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운문사 (7) - 운문사의 문화재들

창현마을 2007. 1. 11. 16:50

 

 

운문사  (7)  -  운문사의 문화재들

 

 

 

    1,  운문사금당앞석등 (雲門寺金堂앞石燈)  ;  보물 제193호

 

 

 

 

 

운문사 금당 앞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바닥돌과 하나로 이루어진 아래받침돌에는 여덟 장의 잎을 새긴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가운데기둥에는 아무런 꾸밈이 없으며, 윗받침돌에는 각 면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다.

 

화사석에는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경쾌한 모습이며, 꼭대기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각 부분이 잘 균형을 이룬 우아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세워진 8각 석등이다.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돌로 되었는데 하대석에는 여덟 잎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그 위에 8각의 간주석(竿柱石)이 알맞은 높이로 서 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다.

8각의 화사석(火舍石)에는 네 곳에 화창(火窓)이 있으며 옥개석(屋蓋石) 꼭대기에는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석등의 높이는 2.58m이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2, 운문사동호(雲門寺銅壺)   ;  보물 제208호

 

 

 

 

이 항아리는 전체가 흑색을 띠고 있으며 무엇에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감로준(甘露樽)이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 용기의 하나로 추측된다.

높이 55㎝, 아가리 지름 19.5㎝, 몸지름 31㎝로 뚜껑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표현하였고 위로 6장의 연꽃잎과 十자형으로 된 불꽃 모양이 있는 높은 손잡이가 달려있다.

어깨는 넓고 밑에 굽이 달린 항아리로 몸체의 좌우에는 손잡이 구실을 하는 굵은 고리가 달려 있다. 몸의 높이 33.5㎝에 비해 뚜껑 높이가 24㎝로 매우 높은 비율을 보이며, 특이한 뚜껑 손잡이 형태가 주목된다. 특히 뚜껑 손잡이의 불꽃 모양은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에 걸쳐 만든, 스님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의 머리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과의 연관성이 짐작된다.

어깨 부분에 제작시기와 관련된 글이 쓰여 있는데 고려 문종 21년(1067)에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제작연대는 이보다 앞선 신라 말이나 고려 초가 아닌가 추정된다.

 

 

 

 

 

 

 

 

    3,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鷹國師碑)   ;  보물 제316호

 

 

 

 

운문사에 있는 이 탑비는 고려시대 중기의 승려 원응국사(1051∼1144)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원응국사는 일찍 출가하여 송나라에 가서 화엄의 뜻을 전하고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워 귀국하였다.

1109년 선사(禪師)가 되었고, 인종 22년(1144) 운문사에서 93세로 입적하였다.

비는 비받침, 비몸, 머릿돌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받침돌과 머릿돌이 없어진 상태이다.

다만 세 쪽으로 잘린 비몸만 복원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그의 행적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비가 깨어져 알 수 없으나, 국사가 입적한 다음해에 인종이 국사로 명하고, 윤언이에게 글을 짓게 하였다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1145년 이후로 짐작된다.

이 비는 이수(이首)와 귀부(龜跌)는 없어졌고, 세쪽으로 절단된 비신(碑身)만 복원한 것이다.

비신은 높이 2.3m, 폭 0.9m인데 비문(碑文)은 원응국사(圓應國師)(1051∼1144)가 운문사(雲門寺)를 중창(重創)한 업적과 그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왕명(王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문은 윤언이(尹彦)가 지었다.

 

 

 

 

    4,  운문사석조여래좌상(雲門寺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317호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불상높이 63㎝. 대좌높이 41㎝. 광배높이 92㎝.

 

특이한 3중 6각형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으로, 상(像) 앞면에 흙을 두껍게 바르고 종이를 입힌 위에 호분(胡粉)이 두껍게 입혀져 있어 세부 기법을 알아보기 힘들다.

 

뒷면의 흔적을 통해서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평판적인 사각형이고, 어깨는 약해지고 가슴은 밋밋하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손이 어색하여, 전체적인 양감이 사라진 불상이다.

 

광배(光背)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이지만 투박한 느낌을 주며 두광(頭光) 안의 중심에도 연화무늬[蓮華文(연화문)]가 있을 뿐 두(頭)·신광(身光)의 전면에 아무런 문양이 없고, 외연부(外緣部)의 화염무늬[火焰文(화염문)]도 형식화되었다.

 

대좌(臺座)의 상대(上臺)는 평면타원형이며, 연화무늬가 앙련(仰蓮)으로 조각되었고, 그 아래에는 당초무늬[唐草文(당초문)]가 있다. 중대(中臺)는 6각형으로 하대(下臺)와 1개의 돌로 되었으며, 하대에는 연화무늬 18엽이 조각되었다

 

 

 

 

 

 

 

    5,   운문사사천왕석주(雲門寺四天王石柱)   ;   보물 제318호

 

 

 

 

사천왕석주는 운문사 작압전(鵲鴨殿)안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의 좌우에 각각 2기씩 모두 4개가 돌기둥처럼 배치되어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아니고, 이곳에 세워진 벽돌탑의 1층 탑신 몸돌 4면에 모셔져 있던 것으로 보인다.

모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으며, 머리 뒷쪽으로 둥근 광채를 띤 채 악귀를 발로 밟고 있다.

사천왕은 부처를 모시는 단의 사방을 지키기 위해 두는 방위신(方位神)의 성격을 띠는데, 동쪽이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이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이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이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이 4개의 사천왕상 돌기둥은 신체가 큰 반면, 돋을새김을 뚜렷하게 하지 않아 양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체구도 약해보이고 얼굴 생김새도 부드러운 것으로 보아 시대가 내려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880년에 만들어진 보조선사탑(普照禪師塔) 사천왕상이나 철감선사탑(澈鑑禪師塔) 사천왕상과 비슷하지만, 보다 크고 띠주름도 굵어지는 등 형식화된 면이 있어서 8세기 석굴암의 사천왕상과 비교하여 시대적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후삼국시대인 900년경을 전후해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사천왕석주( 四天王石柱 )는 지금 석불좌상( 石佛坐像 )(보물 제317호) 좌·우( 左·右 )에 배치되어 있으나, 원래는 이곳에 세워진 전탑( 塼塔 )의 탑신( 塔身 ) 4면이나 혹은 안 벽면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고저( 三고杵 )를 든 증장천왕( 增長天王 ), 탑( 塔 )을 든 다문천왕( 多聞天王 ), 불꽃을 든 목광천왕( 目廣天王 ), 칼을 든 지국천왕( 持國天王 )은 천의( 天衣 )자락이 휘날리는 갑옷을 입고 악귀( 惡鬼 )를 밟고 선 자세이다.

이들의 신체는 장대( 長大 )하지만 운동감( 運動感 )이 줄어든 섬약한 체구, 갑옷의 굵은 띠주름 등은 신라( 新羅 ) 헌강왕( 憲康王 ) 6년(880)에 조성된 보림사( 寶林寺 ) 보조선사창성탑( 普照禪師彰聖塔 )(보물 제157호)이나 쌍봉사( 雙峰寺 ) 철감선사탑( 澈鑒禪師塔 )(보물 제57호)의 사천왕상과 비교되어 석불좌상과 함께 신라말 또는 후삼국시대( 後三國時代 )인 900년경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6,  운문사삼층석탑(雲門寺三層石塔)   ;  보물 제678호

 

 

 

 

 

높이 5.4 m. 대웅보전 앞에 배치된 쌍탑으로 기단부가 파손된 것을 수리하였다고 하며, 2중기단 위에 3층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형식으로 상륜부의 노반과 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 구비되어 있다.

 

기단부에는 탱주(撑柱)와 우주(隅柱)가 있고 면석(面石)에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양각하였는데 모두 앉아 있는 자세로 머리 부분을 크게 묘사하였으며 조각수법은 형식적이다.

 

대웅전 앞에 쌍탑을 건립한 것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 배와 같다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하여 양쪽에 탑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7,  대웅보전 ( 비로전 )  ;  보물 제835호

 

 

 

 

 보물 제835호.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양식(多包樣式) 팔작지붕.  운문사는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하였으나 현재의 대웅보전 건물은 임진왜란 후인 17세기에 중건한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8,  천연기념물 180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처진 소나무는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매우 희귀하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앞뜰에서 자라고 있으며 높이는 6m, 둘레는 2.9m이다. 나무의 모습이 낮게 옆으로 퍼지는 모습 때문에 한때 반송(盤松:키가 작고 밑동부터 가지가 옆으로 퍼지는 소나무)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이 나무는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처진 소나무로 본다.

 

 운문사는 1,400년 전에 지었다고 하고 임진왜란(1592) 때 이 나무는 상당히 컸었다하니 나무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오래된 나무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처진 소나무는 고승(古僧)이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스님들은 매년 봄·가을에 뿌리 둘레에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려주는 등 정성을 다하여 가꾸고 있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답고, 전형적인 처진 소나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며,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운문사 雲門寺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원광서학(圓光西學) 및 보양이목조(寶壤梨木條)에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관련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적기 寺蹟記〉에 따르면 고려시대인 937년(태조 20) 중국 당(唐)나라에서 법을 전수받고 돌아온 보양국사(寶壤國師)가 까치떼의 도움으로 이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했으나, 943년 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보양국사가 절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많은 전답과 함께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105년(숙종 10)에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한 이후로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690년(숙종 16) 설송(雪松)이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절을 다시 중건하여 어느 정도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이 절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경내에는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만세루(萬歲樓)를 비롯하여 대웅보전(보물 제835호)·미륵전·작압전(鵲鴨殿)·금당·강당·관음전·명부전·오백나한전 등 조선시대의 많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당앞석등(보물 제193호)·동호(보물 제208호)·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사천왕석주(보물 제318호)·3층석탑(보물 제678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