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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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소재하고 있다. 계룡산 서쪽에 위치한 갑사는 백제이래 풍부한
불교문화의 본산이 되어왔던 계룡산의 여러 사찰 중에서도 가정 풍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천년고찰로써, 백제 구이신왕원년(久爾辛王元年, 42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갑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사찰로 발전한 것은 백제 멸망후의 통일신라시기의
일이었다.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가 천불전 및 진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였고 후에 의상대사는
당우 천여칸을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갑사는 이때 신라 화엄종 10대사찰의 하나로 번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갑사는 왜군의
대항하는 승별궐기의 거점이 되어 당시 갑사 청련암에 주석하시던 영규대사는 왜병이 북상하자 800여 승려들을 이끌고 궐기, 충청도 의병장
조헌선생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수복하고 충청도를 왜군으로부터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으나 금산전투에서 800여 승병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셨고
영조 14년(1738년)에 건립된 경내의 표충원의 임진란의 대표적인 승병장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갑사는 조선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시 침입한 왜구들에 의하여 한꺼번에 소실되어 수년이 지난 선조 37년(1604년) 대웅전과 진해당 중건을 시작으로
효종(孝宗) 5년인 1654년에 사우(寺宇)를 전면적으로 개축·중수하였다. 이어 고종(高宗) 12년인 1875년에도 寺憎들에 의해 다시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광무(光武)3년인 1899년에 적묵당(寂默堂)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갑사는 가람배치 형태를 보면 계곡의 냇물을 앞에 두고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大雄殿)과 강당(講堂)이 있으며, 좌·우에 진해당(振海堂), 적묵당(寂默堂)인 요사(寮舍)가 있다.
이외 종각(鍾閣) 및 해탈문(解脫門), 삼성각(三聖閣), 팔상전(八相殿), 응향각(應香閣)이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냇물의
건너편에 대적전(大寂殿)과 또 하나의 요사(寮舍)가 있는데, 이 요사부근에는 원사당지(原舍堂地)라 불리는 곳이 있어 현재의 가람이 본래 원위치는
아님을 나타낸다. 원사당지에는 대형의 이동은 임난후(壬亂後)의 중건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갑사에는 현재 건축물외에
주요문화재(主要文化財)로서 철당간(鐵幢竿), 고려초기의 부도(浮屠), 동종(銅鐘), 월인석보판목(月印釋譜板木),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象),
배살입상(菩薩立象), 사적비(史蹟碑)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사경역(寺境域) 주변에 내원암(內院庵), 대성암(大聖庵), 대적암(大寂庵),
신흥암(新興庵)등 5개의 부촉암(附屬庵)을 거느리고 있다.
- 갑사 강당(講堂) [지방문화재
제95호]
갑사의 해탈문(解脫門)과 대웅전(大雄殿)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강당(講堂)은 원래
승려들이 법문(法文)을 강론(講論)하던 건물로 맞배지붕에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집이다. 기단(基壇)은 자연할석으로 낮게 쌓고 입구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주초(柱礎)도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중앙의 어칸(御間)에는 3구, 양쪽 협칸(夾間)에는 2구씩의 공포를 배치하고,
내·외2출목(內·外二出目)이며 포작(包作)의 구성은 앞뒤면이 같다. 기둥은 배흘림을 주어 안정감이 있다. 단청은 완전 퇴색되어 무늬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며, 창틀은 개수되어 원형이 아니다.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현판이 붙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구(架構)에 기교를 부리지 않은
웅장한 조선시대(朝鮮時代) 건축이다.
- 갑사 대웅전(大雄殿) [지방문화재 제105호]
이 건물은 갑사의 본전(本殿)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선조(宣祖) 37년(1604)에 중건(重建)하였다. 원래의 대웅전은 현재 대적전(大寂殿)이 있는 부근으로 보이며, 중건시 이건(移建)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다포식(多包式)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간격은 가운데
3칸을 협칸(夾間)보다 넓게 잡아 공포를 2구씩 배치하고, 협칸에는 1구씩 배치하였다. 공포는 내(內)·외3출목(外三出目)으로 쇠서는 완만하게
휘어 있고 대체로 조선시대(朝鮮時代) 중기(中期) 양식(樣式)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초각(草刻)도 눈에 띈다. 내부는
우물천장에 닫집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꾸몄으며, 석가여래불상(釋迦如來佛像)을 안치(安置)하고 있다.
- 갑사
동종(銅鐘) [보물 제478호]
이 종은 갑사 해탈문(解脫門)을 지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지은 사모지붕의
종각안에 있다. 이 동종의 종신부(鐘身部) 윗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龍)이 네 다리와 몸체로 유(종을 매다는 꼭지)를 이루어 그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며, 용통(甬筒)은 없다. 각부의 표현이 웅건(雄健)한 수법으로 조성된 우수작이다. 종의 어깨부분에는 물결 모양의 꽃무늬를 원형으로
두르고 바로 밑에는 위·아래로 구획하여 위에는 연꽃무늬, 아래는 범자(梵字)를 촘촘히 배치하였다. 이 횡대(橫隊)에 거의 붙어 있는
방형(方形)의 유곽(乳廓)안에 9개의 유는 연꽃무늬 가운데 원형으로 튀어 나왔다. 이 네모난 유곽띠 안은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되고 유곽은
대칭되게 4개가 있다. 당좌(撞座)는 구름무늬로 받쳐진 원형의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당좌 사이에 석장(錫杖)을 잡은 늘씬한
보살입상(菩薩立像)이 있다. 밑부분 종구(鐘口)에서 14cm위에 연꽃무늬와 보상화(寶相華) 무늬를 교대로 한 당초문(唐草紋)띠가 있다. 몸체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조선(朝鮮) 선조(宣祖) 17년(1584)에 만들었음과 갑사의 절이름도 당시는 갑사사(甲士寺) 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크기는 총 높이가 127cm, 입지름이 91.9cm이다.
- 갑사 부도(浮屠) [보물 제257호]
이 부도(浮屠)는 원래 갑사(甲寺) 뒷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型)으로 팔각(八角)의 지대석(地臺石)위에 팔각(八角)의 기단(基壇)을 만들고, 사자(獅子)와 권운(圈雲)과 용문(龍紋)을
조각(彫刻)하였으며, 중대석(中臺石)에는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과 탑신(塔身) 양면에는 호형(弧形)을 조각하고 네 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식(彫飾)하였으며, 옥개석(屋蓋石)은 목조건물(木造建物)의 세부양식을 번안하여 우아하게 조성하였다. 각부양식(各部樣式)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초기(初期)의 건조(建造)로 추정된다.
- 갑사(甲寺) 사적비(寺蹟碑)
현종(顯宗) 원년(1659)에 세워진 이 사적비는 자연 암반의 중앙에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대리석(大理石)의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비신위에 옥개형태(屋蓋形式)의 비개(碑蓋)를 놓고 정부(頂部)에 별석(別石)의 보물(寶物)을
올렸다. 비문(碑文)은 비신의 상단(上端) 전후면(前後面)에 전서체(篆書體 )로「公州 鷄龍山 甲寺事碑銘」이라 횡서하였다. 비문의 일부는 손상되어
판독이 불가능한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재(碑石材)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이 비문의 실측치는 다음과
같다. 비신고(碑身高) 225cm, 폭(幅) 133cm, 두께(厚) 49cm, 비경고(碑莖高) 112cm, 비문자경(碑文字徑) 3cm.
-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지방문화재 제50호]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지방문화재 제50호] 갑사 동쪽 계곡의 약
100m 지점에 자연암석으로 된 동굴 안에 남쪽을 향해 전체 높이 141cm 크기의 약사여래입상이 안치되어 있다. 원래 갑사 뒷산
사자암(獅子庵)에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머리는 육계(肉界)가 크며, 백호(白毫)가 뚜렷하고 얼굴은 좀 길며 눈은 가늘고 입은 다물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쳐 좌우로 무릎 부분까지 늘어졌고, 가슴 앞 옷은 반원형으로 흘러내렸다. 오른손은 들어 가슴
부분에서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어 약사여래임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구성미와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高麗) 중엽(中葉)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갑사 철당간 및 지주(甲寺 鐵幢竿 및 支柱) [보물 제256호]
이 철당간(鐵幢竿)과 지주(支柱)는 현재 기단부(基壇部)의 대석(臺石)은 매몰되어
있는 상태이고 장대한 두 개의 장방형(長方形)의 기단석만이 노출되어 있다. 노출된 두 개의 기단석에는 각면에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여
장식하였는데 그 수법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안장 장식 기법과 같다. 동서(東西)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支柱)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지주로서 맨 위의 정상부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어드는 모서리는 모를 죽여 활모양(弧形)으로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공(杆孔)이라는 구멍이 윗부분 한 군데에 장치되어 있는데 이곳에다 철제(鐵製) 당간의 다섯 마디
철통을 철띠로 세 번 돌려 고정시켰다. 철제 당간의 직경은 50cm로 현재 철통 24개를 연결하여 세워져 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원래는
28개의 철통이었으나 대한제국말기(大韓帝國末期)인 고종(高宗) 30년(1893) 7월 5일에 네 마디가 부러져 없어졌다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초기(初期)인 문무왕(文武王) 20년(680)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양식상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중기(中期)의 당간지주의 양식을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 대적전(大寂殿) [지방문화재
제106호]
420년대에 창건된 갑사(甲寺)의 금당(金堂)으로 전하여 온다. 조선 선조 37년에
건축한 것이며, 임진왜란시 전사찰(全寺刹)이 병화(兵禍)로 1,000년 문화재가 불타버렸다. 이 건물은 선조(宣祖)37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 선조 2년간 월인석보판목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쳐 엮은 책으로 석가의 일대기와
공덕을 찬양한 내용이다.
- 표충원(表忠院) [지방문화재 제52호]
선조(宣祖)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때에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을 승려의 몸으로 승병을 모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泗溟大師), 영규대사(靈圭大師)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14년(1738) 이 분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
갑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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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는 五嶽 中 西嶽, 고려시대엔 妙香山 上嶽, 지리산 下嶽과 더불어 三嶽中 中嶽으로 일컬어지는 명산
鷄龍山의 서편 기슭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갑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적하고 400년 지나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사리보탑에 있던 부처님의 사리를 동서남북을 관장하는 사천왕들로 하여금 마흔여덟 방향에 봉안케 하였다. 이때
북쪽을 관장하던 다문천왕(비사문천왕)이 동방 남섬부주 가운데서도 명산인 계룡산의 자연 석벽에 봉안한 것이 지금의 천진보탑이다. 그 후 고구려
승려 阿道和尙이 신라최초 사찰인 선산 挑李寺를 創建하시고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하늘까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찿아가 보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이로써 탑 아래에 배대(拜臺)에서 예배하고 갑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때가
420년(백제 구이신왕 원년)이다. 556년(위덕왕 3년) 혜명대사가 天佛殿과 眞光明殿 大光明殿을 중건하고,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천여칸의
당우를 중수하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으로 전국의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되어 國中大刹로 크게 번창되었다.
887년(진흥왕 원년) 무염대사가 중창한 것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임진왜란 와중에도 융성하였으나 1597년 정유재란(선조
30년)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년) 寺僧 인호 경순 성안 보윤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고,
1654년(효종5년)에는 寺僧 사정 신징 경환 일행 정화 균행 등이 중수하였으며, 이 후에도 부분적인 개축과 중수를 거쳐
1875년(고종12년)에 대웅전과 진해당이 중수되고 1899년 적묵당이 신축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고, 조선 후기 들어 새롭게 조성된 불상과
탱화 경판이 남아있으며 1866년(고종3년) 개금불상한 施主秋가 있다. 또한 갑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대사를 배출한 호국불교 도량으로도
유명한 유서 깊은 고찰로써 그의 활약상은 범우고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범우고 등에 따르면
영규대사는 갑사에서 출가하여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가 되어 항상 이절에서 주석하고 있었는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여름에 왜구가 청주지방까지 이르러 청주가 점거 당하자 이에 영규대사는 승려 700명을 엄격히
선발하여 승군을 일으켰으며 청주지방의 승려 300명도 참여한 1000명의 승군으로 홀로 싸웠다. 8월에 영규대사의 승군이 청주를 쳐들어가자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왜병과 싸워 청주를 되찿았다. 한편 금산에 있던 초토사 고경명 군대가 고바야가와의 왜군에게
패전하여 왜군이 창궐하고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려 하자 영규대사는 조헌과 함께 진군하여 곧바로 금산의 외곽에 진영을 갖추고 있을 때 왜병이
쳐들어와 조헌이 먼저 전사하였다. 사기가 떨어진 병사와 의병들이 전의를 잃고는 의병장 조헌이 이미 죽고 적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물러섬만 같지
못하다고 패퇴를 간청이 있었으나 오히려 영규대사는 그들에게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게 되면 죽는것이거늘 어찌 홀로 살겠다고 하겠는가라고 크게
호통을 치고는 흐트러진 전력을 다시 가다듬어 사력을 다해 종일 토록 싸웠으나 그 또한 전사하였다. 이로써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왜병과 싸움으로써
왜군의 호남침공을 끝내 저지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그 뒤 전국 곳곳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그의 충의를 포상하여 복국우세기허당일합대선사를 추증하고 당시의 뜻을 기리도록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과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셨다. (공주군 진두면 유산에 묘가 있다) 그리고 갑사는 현 주지이신 장곡스님의 원력으로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고
수행도량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고자 사천왕문 복원불사를 하였고, 법당 바로 앞에 놓여진 강당을 충청남도와 공주시의 협조로 현 위치로 이전불사함과
동시에 불전 사물각(범종루)을 불사하였고, 관람객들의 성보물 관람 편의를 위한 성보물 전시관을 불사하였으며, 크고 작은 사중에 많은 보수를
함으로써 새로운 갑사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승병장 영규대사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영규대사 추모관 건립 또한 추진 중에 있다. 갑사는
岬寺, 岬士寺, 鷄龍甲寺 등으로 불리어 지다가 으뜸 또는 첫째란 뜻의 지금의 명칭은 18세기말 산 이름을 따서 鷄龍甲寺로 불리어지고 있고,
1911년 제정된 사찰령에 따라 마곡사의 首말사가 되었고 경내에는 15동의 불전과 승당, 부속 전각들이 있으며 주변 산골짝 여러 곳에 산내
암자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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