,

 이 집도 그때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석주선생이 매각하였었다 한다.

 

 그래서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더불어 4대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석주 이상룡

 선생이 한일합방이 되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가져가 현재 봉안된 신위가 없이 건물만 남았다고 한다.

 이러한 임청각의 또다른 매력 하나는 안동 시내에서 고택 체험이 가능한 곳이라는  점이다.


 안동권에서 고택 체험은 수애당이나 농암종택, 하회마을 등 여러 곳에서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시내에서 어는정도  떨어져 있는 데,  임청각은 시내에서 가깝고, 안동 민속촌, 안동댐 마을이

 지척에 있어 이동이 편리한 점은  나름대로 장점이 아닌가 싶다.

 

 개인 생각에 아쉬운 점은  임청각앞에  있는 7층 전탑(신세동칠층전탑)은 국보 16호로  지정

 될만큼  중요탑인바, 또한  일부자료에도  임청각이  신라의 거찰이었던  법흥사(法興寺)의

 구지(舊址)를 개기(開基)하여 지었다 하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찰에 대한 자료가

 멸실된게 아닌가 하는  데에 대해서  연구가 필요치 않나 싶다

 

 

            ........................양지방이올

 

 

 

 

 

 

 

퇴계 선생 친필 현판

 

 

군자정 현판

 

 

농암 이현보 선생 글씨

 

 

제봉 고경명 선생 글씨

 

 

석주 이상룡 거국령

 

 

백사 윤훤 글씨

 

 

송강 조사수

 

 

임청각 매매증서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고

 말하며 망명길에 오른 2년 뒤 1913년 6월 석주의 아들 이준형에게 독립자금을

  대기 위해 임청각과 산판을 매매하였다.

 

 

 

240여년전의 임청각 모습을 그린그림

 

 

 

임청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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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 ( 보물 182호 )

 

 

 

군자정

 

 

 

연지앞에서 본 군자정

 

 

 

군자정 오르는 출입문 - 원래는  돌아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바로앞에서 출입하도록 변경되었다 한다 

 

 

 

 

 

 

 

 

 

 

 

 

 

 

 

신세동 7층 전탑 - 국보 16호

; 70년대 중반 처음으로 찾았을땐 제대로 보호 관리가 안돼있어서,

기단부 하부는 물론  중간부위도 훼손이 많이 되었었고, 이름도 법흥리7층석탑이라

했었던 걸로 기억난다.

 

사족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기단부 하부를 시멘트로 철퍼덕(?)

발라놓고  복원해놓은 것으로 해놓았는데,  이렇게 해놓을려면 안하는 것보다도 못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문화재관리를 담당하고 복원하는 분들의 각성과 분발을 부탁해본다.

이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때의 중요한 문화재인 만큼 걸맞게

관리를 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 본 행랑채

 

 

 

뒷편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 다리는 청송과 영덕으로 향하는 다리다

 

 

 

 

옛날식 화장실 -  위와 아래 그림

; 화장지 또한 실내에 신문지등  종이를 60년대처럼 그대로 꽂아 놓았다

 

 

 

 

 

 

요즈음은 웬만해선 보기 어려운 처마밑에 제비집

;새끼들이 어미가 물어다 줄 먹이를 기다리며 아우성이다

우리 시골 고향집에서도 매년 제비집을 볼 수 있었는데, 오~륙년전부터

한번도 찾아 오지를 않는 제비가 궁금하기도 하고 서운하기까지 하다

 

 

 

임청각 입구

 

 

 

 

 

 

 

 

조그마한 못(연지- 蓮池)을 만들어 놓아 연꽃이 필 수있게 하였다

- 가운데에는 원형의 돌이 놓여 있어 요즈음은 찾는이들이 동전 던지기를 한다

 

 

 

사당

 

 

 

행랑채

 

 

 

건물들마다 높은 담장으로 구분지어 놓았다

 

 

 

옛날부터 사용하던  우물인데  지금도 사용한단다

 

 

군자정의 군불때는  아궁이

 

 

 

 

 

 

 

뜰안에 널뛰기를 할 수있도록 널판이 놓여져 있다

 

 

 

 

 

 

 

 

 

 

 

임청각에서 내려다본 안동시내남쪽면과  낙동강


 

도연명(陶淵明) 의 귀거래사(歸去來辭)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집과 뜰에 잡초 무성할터 어찌 아니돌아가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마음이 몸의 종이 되었으되
奚  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만 하랴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지난 일을 탓해 무엇하랴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나 바른길을 가면 될 것을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길잃고 아직은 그리 멀리 가진 않았으니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舟遙遙以輕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미끄러지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옷깃을 스치네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지나는 길손에게 길도 묻고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 희미함이 아쉽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예집 지붕이 보이니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뻐 걸음을 재촉하네


 僕歡迎             동복환영              아랫 것들도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놈들도 문에서 반긴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오솔길은 지워졌으되
松菊猶存             송국유존              솔, 국화는 남아있구나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잡고 방으로 드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술이 한 병 놓여있네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병을 당겨 자작을 하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느긋이 뜰앞 나뭇가지 바라보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에 기대어 흐뭇해하네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좁으면 어떠하랴 편하면 그만인 것을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나날이 거닐며 정겨워하고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찾는이 없는 문은 닫혀만 있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늙은 몸 지팡이에 의지해 거닐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로 머리 들어 하늘을 보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 돌아나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나르다 지친 새들 둥지를 아네
影  將入          영예예이장입        뉘엿뉘엿 해그림자 드리울제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홀로선 소나무 어루만지네

 

歸去來兮             귀거래혜              이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홀로 사는 법을 배우니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다르네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무엇을 찾아 다시 세상으로 나갈까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의 정담에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 타고 책읽으며 시름달래리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봄을 알리면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서쪽밭에서 밭을 갈리라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치장한 달구지 몰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때론 시냇물을 찾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도 넘고 언덕도 지나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무럭무럭 생기를 띠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흐른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음을 가상히 여기고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내 삶의 쉴날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벌써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몸을 벗는 그 때는 오는 법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맡기지 못하여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공연히 수선 피우랴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부귀는 원하는 바 아니며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아니하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을 때 홀로 거닐다
或植杖而耘          혹식장이운자        때론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노래하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물 가에서 시를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


 

 

 <  찾아가는길 >

 

 

 

 

 

 

 

참고한 자료 :

안동시청관광자료 일부및

임청각 홈안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