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

창현마을 2007. 11. 2. 11:05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

 

 

 

 

- 감은사지 동탑 금동사리외함(金銅舍利外函)


 


(참고사진)

 


 

 

- 감은사지 서탑 사리외함(舍利外函)

 



상북도 월성군 감은사터에 있는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중 1996년 동쪽 석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감은사지 동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59호)는 1959년 발견된 '감은사지 서탑내 유물'(보물 제366호)인 사리기와 비슷한 구조로, 사리를 모신 내함과 방추형 뚜껑의 외함, 수정제 사리병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리기 외함의 4면에는 사천왕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좌우에는 귀면장식을 한 고리가 있습니다.

 


 

 

 

- 감은사지 동탑 금동사리내함

 

 

 

사리를 모셔 둔 내함은 기단부, 몸체, 천개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부의 네 모서리에는 별도로 만든 사자가 있으며, 기단면에는 코끼리눈 모양의 안상을 크게 투조하였는데, 그 안에는 신장상과 공양보살상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몸체는 사리를 넣어둔 복발형 용기를 중심으로 승상과 사천왕을 각 4구씩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외곽으로 난간을 돌리고 네 모서리에 대나무 마디 모양의 기둥을 세워 천개를 받치고 있습니다.

 

 


 

 

- 수정 사리함

 

 

수정으로 만든 사리병은 누금기법으로 장식된 뚜껑과 받침, 그리고 금동제 투조받침 등과 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 감은사지(感恩寺址)

 

 

감은사는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감은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습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습니다.

 

감은사(感恩寺)로 사명(寺名)을 고친 것은 대왕의 별세 후 앞바다에 장사지냈기에 대왕의 은혜를 감축(感祝)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정됩니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입니다.

 

그때 금당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이 금당은 감은사지 앞을 흐르는 대종천과 지하로 연결되어 있어 동해까지 이어진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는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이 물길을 따라 감은사로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된 전설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이 있습니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이 보낸 동해의 용이 감은사로 와서 신문왕에게 검은 옥대를 주어 왕이 이 옥대로 피리인 만파식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검은 옥대는 신문왕이 감은사에서 얻었다는 설과 이견대에서 얻었다는 두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 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감은사지 삼층석탑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동서 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습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의 현존하는 탑중에서 가장 큰 탑에 속합니니다. 이 탑은 고선사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글과 사진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져왔습니다.

 

 

 

 

 

출처 :이글루樂出虛님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