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수원 화성 (3) - 성문 2 ; 장안문

창현마을 2007. 3. 21. 17:44

 

 

 

 

  수원 화성 (3) 

 

              -  성문 2 ; 장안문

 

 

 

 

 

 

 

 

 

 

 

 

 

 

 

 

 

 

 

 

 

 

 

 

 

 

 

 

 

 

 

 

 

 

 

 

 

 

 

 

 

 

 

 

 

 

 

 

 

 

 

 

 

 

 

 

 

 

 

 

 

 

 

 

 

 

 

 

 

 

장안문은 화성華城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된다.

문의 이름이 장안문이니 문을 들어서면 장안이라는 뜻이겠다. 장안은 수도(首都)라는 뜻으로도 쓰였듯이 서울의 다른 일컬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옛 중국의 도성이었던 섬서성 장안현의 서북쪽 고을은 주周나라, 진秦나라, 전한前漢, 수隨, 당唐나라 들이 도읍하였던 곳이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이런 격조 높은 이름을 정문에다 걸었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수도인 한양에서 화성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서의 장안문은 이름에 걸맞게 그 위용이 자못 당당하다.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커다란 무지개 문을 만들었고, 왕의 가마가 지나갈 수 있는 충분한 너비와 일반 수레가 서로 비껴 갈 수 있을 만큼의 넓이를 확보하였다.

 

이는 서울의 숭례문(남대문)과 비슷한 크기와 너비로서, 숭례문이 장안문의 건설에 본보기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돌로 쌓은 석축과 무지개 문, 그리고 이층의 문루와 지붕의 생김새까지 비슷하지만, 옹성(甕城)이나 적대(敵臺) 등의 보완 시설에 있어서는 장안문이 훨씬 진보된 성문의 특징을 보인다.

 

이층 문루의 바깥쪽 판벽((板壁)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려놓아서 적군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더욱이 짐승 얼굴의 코에 해당하는 부분을 오려내어 총구로 삼았으니 공포감을 배가시키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겠다.

 

그리고 반대쪽인 안쪽 판벽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서 태극 사상으로 단결을 꾀하고자 했다. 장안문은 그 자체로도 견고한 시설물이지만 이에 덧붙여 옹성을 둘렀고, 문 좌우로 적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옹성은 성의 바깥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을 막는 기능도 있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이 성문을 쉽게 부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이 더 크다. 즉 적군들이 커다란 통나무로 성문을 들이쳐 부수고자 할 때 도움닫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옹성 위에 군사가 들어 있고 성문으로 통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옹성 안으로 적군이 들어오게 되면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옹성은 독(항아리)을 반으로 쪼갠 모습이고 항아리 옹자를 써서 옹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리고 옹성의 출입구는 한쪽에 치우치게 하여 띄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서울의 흥인지문(동대문)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반원형의 둥그런 옹성이 아니고 기역자처럼 한쪽이 터지게 직선으로 둘러쌓았어도 옹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장안문의 옹성 출입구는 성문과 일직선 상에 놓였다. 이전의 제도에서는 볼 수 없던 방법이다.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고, 적군들의 기세를 꺾어놓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즉, 다른 성문들의 예에서 보아왔던 옹성이 아니고 정문과 마주 대한 옹성의 문은 적군으로 하여금 성안에 강력한 군대가 있을 것이라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성문의 취약성을 옹성이 보완하고, 옹성 출입문의 취약성은 옹성문 위에 오성지를 둠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오성지는 적군들이 옹성문에 섶을 쌓아 불을 지를 경우 구유처럼 생긴 물통의 물을 다섯 개의 물구멍으로 흘려서 옹성문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본래 건설된 옹성의 문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후에 어떤 연유에서인지 문루가 지어졌다. 아마 오성지를 보호하고 망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 추가로 시설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옹성의 문루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어두운 곳에서 밝은 데를 바라보기 때문에 멀리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하지만 성 밖의 사람들은 옹성의 문루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길게 뻗은 처마가 문루의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감추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성 위에 있는 군사는 적군들이 옹성에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벽돌로 견고하게 쌓은 옹성은 그 형태도 아름다워서 적들의 넋을 빼앗고도 남음이 있고, 웬만한 폭격에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철옹성을 쌓고 지킨다 해도 불안감은 남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화성의 건축가들은 장안문의 좌우에 적대를 길게 돌출 시켜 건설하고 적대 전면에 현안 셋을 설치했다. 현안은 일종의 총구인데 적대 바로 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긴 현안 셋은 적대의 가운데에 짙은 그림자를 남겨 세 개의 세로줄이 그어지게 한다.

 

이는 시각적으로 화성과 장안문 등이 견고하다는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하니 안심이 된다. 장안문은 옹성이 지키고, 옹성은 좌우에 있는 적대가 지키고, 옹성의 문은 오성지가 지키게 되었으니 장안문은 삼중 사중의 견고한 시설물이 되었다. 이것들은 임진왜란 이후 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학자들이 주장한 바를 실천에 옮긴 결과이며, 특히 실학파 학자들의 적극적인 제안이 많은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거중기는 장안문과 같은 대형 무지개 문의 화강석들을 들어올릴 때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실학파 학자들을 중용해서 화성을 건설하였으니 공사의 효율성이 높았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장안문은 그 기초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하다. 남북으로 스물 두 보, 동서로 마흔 일곱 보를 열 척 일곱촌 깊이로 파내고 입사기초를 하였다. 모래와 진흙에다 물을 섞어 다지면서 시루떡 앉히듯이 켜켜로 쌓아 올라왔던 것이다.

 

이런 엄정한 기초가 있었기에 무겁디 무거운 화강석과 이층 문루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도시화 되면서 늘어난 자동차의 물결이 남기고 가는 충격까지도 굳건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안문 옆을 지나는 자동차의 중량 제한이나 속도의 제한 등이 없어서인지 오늘날의 장안문은 몸살을 앓고 있다. 무지개 문 양쪽의 커다란 화강석들이 부분적으로 이탈 현상을 보이는가 하면, 가끔씩이지만 기왓장이 떨어진 흔적들도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검토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장안문은 이백 년이 넘게 사람들과 함께 했다. 조선의 문화 절정기에 태어나서 조선의 몰락을 말없이 지켜봤으며 일제 강점기의 울분도 보았고, 민족의 대 전란인 육이오 때는 그 자신이 폭격을 맞아서 심하게 부서지기도 했다.

그러나 화성성역의궤라는 완벽한 공사 보고서가 있기에 칠십년대 중반기에 복원되는 영광도 누렸다. 또한 장안문은 화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어떤 영험함이 있어서인지 전통 신앙의 발자취도 느낄 수 있는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옹성이 있는 반대쪽, 그러니까 성문의 안쪽 왼편 아래 기단석에서는 성혈(性穴)을 볼 수 있다.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 혹은 그 어머니의 어머니 들이 정성 들여 빌어대던 그 흔적들이 너무나도 선명히 남아 있는 것이다.

 

삼신할머니에게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빌어대던 절박한 어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성이 성으로서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이렇듯 민중들의 소박한 신앙의 대상으로서도 자리잡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