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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문화재를 찾아서 6 - 국보 제 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창현마을 2014. 12. 27. 13:39

 

 

 

국보급 문화재를 찾아서 6 

     - 국보 제 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중원 고구려비가 있는 입석마을에서 충주쪽으로 좀 내려가서 남한강상류에 또 하나의 댐을 막은 충주보조댐을 건너면 절터로 보이지도 안는 넓은 벌판에 흙으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특이한 7층 석탑이 있다.

언제 세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원형이 잘 보존된 이 탑은 예부터 중앙탑(中原塔) 이라고 불려지고 있다는데 그것은 이곳이 통일신라 때 나라의 중앙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웠다는 전설 때문이다.

 

이 탑은 충주 일대 중원문화의 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고장 사람들은  여기가 우리나라의 한복판이라는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탑의 조형양식이 신라 후기 것이라고 하니 강 저쪽에는 고구려비가 서 있고 이쪽에는 신라 탑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각축전을 벌려온 격전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유일한 칠층 석탑이며 높이도 14.5m로 가장 높다.  그러나 높이에 비해 너비가 좁아서 뾰족하고 가늘게 치솟은 느낌이 강하여 안정감보다 상승감이 두드러진 탑이다.

크고 긴 돌로 지대석(地臺石)을 이룬 위에 두 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탑을 올렸다.  두 층 기단의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은 모두 여러 장의 편편한 돌로 짜맞추어졌고 네 모서리와 그 사이 면에 각각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몸돌(塔身石)도 아래층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짜맞추어졌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구성하는 돌의 수가 줄고 간략하다.  네 모서리에는 기둥돌(隅柱)을 세우거나 기둥모양을 새겼고,  6층과 7층은 몸돌 자체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지붕돌(屋蓋石)은 경사가 밋밋하게 추녀가 수평으로 이어지다가 네 귀에서 가볍게 들렸다.  지붕돌 아래 옥개받침은 모두 5단씩이며 각층 지붕돌 윗면에 또 두 단의 굄돌을 얹어서 몸돌을 받도록 함으로서 구조상의 견고성과 조형미를 함께 추구 한 듯 하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을 이중으로 두었으며 그 위에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를 올렸다. 상륜부를 이중으로 만든 것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라고 하는데,  중간에 여러 번 보수는 되었겠지만 기나긴 세월 수 많은 풍상을 겪으면서 상륜부까지 온전히 보존돼 온 흔치 않은 탑이다.

 

이 탑은 1917년 무너질 위험에 처해서 전면적인 해체보수를 했고, 그때 6층 몸돌에서 기록서류와 유물들이 나와서 탑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었는데 유물들의 제작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 아니라 구리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 것이어서 고려시대에 탑을 열고 사리장치를 다시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 석탑 주변이 지금은 강가의 넓은 빈터로서 공원이 되어 있지만 주변에서 네모진 초석들과 많은 기와조각이 발견되었으며, 탑 바로 앞에 석등(石燈)의 하대석(下臺石)이 놓여있는 것으로 미루어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절 이름이나 창건시기 같은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이곳에서 나온 기와조각 중에 고구려 것이 있으며 근처에 고구려비가 있는 점을 들어 고구려 절이었으리라는 추측도 있고, 그전에 백제가 창건했다는 설,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 지은 절이라는 설 등이 있지만,  오직 확실한 것은 발견된 유물로 보아 고려 때까지 존속했던 절이라는 것 뿐이라고 한다. 

 

이 나라의 오랜 역사를 지켜 보면서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이 탑평리 칠층석탑은 국보 제 6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