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신륵사 (3)

창현마을 2006. 12. 2. 14:26

 

신륵사 (3)

 

 

남한강 한줄기가 휘어청 굽어 맴도는 언저리에 넓지도 좁지도 않은 돌 절벽위 공간은 누가 보아도 분명한 명당.
 
그 터에 자리한 신륵사(神勒寺)는 뒤로 아담한 봉미산을, 아래로는 창랑이 여일한 여강을 굽어본다.
 
송뢰(松策)의 삽상함에다 속기를 날릴 청풍이 늘 소슬하니, 이곳에 선 자는 금세 선경의 흥취에 빠지고 만다.

화신의 발걸음이 올 따라 조금은 늦어 보이더니 3월 중순인데도 아직 봄기운에 취할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서울을 벗어나 창 밖에 펼쳐지는 풍광을 대하자 어디선가 해동하는 초목의 수액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때가 되었으니 대지 밖으로, 창공 밖으로 머리 내밀고 싶다며 칭얼대는 나무와 풀들의 투정소리일까.
 
 하지만 어찌 더 이상 뒤로 미룰까. 봄은 바로 곁에 와 있는 것이다. 며칠만 지나면 초목들은 움을 틔우고 몸 밖으로 싹을 드러내며 긴 겨울과의 결별을 선언할 터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있는 동안 늘 푸른 송림에 둘러싸인 신륵사 앞에 떨궈졌고 싸한 송진내가 곧 코 끝에 스며들면서 초봄의 노곤함이 싹 가셨다. 신륵사는 예전의 신륵사가 아니었다. 지나오며 신륵사 관광단지라는 간판을 유심히 보았거니와 초입부터 전에 보았던 경치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경내에서 제법 먼 거리에 널찍하게 주차장이 마련되었고 그 곁으로 숙박업소, 식당, 기념품점을 모아놓아 절인지 저자인지 구분키 어려웠던 과거의 왁자하던 풍경이 사라져 다행이었다.

멀찌감치 나와 내방객을 맞는 것은 키 크고 우람한 덩치의 일주문이다. 넓은 마당에 주위를 압도하며 홀로 치솟아 마치 개선문이라도 보는 듯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갸우뚱하다가 종로 조계사 해탈문과 빼닮았다는 것을 안다.
 
 
턱없이 넓게 보이는 마당에 휑덩그레한 그 어색함을 덜고 맨땅의 거치름을 가려줄 요량을 댔는지, 새삼스레 잣나무들이 사방에 심어져 있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한 전경
하지만 일주문과 주위경관이 따로 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역부족이다.
 
어떻게 주위와의 고려도 없이 이토록 무심하게 큰 건물만 고집했을까. 경내에서는 다시 그런 부조화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산만할 정도로 부속건물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는 인상과 달리 뜯어볼수록 가람배치는 찬찬한 배려의 산물임이 밝혀졌다.
 
맨아래로부터 보면, 종각, 명부전, 구룡루가 있고 중간에는 적묵당, 극락보전, 심검당, 봉향각이 있으며 뒤편으로 조사당, 극락보전이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한 치수 높은 언덕바지로 다층전탑이며 3층석탑, 강월헌이 서 있는데 이쪽은 강과 바투한 암벽이라 입구 쪽에서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데가 있다. 여강의 절경이 좋아 굳이 위태로운 암반에 세운 강월헌. 옛 정자는 ’77년 수해로 유실된 뒤 시멘트로 새로 지어 고풍은 덜하지만 그 위에서의 전망은 여전히 빼어났다.

신륵사의 가람배치는 전체적으로 큰 건물 대신 작은 건물 위주로 오밀조밀하게 이루어져 있는 편이다. 특히 극락보전은 절의 역사에 비해서도 오히려 작은 편이다. 앞마당의 대리석으로 기단이 정교하게 조각된 다층석탑도 그에 어울릴 정도로 자그마하다.

이제 막 지은 적묵당조차도 주변과의 어울림을 생각해서인지 튼실한 돌기단과 달리 건물 몸체는 작고 야무지게 지어 놓았다. 이것말고도 근래 지은 소각장이며 굴뚝 따위도 전통미를 응용해 예스러움을 남기도록 애써 지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 절만큼 고승대덕과의 인연이 남다른 데도 드물다. 특히 나옹 화상을 빼놓고 이 절을 이야기할 순 없다. 대사가 1376년 밀양 영원사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했거니와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길길이 날뛸 때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제압한 장본인이 바로 대사였다고 지목하는 전설도 있다.

가람배치상 정중앙을 차지하는 조사당에는 지공·나옹·무학, 3 조사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어 고려말 이후 융성한 내력을 가늠하게 한다. 거기다 여말 대유자인 이색과의 인연 또한 각별하다.
 
그가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에서 보제가 강월헌(江月軒)에 거처했다고 증언해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사람간의 막역한 교유가 유추된다.
 
각각 유불(儒佛)의 큰 인물들로 강건너 찾아온 이색, 그리고 그를 맞은 나옹과 함께 선담을 나누고 혹은 강월헌에 올라 풍월을 읊조리는 풍경을 떠올려 본다. 이색의 다음 시는 그런 편린이라고 보면 어떨지.
 
보제존자석종(보물 제 228호), 석종비(보물 제 229호), 석등(보물 제 231호)
 
먼 산은 긴 강이요 /
 성긴 소나무는 푸른 돌 곁이로세 / 절은 복 받은 땅에 열렸고/
보제는 진당(眞堂)에 열렸다네 /
 
현령은 허리에 홀(笏)을 꽂고 거듭 경배하는데 /
산승은 홀로 면벽하고 있네 /
들 배를 불러서 깨끗하고 맑은 휘파람으로 /
 넓고 아득한 강물에 띄울 것인가.

고려말의 역사는 회암사가 불교 폐단의 산 상징으로 지목되면서 나옹 대사가 밀양 영원사(靈源寺)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전한다.
 
떠나는 대사에게 관리가 열반문을 지나도록 강요하자 “힘쓰라, 나로 인해 중단하지 말라.
 
내 길은 마땅히 여흥에서 그칠 것”이란 예언을 남겼고 이 말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즉 7일 만에 배편으로 신륵사에 당도한 나옹은 곧 “나는 의당 갈 것이다”는 말과 함께 진시(辰時)에 눈을 감았다는 것인데 뒤편 숲속에 보물로 지정된 보제 존자의 석종, 석종비, 석등은 대사의 자취를 더 짙게 각인시켜 준다.
 

 
다층석탑(보물 제 225호)             다층전탑(보물 제 226호)
 
 
오른쪽 언덕 대장각기비는 이 절에 불사를 마다하지 않은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의 돈독한 불심을 새삼 상기시킨다. 사실 이 절에 대장경 봉안을 주장한 이는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이었다.
 
한때 강 건너 가정리로 유배왔던 그가 자주 이 절에 들렀고 뒷날 그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이색이 대장경 봉안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벽절이란 명칭을 낳게 한 다층전탑(多層塼塔)에 대해서는 특별한 내력담을 구할 수 없다.

혹 영겁을 흐르며 탑을 비춰주고 있는 저 강물이나 이를 알까. 파란 강물 위에 청둥오리 몇 마리 날아들어 무심히 헤엄치고 그 뒤로 넓게 물살이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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