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은해사 - 경북 영천 : 팔공산 : 은해사의 부속암자들

창현마을 2005. 9. 5. 22:40

 

 

 

 

 

 

 

팔공산 은해사

은빛 솔숲 지나, 이웃의 얼굴을 한 부처님 만나는 절

지금 산하는‘묵언정진(默言精進)’ 중입니다. 침묵 의 계절입니다. 천공으로 구름이 한가롭고, 빈 숲을 지나는 바람은 먼 바다 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빛이 고입니다. 숲은, 은빛으로 출렁거립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숲속에 세워진 절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은해사(銀海寺)-. ‘은빛 바다 속 절’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은해사가 터 잡고 앉은 팔공산을 극락정토로 여긴 데서 연유한 이름입니다. 극락의 주재자인 아미타 부처의 광휘를 은빛으로 물결치는 바다에 빗댄 것이겠지요.

지극한 믿음은 지극한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산을 은빛 바다로 볼 줄 알았던 이 시적 상상력의 주인들은, 실제로 절의 진입로를 은빛 출렁이는 송림(松林)으로 가꾸어 놓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741년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숲의 나이는 264살이 되는 셈입니다. 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곧고 굽은 노송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화루 앞 해탈교까지 이어지는 그 길을 나는 주저 없이 ‘내 마음 속 아름다운 길’의 목록에 올립니다.

은해사는 본디 해안사(海眼寺)란 이름으로 신라 41대 헌덕왕 원년(891)에 창건되었습니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에 대한 참회와 당시에 숨진 원혼을 달래고자 혜철 국사로 하여금 해안사를 창건케 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습니다. 절터도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운부암 옆의 해안평이었습니다.

현재의 은해사는 조선 인종 원년(1545)에 일어난 화재로 해안사가 불 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이 지은 것입니다. 인종의 태실(胎室)을 돌보는 사찰이었으므로 불 탄 이듬해 천교 스님이 나라의 보조금으로 중창을 하고는 이름도 은해사로 고쳤다 합니다.

‘사람 기르는 일’을 최대의 불사로 삼고 있는 절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절의 역사도 그곳에 머문 사람으로 하여 빛을 머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普照 知訥·1158~1210) 스님이 산내 암자인 거조암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도모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원종 11년(1270)에 홍진국사 혜영(弘眞 惠永) 스님이 머문 뒤부터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한층 고양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대화엄 강백인 영파 성규(影波 聖奎·1728~1812) 스님이 주석하여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이름을 빛냈습니다.

▲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 전경.

그러나 현재는 조계종 교구 본사 중 가장 가난한 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빛났던 과거는 역사의 갈피에 묻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만큼은 끊어지지 않아서 2002년부터 재가자 교육기관인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1,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사람 기르는 일’을 최대의 불사로 삼고 있는 절이 은해사입니다. 

세상을 망치는 것도 사람이지만 세상을 살리는 일 역시 사람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절은 ‘사람의 학교’, ‘남을 위한 기도의 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 또한 좀 순화된 형태로 욕망을 추구하는 곳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은해사가 자리한 팔공산(1,193m)은 낙동정맥이 남하하다가 대구쪽으로 뻗힌 가지줄기에 맺혀서 금호강을 풀어놓는 대구의 진산입니다. 신라 오악 중 중악으로 대구시뿐만 아니라 경산시와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은 본디 공산(公山), 혹은 부악(父岳)이라고 불렸습니다. 삼국유사는 물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산경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동국여지전도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면서 비로소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그 내력이 분분합니다.

▲ 은해사 대웅전 뒤 한가로운 대나무 숲길.
양산 천성산에서 1,0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수도하던 원효 스님이 8명의 제자만 데리고 팔공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들이 득도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나, 후세에 만들어진 얘기라는 의견이 정설입니다. 다른 전승으로는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했는데, 이 때 신숭겸 등 8장수가 전사하여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나 이 또한 어느 역사서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허구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밖에도 여덟 고을에 걸쳐 있어서, 혹은 여덟 봉우리가 우뚝해 보여서 라는 견해도 있지만, 신뢰지수는 낮아 보입니다. 산자락이 워낙 넓다 보니 이런저런 인간사가 끼어들면서 만들어진 얘기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팔공산 동쪽 기슭, 행정구역 상으로 영천의 대표 사찰인 은해사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지만 부속암자가 더 널리 알려진 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폭을 넓혀 부속암자를 두루 살피지 않은 은해사 탐방은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해사가 보유한 1개의 국보와 3개의 보물 중 괘불탱(보물 제1270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습니다.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백흥암의 극락전(보물 제790호)과 수미단(보물 제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 백흥암은 현재 비구니 선방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밖에 이름의 뜻이 ‘몸은 사바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身寄娑婆 心寄極樂)’는 기기암(寄寄庵), 항상 상서로운 구름이 머물러 있다는 운부암(雲浮庵), 일명 ‘돌구멍 절’이라고 하며 김유신이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중암암(中巖庵) 등을 찾으면 운부암골이나 기기암골의 절경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산내 암자의 창건 연대가 본사보다 앞선다는 점입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들머리의 솔숲이 그러하듯 변죽이 아름다워 몸통이 빛나는 절이 바로 은해사입니다.

한편 은혜사는 추사 김정희의 묵적(墨跡)으로도 유명한 절입니다. 1862년 지조 스님이 지은 은혜사중건기에 ‘大雄殿, 寶華樓, 佛光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묵묘(墨妙)’라고 했고, 1879년 당시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 불당의 大雄殿, 종각의 寶華樓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의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독특한 구조미로 건축가들 사랑 듬뿍 받는 거조암 영산전

▲ 은해사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본 모습. 늙은 향나무의 푸르름이 겨울에도 늠름하다
은해사의 암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오백나한 절’로 유명한 거조암입니다. 거조암을 바라보는 관심의 초점은 크게 둘로 나눠질 듯합니다. 첫째, 영산전(국보 제14호)에 대한 건축적 관심일 것입니다. 얼핏 보면 경판고처럼 보이는, 일체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이 건물은 건축 양식으로 봤을 때 고려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기의 건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이 유명한데, 거조암 영산전은 이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독특한 구조미로 건축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건물입니다.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고 한 바 있는데, 영산전이야말로 ‘필요미’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이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봉렬 교수는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조암 영산전은 보는 이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듯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또한 모든 부재를 노출시킨 장쾌한 단순미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흔히 500라한으로 일컬어지지만 정확히는 석가모니부처의 10대 제자와 16라한을 합한 526위의 나한입니다. 사실 나의 관심은 건물보다는 나한, 좀더 좁혀 말하면 나한의 표정에 있습니다. 그 표정 속에는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시비곡직’이 다 들어 있습니다.

▲ 은해사 수련원장(혜해) 스님과 다담을 나누며.
다 알다시피 영산전은 영산회상(靈山會上),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때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이 곧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아라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전이나 응진전에 모셔지는 나한상은 혹독한 수행 이력을 상징하는 듯 다소 기괴한 표정을 한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인 것이 상례입니다.

하지만 거조암 영산전의 나한상은 하나 같이 파격적일 만큼 해학적이고, 익살맞고, 천진스럽습니다. 마치 어떤 경우에도 야단치지 않는 선생님과 제멋대로 딴전을 피우는 아이들로 가득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을 보는 기분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마냥 편안했습니다.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선사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 같은 것’이라 했고, 또 어떤 선사는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런 표현은 다 “모든 중생들엔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열반경)’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수렴됩니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긍정, 이미 우리는 다 부처인데 미혹에 가려 그것을 발현하지 못할 뿐이라는 부처의 간곡한 말씀을 거조암 영산전에서 듣습니다. 소승적 깨달음의 상징인 아라한의 얼굴에서,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적 자기 구원의 미소를 봅니다. 거조암 영산전의 나한님이 말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과 너의 이웃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소곤소곤 말합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은해사에서 숙식

은해사 일주문 앞에는 식당은 물론 여관과 민박집이 즐비하다. 상당한 규모의 상가이지만 전혀 개발되지 않아 마치 7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면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빼놓지 않는 메뉴는 손칼국수인데, 콩가루를 듬뿍 넣은 경상도식이어서 담백하면서도 구수하다. 그밖에 산채요리와 더덕구이, 닭요리가 주 메뉴인데 가격은 관광지치고는 싸고 양도 푸짐하다.
영일식당(054-355-1057)이 여관을 겸하고 있고, 경산식당(054-335-1667)과 영천식당(054-335-6905)이 민박집을 겸하고 있다.

 

 

 

 

 

 

 
 
대웅전 앞 5층석탑을 보존을 위해 부도군으로 옯겼다고 한다.
 
 
 
 
 
 
 
 
 
 
 
보화루
 
 
보화루 옆에 범종루가 보인다..
 
 
보화루 들어오면서 보이는 대웅전..
 
 
 
 
 

 
 
 
 
 
추사 김정희가 썼다는 대웅전 현판..
 
 
승가대학..

 
 
 
 
 
 
 
 
 
 
 
 
 
 
 
 
 
 
 
 
 
 
 
 
 
 
 
 
 
보화루 와 범종루..

 
 
 
 
 
 
 
 
 
 
 
 
 
 

 
 
 
 

은해사 내에는 보물 제 1270호인 은해사 괘불 탱화,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 후불탱화, 괘불, 신장탱화. 쇠북 등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거조암




거조암은 산내 암자로서 신라 효성왕 2년(서기 738) 원참대사가 창건하였다.
그 뒤 고려 우왕 13년 혜림법사(慧林法師)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하여
오백 나한을 모신 유서깊고 영험있는 나한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우리 나라 목조 건물로 가장 오래된 거조암 영산전(서기 1375)은
고려시대의 대표적 건물로서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봉정사 극락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등 4곳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중한 문화재가 되고 있다.

영산전은 현재 국보 제 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부암




운부암은 711년 성덕왕 10년에 의상 스님이 창건하였다.
천년 전에 창건할 당시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났다고 하여 그렇게 명명되었다는 운부암은
어쩌면 면벽참선 (벽을 향하여 앉아서 수도하는 방법)하는 수도 방법을 통하여
속세의 모든 영욕을 저 뜬구름에다 비유하고
스스로가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승려들의 계명(戒銘)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 뒤 관음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1860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옹허스님과 침운스님이 중건하였고 1900년에 보화루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전을 중심으로 왼쪽에 운부난야(雲浮蘭若)가 있고
오른쪽에 우의당(禹義堂)이 있으며 앞쪽에는 보화루가 있다.
운통전 안에는 보물 제 514호인 청동보살 좌상이 있다.
금동장식의 화려한 이 불상은 신라 말에 혜철국사가
인도에서 해금강으로 들어오는 배 안에서 모셔왔다는 전설이 있다.

아무튼 이 암자에는 근년에만 하여도 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한 바 있는
동산선사와 운봉선사와 같은 고승들도 지나갔을 만큼
매우 유서깊은 수도장임이 분명한 듯하다.



백흥암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 절은 국사 혜철(惠徹)이 861년(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松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고,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寶華樓)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이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영산전·명부전(冥府殿)·문루(門樓)·
산신각(山神閣)·선실(禪室)·원주실(院主室)·요사 등이 있다. 

백흥암에는 보물 제790호  극락전(極樂殿)과  보물 제486호 극락전 수미단(須彌壇)이 있다.




중암암



일명 돌구멍 절이라 불리는 중암암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이다.
세 살 먹은 어린이가 흔들어도 흔들린다는 건들바위,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 이런 것들이 유명하며 기암괴석이 빼어난 경치 역시
자랑이다. 장군수는 김유신이 열일곱 살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어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

그리고 중암암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도처이다.
중암암의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 없고,
다만 돌문 밖에 있는 석탑을 보아 오래된 암자일거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이 절에는 샘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는데,
옛날에 이 샘에서 암자에 계신 스님을 위해 날마다 한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돌샘에서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산적이 욕심이 나서 스님을 죽이고
구멍을 크게 뚫으니 쌀 대신 피가 솟구치면서 돌바람이 불어 산적을 즉사시켰다는 것입니다.



기기암



기기암은 애장왕때 국사로 봉안된 정수(正秀)스님이 816년(헌덕왕 8)에 창건하였고
1546년에는 쾌선스님이 중건하여 안흥사(安興寺)라 하였으며 60여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합니다.
그 뒤 182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우로는 요사와 법당을 겸한 건물 1동이 있습니다.
선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되었습니다.

기기암은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이라하여
'몸은 비록 사바세계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안한 수행처이다. 현재 선방에는 비구스님들이 참선 정진 중이다.



묘봉암



묘봉암은 833년(흥덕왕 8)에 심지(心地)왕사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오랫동안 관음기도처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오다가
1485년(성종 16)에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중창하였고
1780년(정조 4)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최근에 6·25사변 당시 폐사된 것을 법운(法雲)스님께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관음기도와 신신기도처로 유명하고
과거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큰절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은해사 대중스님들이 모두 올라오셔서 산신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산령각 옆 석간수는 불치의 병도 낳게한다는 신비의 약수로 유명하다.

원통전은 과거 석굴에서 기도를 해왔던 곳으로 석굴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높이가 매우 높아 정사각형의 모양에 가까운데 이는 내부에 큰 돌이 뻗어 있어
그 아래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기도 하다.



서운암



서운암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전해지는 사찰 기록이 전혀 없다.
폐사로 남아 있었으나 6.25이후 중건하여 한 분의 스님이 거처하고 있었다.
산령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자그마한 전각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창호는 빗살문살로 짜여져 있다. 안에는 산신상(山神像)만을 봉안하고 있다.


산신은 민간신앙으로 호랑이의 변화신인 산신(山神)을 숭배하던 것을
불교에서 흡수한 경우이다.
산신각은 보통 산의 악귀를 누르기 위하여 가람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다.

정면 4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서운암의 스님들이 머무시는 요사이다.
정면 가운데 두 칸에는 곁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백련암



일제말 항일학생운동의 본거지이자
대구 능인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오산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자연석을 쌓아 축대를 만든 이후에 초석을 두어 기둥을 세운
정면 7칸에 팔작지붕을 올린 건물이며, 근래에 조성되었다.
처마 밑에는 2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백련암에는 현재 삼국유사와 일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에 따른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일연학연구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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