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신륵사

창현마을 2006. 11. 30. 16:01

 

  신륵사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282번지

 

 

 

 

 

 

 

 

 

 

 

 

 

 

 

 

 

 

 

 

 

 

 

 

 

 

 

 

 

 

 

 

 

 

 

 

 

 

 

 

 

 

 

 

 

 

 

 

 

 

 

 

 

 

 

 

 

 

 

 

 

 

 

 

 

 

 

 

 

 

 

 

 

 

 

 

 

 

 

 

 

 

 

 

 

 

 

 

 

 

 

 

 창건과 사찰명의 유래 

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선 초기 학승學僧인 신미 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 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 樂土 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 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 驪江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 普濟尊者 나옹화상 懶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 金炳翼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 儒學者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 牧隱 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
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 英陵 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수 있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가지를 들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일컬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나옹화상과 신륵사

나옹선사가 일찍이 신륵사에 머물렀고,  훗날 다시 이곳에서 입적하므로써 신륵사의 사세가 확장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1376년 양주 회암사 檜岩寺  중창 낙성식에 너무 많은 신도가   왕래하여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나옹에게 명을내려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때 몸이 병든 나옹이 여주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入寂 하게 되니,그의문도들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하고 석종 石鐘 부도를 조성하여 나옹스님의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신륵사는 이를 계기로 대전大殿, 조당祖堂,승당僧堂, 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廊,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크게 중수重修되어 대사 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와같은 사세를 기반으로 신륵사는 고려불교를 개혁하고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장경 봉안

나옹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82년(고려 우왕 8년) 이색은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신륵사에 2층으로 된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1부를 봉안하였다.

 

이듬해 이숭인(이숭인, 1349-1392)이지은 <신륵사대장각비 神勒寺大藏閣碑> 비문에 의하면 목은 이색의 부친 가정 稼亭 이곡 李穀이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 한 벌을 인출해 내기를 서원하였는데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타계하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총尙聰대선사가 목은에게 이 뜻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에 목은 이색의 주선으로, 부친 이곡이 서원을 세운지 30년 만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 봉인을추진함으로써 이곡의 서원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대장경 불사에는 각처에 산재해 있던 나옹의 문도들과 국가 원로 중신 및 권문세가들의 호응을 받아, 바로 나옹화상의 열반처인 신륵사에 대장각을 지어 봉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륵사 대장경 불사의 규모와 내용을 보면 어느 한 개인의 발원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나 왕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를 거행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 신륵사는 이미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도량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에 올라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영릉英陵의 원찰願刹

고려말 나옹스님이 입적한 이후 사세가 확장되었던 신륵사 는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시대가 되면 서, 태종의 (1401년)에 의해 소장하고 있던 대장경을 일본에 보내야하는 등 배불정책으로 인해 사세 寺勢가 위축되었다.

 

세종 22년(1440년) 태종의 장인이었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화상畵像 을 봉안하기 위해 중수된 신륵사는 7년 후 영릉英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되면서 다시 한번 큰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는 풍수지리상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예종睿宗 원년(1469)에 서울 강남구 태모산 아래 태종의 헌릉 곁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게 하였다.

 

이에 세조의 유지를 받들어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당세 권신權臣인 한명회와 한계희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천년 고찰이라 알려진 신륵사를 택하여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신륵사 내 옛 건물을 중수하기도 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여 2백여 칸의 대가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중심 전각을 극락보전으로 바꾼 뒤 사찰명을 보은사報恩寺라 하고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로부터 절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여주는 부에서 주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종顯宗 12년(1671년), 이조판서이던 김수항金壽恒과 이조참판 민정중閔鼎重, 호조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중심이 되어 임진, 병자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신륵사를 중창하고, 그 후부터는 다시 옛 이름을 찾아 신륵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숙종肅宗 28년(1702)에는 오대산의 위학偉學, 천심天心, 우안宇眼 스님등이 시주하여 절을 중수하였으며 영조英祖 원년(1725)에는 법밀法密, 영순英淳 스님등이 전탑을 중수하였다.

 

그후로도 신륵사는 정조正祖20년(1796)에 공명승첩空名勝捷을 받아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으며, 철종哲宗9년(1858)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장불전藏佛殿, 선료禪療, 종루鐘樓, 향주香廚를 중수한 후 그 내용을 신륵사 중수기에 기록하였다.

 

 

 

 

륵사는 1858년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에게 명하여 절을 크게 중수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영릉의 원찰로서 의미가 약해지면서 다시 신륵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근.현대사에 있어 신륵사의 활동은 크게 알려지지 않으나, 1925년 열반당 14칸을 새로 짓고, 1929년 강성인 姜性仁스님이 주지 재임시 김인주 金仁柱가 화주化主로 명부전을 중건하였다.


신륵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 편입된 것은 1955년부터이다. 1962년 통합종단 발족이후 지금까지 주지로 재임하신 스님은 다음과 같다.

 

1대 원종스님(62.10.11), 2대 성호스님(67.3.3), 3.4.5대 정대스님(70.9.21), 6대 성주스님(81.4.11), 7대 정대스님(81.7.27), 8대 정무스님(83.6.2), 9.10대 원경스님(87.6.4), 11.12대 세영스님(95.6.8)

 

정대正大스님은 1978년 종각을 신축하는 한편, 극락보전과 구룡루, 조사당등의 전각을 중수. 단청하였다. 정무스님은 요사체인 심검당을 건립하였고, 중.고등학교 학생법회를 신설하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지역 포교 활동에 힘을 쏟았다.

 

원경스님은 일주문을 건립(1994)하고, 신륵사 앞 강변을 매립하여 도량을 확정하였다. 현재 주지인 세영스님은 적묵당을 증.개축하였고, 명부전을 비롯한 종각, 비각, 조사당 등의 건물을 보수하고 구룡루 앞을 정비하여 석축을 쌓는 등 그 면모를 일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의 고장인 여주에 자리잡고 있는 신륵사는 지역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을 위한 문화와 역사의 교육장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을 위한 포교와 복지 활동에 중점을 두어 1998년 개원한 신륵사 부설 연꽃어린이집은 여주 관내의 어린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정무스님 주지 재임시부터 관심있게 추진해 온 청소년 신행활동은 현재 중고등학교학생법회가 부활되어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매년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운영하여 많은 인원이 참석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매년 여주교육청과 함께 나옹스님을 기념하는 의미의 나옹백일장을 개최하여 여주 지역 초.중.고등학교학생 500여명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장이 되고 있다. 또한 여주지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 중 교육청에서 추천받은 가정환경이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써 지역의 어려움을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렇듯 신륵사에서 추진하고 있는 지역 포교활동과 문화활동은 이전처럼 사찰이 관광지로서의 역할등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 매김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