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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 소재 천호산
충남 논산군 연산면(連山面) 천호리(天護里) 천호산에 있는 절로서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대한 불교 법상종에
속한다. 936년(태조19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조시대에는 퇴락하여 폐사로 있던 것을 1930년 김광영(金光榮)이 새로 짓고 도광사(道光寺)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태광사(泰光寺)라고 하였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19호인 사지석불입상(寺址石佛立像), 충남민속자료 제1호인 개태사철확(鐵鑊), 충남문화재
자료제247호인 5층석탑과 제275호인 석조(石槽)가 있다.
철확(위의 사진 하단) 예전에 이 절에서 쓰던 철확, 즉 큰
가마솥은 승려들의 식사를 위해 국을 끓이던 것으로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이다.
고려
태조19년(936)에 창건된 사찰로 그 내역은 '고려사'와 '여지도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개태사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후백제를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약 4년간에 걸쳐 축조했다. 그래서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었으며,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에는
이곳에서 신탁(神託)을 받는 등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사운은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즉 고려 말기 잦은 왜구의 침입에 의해 잦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게 되어 조선시대에는 계속 폐사된 채 방치되어 왔는데 1934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사찰이 재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태사를 품은 천호산의 본디 이름은 황산이었다고 한다. 황산벌이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따온 듯하다. 계백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이 황산 앞으로 펼쳐진 넓은 벌판에서 왕건은 후백제의 신검 군대를 물리쳤고 사실상의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다. 강력한 고려 제국건설의 첫 무대였던 셈이다. 대업을 이룬 왕건은 이 땅을 하늘이 도운 곳으로 여겨, 황산을
천호산(天護山)으로 개명하였다.
거대한 제국(泰)을 연(開) 곳이라는 뜻의 개태사(開泰寺)가 세워진 때도 그 무렵입니다.
그래서인지 법당 안에 모셔진 세 구의 불상은 흡사 강건한 고려의 군사 같은 당당함이 서려있고, 법당의 이름 현판도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전(殿)'이 아닌 '궁(宮)'으로 명명되어 걸려 있다. 아미타삼존불을 모셔둔 곳이라지만,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이 아닌, 미래불인 미륵의
공간이라는 뜻으로 '용화궁(龍華宮)'이라 이름 붙인 것도 이채롭다. 또, 법당 앞에 단군의 영정을 모셔둔 정법궁(正法宮) 안을
들여다보노라면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민간 신앙의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이러한 특징들과 함께 창건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 개태사는
왕건의 '승전 기념관' 같은 곳이라 느낄수 있을것입니다. 안 마당에 소담한 탑 한 기가 서 있고, 번성했을 시기에 절의 규모를 보여주는
큼지막한 쇠솥(철확)이 있어 예로부터 절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찾는 이들에게 여느 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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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는 논산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국도변, 천호산(386m) 기슭에 위치해 있다.
서울 - 서대전 나들목 - 개태사 (18km) 논산에서 개태사까지 시내버스 30분 간격운행, 40분
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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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 (보물 제219호)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은 경내(境內)
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을 주시하고 있다. 본존불은 높이 4.15m 크기로 복연(伏蓮:아래로 향한 연꽃) 의 방형 기단상에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부에 만들어진 방형의 불대(佛臺) 후면에 2개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본래는 광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상의 형태는 크게
돌출된 육계에 둥그런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이마에 백호가 선명하고 이목구비의 형태가 뚜렷하나 얼굴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형상이다. 불상의
규모에 비해 크게 과장된 듯한 양손은 오른손을 들어 가슴에 붙이고, 왼손은 배에 대어 무엇을 잡은것처럼 만들었는데, 이로 미루어 본존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각각 시무외인, 여원인을 나타내고 있는데,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가 다르게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보살상은 각각 지름 2m 내외의 팔각형 연꽃 대좌에 올려져 있으며, 높이는 3.12m 내외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얼굴은 육계가 크며, 본존불보다 더욱 치졸하다. 머리띠 장식은 귀 뒤로 어깨까지 내려져 있으며, 양팔에는 팔찌를
돌리고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양팔에서 좌·우로 늘어져 있고, 배에서 무릎까지 한줄의 매듭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219호) 개태사지철확(충남 민속자료 제1호) 개태사지 5층석탑(문화재자료 제274호) 연산화악리의 오골계(천연기념물
제265호)
주변 관광지 송불암 미륵불(연산 연산리), 김장생선생묘소일원(연산 고정리), 연산향교 대성전(연산 관동리),
연산아문(연산 연산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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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의산천님홈
뭉게구름을 타고 황산벌에 살포시 내려앉은
가을
호남고속도로 서대전 톨게이트에서 빠져 나와 4번 국도를 타고 논산 방향으로 13km 가량 더 가다보면 왼쪽으로 낮은 능선들이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고 그 아래 몇 채의 기와집이 다소곳이 앉아 있으니, 그곳이 바로 개태사다.
길이란 구비 구비 돌아가는 맛이
있어야 운치가 있고, 터덕거리면서, 숨 할딱이면서 걸어 올라가야 시간이 흐를수록 아롱다롱 무늬진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그러나 천호산 개태사로
가는 길은 싱겁다. 싱겁다는 말과 허무하다는 말은 혈연 관계있는 말이다.
눈 앞에 펼쳐진 황산벌을 바라본다. 황산벌에도 가을은
벌써 와 있었다. 가을은 긴 담뱃대를 든 노인처럼 자꾸만 헛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아마 자신이 노랗게 물들여 놓은 들판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난
모양이다. 체면이라도 세워줄 양으로 김용택의 시 '초가을2'를 입 밖에 내어 뇌까려본다.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은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에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가 지는 초가을
소슬바람 부는 산 아래 서 있답니다 산 아래에서 산 보며 두 손 편하게 내려놓으니 맘이 이리 소슬하네요
초가을에는 지는 햇살들이 발광하는 서쪽이 좋습니다
-김용택의 시 '초가을2' 전부
소슬바람
한 자락이 내 야윈 몸을 휘감다 간다. 늙은 가을은 매양 감사의 표시를 이렇게 전해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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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일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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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 일주문에서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길은 예까지 오는 길보다 더욱 더
허무하다. 너무 짧은 나머지 느린 마음이 허무감을 잉태하기도 전에 서둘러 끝나버린다.
허무를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절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려다 말고 다시 뒤돌아본다. 건너편 개태사 역을 스치듯 기차가 지나간다. 저 초고속열차는 대범한 것일까, 작은 것을 묵살하는 오만함에
길들여진 것일까.
70년대,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갈 적마다 개태사역에서 쉬었다 가곤 했다. 그때 난 작은 역에
목매달던 비둘기호가 얼마나 싫었던가. 이젠 오히려 비둘기호의 그런 소심함이,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가 슬며시 그리워진다.
한때 폐허가 되었던 개태사
왕건은 이곳 황산에서 후백제의 왕 견훤의 아들인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격전지였던 이곳에다 절을 짓게 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발원문에 따르면 절을 창건한 것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해준) 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신 것을 갚으려는 것이었다.
개태(開泰)란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이다. 아마도 전승을 기념하고, 그렇게 자신의 속을 썩이던 이 땅이 마침내 자신의 강토에 속하게 됐다는데 대한 감격이 크게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출발이 화려했던 이 절은 어느 한 시기에 돌연 폐허가 돼 버렸다. 석불은 도랑 속에 묻히고 거대한 밥솥인 철확은
홍수에 떠내려갔으며, 절의 자취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랬던 것이 1930년에 이르러서야 한 여승의 힘에 의해 이 절은 다시
도량으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기 시작했다.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44호로 지정되어 있는 원개태사의 위치는 현재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약 300m
가량 더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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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문화재자료 제 247호 5층 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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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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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219호 미륵삼존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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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 비등점을 벗어나면 민심은 폭발하고야
만다
절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서 있는 고려시대 양식으로 세워진 5층 석탑이 길손을 맞는다. 이 절의 본법당은 1992년에
지어진 용화대보궁이다.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삼존불입상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본존불은 발견 당시 도랑에
뒤로 넘어진 채 허리가 끊어져 있었다고 하며 우협시불은 앞으로 엎어진 채 목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몸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갈라졌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삼존석불은 체구가 장대하다. 가운데 본존불은 높이가 4.15m, 좌협시보살상이 3.53m,
우협시보살상이 3.46m이다. 석불 뒤에 있었을 광배를 감안하면 높이 5m 가까운 장륙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발목 부분이 넓은
탓인지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안정적이다. 그러나 석재가 가진 무게감을 불식하지 못한 채 조각으로서의 우아한 느낌을 살려내지 못했다.
손은 손바닥을 펴서 앞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무외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마치 야구 글러브를 낀 것처럼 크고 뭉툭하다.
시무외인이란 두려움을 없애준다는 뜻이다. 삼존불 모두가 자비하신 부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갑옷과 투구를 갖춘 무사의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후백제 유민들에게 정복자로서 자신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던 왕건의 의식이 투영된 것일까. <훈요십조> 속에서
차령이남 공주강 밖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고까지 했던 왕건이다. 이 불상의 수난에는 이 지방 민중들의 반감이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민중은
일시적인 폭압에는 굴복할지언정 언젠가는 폭발하고야만다는 것을 우리는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1987년 6월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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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법당 우측에 자리한 정법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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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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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지상정천궁(우주각) 안에 자리한 동자 부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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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 대웅전 좌측에는 정법궁과 우주각이란 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정법궁에는
단군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우주각 안 층층이 쌓아 올린 방석 위에는 동자부처가 앉아 있으니. 권위가 어디 어거지로 쌓는다고 쌓아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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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민속자료 제1호 철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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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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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확 속. 소원을 빌었던 동전들이 떨어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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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 "너는 살았을 때 연산의 가마솥을
보았느냐?"
우주각 옆으로는 철로 만들어진 가마솥이 놓여 있는 보호각이 자리하고 있다. 직경이 3m, 높이 1m. 왕건이
승려 500명이 먹을 수 있는 공양을 한꺼번에 지을 수 있도록 하사한 것이라 한다.
이 솥 역시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겨 다니는 등
유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일제 말기엔 전쟁에 쓸 무기를 만드는데 쓰려고 일본 사람들이 이 솥을 깨려고 하자 일하던 사람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논산사람이 죽어 시왕산 염라대왕을 만나면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했다는 전설 속의
가마솥은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양 귀퉁이가 깨어진 채로나마 개태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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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 켠에 있는 작은 석불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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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안병기 |
| 이같이 삼존불의 말씀을 들었다
마당 한
켠을 지키고 있는 이름모를 석불좌상을 바라본다. 민심이 바라는 부처는 아마도 저런 부처일 게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면서 귀 기울여 자신들의
고통을 들어주고 같이 아파해줄 수 있는 그런 부처.
용화대보궁 속에 갇혀 있는 부처는 한낱 권력의 부처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이
만든 부처에게는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심(下心)을 들으려는 귀가 없다. 개태사를 나서면서 나는 힐끗 용화대보궁 속 삼존불을 쳐다보며 염장을
지르듯 한 마디를 던졌다.
"세 분 부처님께서 이 도량을 지키신 뜻이 어디에 있사옵니까?"
순간 세 분 부처님이 입을
합쳐 하나같이 말하는 소릴 들었다.
"말 시키지 마라.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몹시도 피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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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4 16:54 |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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