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권 들고 떠나볼만한 문학관 3곳 | ||||||||||||
무릇 모든 여행은 문화적 행위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장 문학적인 행위이다. 그 길에 얽힌 문학적 배경을 읽을 수 있을 때, 그 길을 가는 이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각 지역에 들어서고 있는 문학관의 역할은 자못 소중하다. 비록 화려한 볼거리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지역 출신 작가의 삶을 통해서거나, 그 지역을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을 통해서 가장 정서적으로 그 지역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깊어가는 가을날 시집 한 권 들고 떠나볼 만한 문학관 3곳을 소개한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성문〉
백두대간의 허리쯤인 미시령과 진부령을 분수령으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물과, 내설악 백담계곡에서 소리치며 달려나온 물은 강원 인제군 북면에서 만난다. 그들이 부둥켜안고 북한강으로 떠나는 북천면 8,000여평의 적송 숲 풍광 속에 2003년 가을 2,000여평 규모의 만해마을이 개당되었다. 만해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내설악 백담사로 가는 길목이다. 만해 한용운이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곳이 백담사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님의 침묵’을 탈고하였던 곳도 백담사였으니, 그곳에 그 ‘정신의 집’을 지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백담사 만해마을은 한국문학사의 불멸의 시인이자 진보적 사상가, 불교의 대선사, 민족운동가로 일제강점기 암흑시대에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족혼을 불어넣어 주었던 만해 한용운의 자유사상, 민족사상, 진보사상을 높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실천의 도량으로 설립되었다.
만해의 저서와 유품·친필, 주제·연대별로 본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는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을 위한 창작집필 및 휴식공간으로 쓰이는 ‘문인의 집’,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자연과 인간 사랑을 실천하는 ‘만해학교’, 불교개혁사상과 무소유정신을 구현하는 법당인 ‘서원보전’, 조선총독부가 있는 남쪽을 등지고 조선독립의 날까지 절조를 지키며 말년을 보냈던 성북동 심우장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심우장’, 북천을 따라 거닐며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님의 침묵 산책로’ 등 만해마을을 이룬 깊이와 무량함은 한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생전에 시인은 ‘나의 시는 태안사에서 비롯되었고 태안사에서 끝이 난다’고 했다. 1941년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난 조태일은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후, 여순반란사건의 와중에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광주로 이거해야 했던 아버지가 남긴 유훈(정확한 까닭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그에게 30년이 지난 후에나 태안사를 찾으라고 했다)에 따라 꼭 30년 만에 친구 박석무와 함께 고향을 찾았던 시인은, 또 한 30년이 지난 후쯤 세상을 버렸으나 2003년 그가 태어난 태안사 기슭에 마침내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이 건립되었으니, 이로써 그의 예견처럼 그럴듯하게 마무리된 셈이다.
동리산 태안사 들머리에 위치한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민족시인 조태일의 문학세계를 기리고 예비문학도들의 창작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건립되었다. 조태일시문학기념관은 시인의 시세계와 그대로 닮아있다. ‘목구조로 구축된 40m나 되는 길고 통큰 기념관은 동서축으로 드러누워 있는데, 서쪽 끝은 땅속(국토)을 향하여 대지에 뿌리내리고 동쪽 끝은 몸을 들어 땅위(삶)를 굽어보는 형상’으로, 시대적 억압을 뚫고나오는 민중의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건축가 이윤하의 설계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제1회 대한민국 목조건축대전에서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경북 안동 도산면의 낙동강 변에는 ‘퇴계 예던(가던) 길’이 있다. 이 길은 퇴계 이황이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을 오가던 옛길로, 도산면 단천리에서 가송리 농암 이현보 종택까지 이어지는 3㎞가량의 오솔길이다. 퇴계는 이 길을 산책하면서 사색과 시심을 즐겼다. 고인도 날 못 뵈고 나도 고인 못 뵈/고인을 못 뵈어도 예던 길 앞에 있네/예던 길 앞에 있거니 아니 예고 어이리 -이황 <도산십이곡> 중 제9곡 도산서원에서 퇴계 예던 길로 넘어가는 길목인 원천리 불미골이 바로 저항시인 이육사가 태어난 곳으로, 최근 이육사문학관이 들어선 곳이기도 하다. 꼿꼿하기로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인연이 얼핏 기이할 법도 한데, 기실 그 인연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이육사가 바로 퇴계의 14대손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육사 역시 선조가 걷던 길을 무시로 걸으며 시심을 키우고 선비정신을 익혔으리라.
1904년에 태어나 1944년 민족해방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북경의 차디찬 감방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오로지 시와 독립운동이라는 치열한 저항의 길을 걸어갔다. 첫 수감시 수번이었다는 ‘264’는 그의 저항의 상징이자 시세계를 암시하는 기호였다. 그래서 우리가 2,300평의 터에 건평 176평, 지상 2층 규모의 이육사문학관에서 보고 읽어야 할 것도 그의 문학세계보다 더 크고 또렷한 ‘264’의 정신인 것이다.
이육사문학관을 찾아가는 길은 퇴계 이황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도산서원이야 새삼 이를 바도 없고, 퇴계가 태어난 퇴계태실, 그가 살았던 퇴계종택 및 하계동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도산면 일대의 2~3㎞ 거리 안에 퇴계의 온 생애가 스며있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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