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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명정전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창현마을 2015. 1. 26. 00:03

 

 

 

창경궁 명정전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루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1층 건물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 위의 장식적인 짜임은 그 짜임새가 매우 견실하며,

그 형태가 힘차고 균형이 잡혀 있어 조선 전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왕이 앉는 의자 뒤로 해와 달, 5개의 봉우리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병풍을 설치하였다.

 

건물 계단 앞에는 신하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24개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명정전 남측의 문정전과 주변 행각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친 복원공사로 대부분 복원하였고,

일제 때 격하되었던 창경원의 명칭을 창경궁으로 환원하였다.

 

창경궁의 명정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지만,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명정전 건축적 함의 해부

 

창경궁 명정전은 사방이 행각과 월랑(月廊 : 행랑)으로 둘러 조정(朝庭)을 마련하고

마당에는 장방형으로 다듬은 판석(板石)을 깐 다음 한복판에 어도(御道)를 만들었다.

 

어도의 좌우에는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여 정전 외부공간에 위계적 질서를 부여하였다.

어도 끝에는 위아래 2층 월대(月臺)를 2.5m 높이로 쌓고 정면과 양 옆면에 각각 다른 모양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정면 계단의 너비는 약 5m이다. 이 월대 위 3.2m 안쪽에 나지막한 기단 1단을 쌓고 윗면만을 고르게 다듬은 다음

그 가운데에 원형 주좌(柱座)를 도드라지게 만든 주춧돌을 배열한 뒤 건물을 세웠다.

 

정면 5칸(18.03m), 측면 3칸(9.64m)에 뒤로 툇간(退間) 1칸을 내달아 평면을 구성하였는데,

 바깥두리기둥은 높이 14척(尺)인 평주(平柱)로 하고 내부에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만 고주(高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게 하였다.

 

세 번째 기둥을 모두 생략하여 보좌(寶座) 주위를 넓게 마련한 점과

건물 외부 뒤쪽에 퇴를 내달아 복도(複道)를 만든 점이

공간구성이라는 면에서 주목하여야 할 특징이다.

 

또, 입면구성이라는 점에서는 전체적으로 단아한 맛을 느끼게 하여 주는 간결한 짜임새,

알맞게 치켜올린 추녀의 곡선미,

가지런히 배열된 공포(栱包)의 엮음새 등이 주목되고

 

꽃살창호의 화려함, 정면과 측면 툇간의 창호 밑에 튀어나오게 쌓은 전돌의 무게감 등이 어우러져 뛰어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가구(架構)의 짜임새를 보면 기둥 윗몸에 평방(平枋)과 창방(昌枋) 등 수평 부재를 차례대로 엮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은 다음 포작수(包作數)가 안 7포(包), 밖 5포인 다포집을 짜올려 지붕을 받치고 있다.

 

지붕 위에는 마루를 높게 양성하고 용마루에는 취두(鷲頭),

합각 내림마루에는 용두(龍頭),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선인을 각각 배열하여

건물에 위엄을 더하는 한편 형태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내부의 보좌는 3면에 4단의 나무계단을 설치하고

둘레에 연꽃모양의 기둥을 장식한 난간을 둘러 세운 다음

가운데 뒤쪽에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상탑)을 놓고 그 뒤를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장식하였다.

 

보좌 위에는 화려한 짜임새의 포를 짜올려 만든 보개(寶蓋)를 얹고

보개 한복판에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나무조각을 붙여 왕의 자리임을 상징하게 하였다.

 

또, 천장의 짜임새를 보면 한복판에 감입천장(嵌入天障)을 마련하여 두 마리의 봉황과 구름을 새긴 조각을 매달아 놓았고,

이 둘레에 꽃무늬를 그린 정방형의 소란반자를 둘렀다.

 

바깥쪽으로는 한 단 낮게 소란반자를 두른 층단천장(層段天障)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견실하게 짠 공포를 장식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드러내어 천장의 일부를 구성하게 하였다.

 

 

 

 

 

 

 

 

 

 

 

 

 

 

 

 

 

    명정전의 건축적 특징과 의의 및 평가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등 궁궐의 정전이 거대한 규모의 중층건물인 데 비하여

창경궁명정전은 소규모의 단층건물이라는 점이 특징적 이다.

 

창경궁이 왕이 정치를 행하는 곳으로가 아니라 왕대비(王大妃)가 거주할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건물의 좌향(坐向)이 동쪽인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 안팎에 칠한 단청의 색채는 많이 퇴락하였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창경궁 명정전은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공포의 짜임새가 견실하고

쇠서의 곡선이 힘차고 예리한 점,

첨차(檐遮)에 풀무늬를 새긴 수법이 세련된 점,

주춧돌에서 공포까지의 지지체(支持體)와 그 위에 얹은 지붕의 균형이 잘 조화된 점 등에서

조선 전기의 건축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으로 인해 초창(初創) 당시인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 적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와 1963년 합각머리 안쪽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의 내용이 일치하여,

광해군 때 재건된 것임이 분명하여졌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의 정전(正殿) 중 가장 오래되고,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과 함께 단층으로 건축된 정전이며,

명정문과 그 좌우 행각·홍화문·창덕궁돈화문 등과 더불어

17세기 전기의 목조건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참고자료 : 문화재청 자료, 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