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10)
- 화성 행궁 1 ; 개요
화성행궁은 1789년 사도세자의 원침을 화산으로 옮긴 후 그곳에 있던 관아를 지금의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1790년 5월 7일 약 340여 칸의 관아를 완성하였는데,
정조가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 때 머물렀기 때문에 행궁의 기능도 겸하게 되었다.
행궁은 전란 때나, 지방의 능으로 참배할 때나 휴양을 할 때 임시로 머물던 궁궐을 말한다.
정조와 그 후대 왕들이 능행차 때마다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화성행궁에는 정당(正堂)인 봉수당(奉壽堂)을 비롯하여 침전인 장락당의 바깥문인 경룡관(景龍館), 행궁의 내당(內堂)인 복내당(福內堂), 평상시에 화성유수(華城留守)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거동할 때 신하를 접견하던 유여택(維與宅), 행사중 휴식을 취하던 노래당(老來堂), 활을 쏘던 정자 득중정(得中亭), 각종 행사용 건물인 낙남헌(洛南軒) 등의 주요 건물이 배치되었고
정문인 신풍루(新豊樓)를 비롯하여 좌익문(左翊門)·중양문(中陽門) 등의 문루가 있었다.
이외에도 공해로서 외정리소(外整理所), 비장청(裨將廳), 서리청(書吏廳), 집사청(執事廳), 남북군영(南北軍營) 등이 있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 부사가 사용하다가 왕이 행차할 때면 왕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화성행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1794년∼1796년 9 월 사이에 벌어진 화성축성 때 대대적인 증축이 이루어졌다. 특히 1795년 윤 2월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맞추어 주요 건물들이 완성되어, 화성 성역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합하여 576칸의 규모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자혜의원, 군청, 경찰서 등의 건물들이 들어서고, 이후 중심부에는 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행궁은 대부분 파괴되어 낙남헌만이 남게 되었다.
더구나 1980년대 후반에 수원의료원이 확장공사를 계획하여, 화성행궁은 그 자취마저 사라질 뻔했다. 당시 수원문화원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전개되어 도립병원이 이전하고, 행궁을 복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1989년에 이르러 화성행궁 복원추진회가 구성되고, 1991년 수원의료원이 이전을 하면서 화성행궁의 복원사업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93년 수원시는 화성행궁을 복원하기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였고 1996년 7월 19일 착공을 하여 2000년 현재에도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1795년 윤 2월에는 혜경궁의 회갑을 맞아 조선 후기 최대의 지방행사인 원행이 이루어졌다. 왕과 혜경궁은 가마로 노량진에서 출발하여 시흥을 지나 화성에 도착하는 긴 원행이 시작되었다.
이때 화성에서는 군사훈련을 실시하다가 행궁 앞마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어 회갑잔치, 양로연, 과거시험 등 다양한 공연예술과 행사가 치러졌다.
글출처 : 화성행궁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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