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서 훌쩍 떠나는 테마여정

‘봉평’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창현마을 2006. 9. 19. 01:17

 

 

 

‘봉평’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강원도 봉평 ‘메밀꽃 여행’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꼭 한 번 밤에 보고 싶었다.

 

국어 시간에 이 유명한 문장에 밑줄 굵게 그으면서, ‘심미주의…인간 본능’ 등등 작품 해설을 받아 적으면서 막연하게 상상하고 떠올리던 풍경.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1907~1942)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남긴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봉평장에서 대화장까지 팔십리 길을 당나귀 타고 가던 장돌뱅이 허생원의 눈 앞에 펼쳐졌던 신비로운 하얀 꽃밭.“이지러지기는 했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허생원이 일생일대의 물레방앗간 로맨스를 만들어낸 달밤, 함께 길 가던 장돌뱅이 청년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그 달밤을 상상하며 온통 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을 메밀꽃밭을 찾아 봉평으로 떠났다.

 

지난 1일 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평창 무이예술관’ 옆 메밀꽃밭. 아쉽게도 반달이다. ‘짐승 같은 숨소리’와 ‘푸르게 젖은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를 만들어내기에는 달빛이 흐리다.

 

또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 전조등, 드문드문 인가의 불빛이 그나마 약한 달빛을 방해한다. 인공 조명을 몽땅 꺼 버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도 한밤중에 찾아간 메밀꽃밭은 매혹적이다. 살짝 빛을 비추니 한낮에는 그토록 잔잔하고 조용했던 꽃이 탱글탱글 화려하게 살아난다.

 

폐교를 개조한 ‘무이예술관’에서 메밀꽃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는 화가 정연서(52)씨는 “보름달 아래 메밀꽃밭을 보면… 아, 정말 반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그때 보면 정말 하얗게 눈이 온 것 같아요.” 아들 정원교(25)씨의 말.

 

보름이었다면, 하고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록 반달이지만, 도시에서 보던 흐리멍텅한 달이 아니다. 누군가 정성껏 닦아놓은 듯 반질반질 윤이 난다. 밤 공기는 달다. 블루 블랙의 바탕 위에 펼쳐진 흰 꽃밭. 봉평의 밤은 아름다웠다.

 

소설 속에 나오는 메밀꽃밭을 보려면 9월8~17일 열리는 ‘평창효석문화제’ 기간에 봉평을 찾으면 된다.

 

지난 2일 현재, 봉평 곳곳이 메밀꽃밭 때문에 파우더 솔솔 뿌려놓은 듯, 눈이 내린 듯 하얀 색이었다. 그러나 축제의 주 무대인 ‘효석문화마을’에 위치한 대규모 메밀밭에는 아직 꽃이 제대로 피지 않았다.

 

사무국은 “9월8일이나 9일이면 만개할 것 같다”라며 “꽃이 20일까지는 피어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사람. 지난해에만 무려 57만여명이 다녀갔다는 유명한 축제라 행사 기간 중에는 사람 구경, 차 구경만 하다 올 지 모른다.

 

 

 

소설 속으로 추억 속으로… 봉평 효석문화마을
 

달빛 아래 메밀밭 못지 않게 이른 아침 안개에 잠긴 메밀밭도 신비롭다. 메밀꽃 생김새는 꽃을 잘 모르는 도시 사람 보기에 꼭 안개꽃을 닮았는데, 그 위로 희뿌연 안개가 깔리면 더욱 몽환적이다. 해가 나오는 순간, 꽃에 맺혔던 이슬 방울이 반짝이는 풍경도 장관이다.

 

한낮의 메밀꽃밭은 폭신폭신 부드럽게 부풀어 오른 모습. 솜 뭉치 같은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파란 가을 하늘, 초록 숲과 산 등 온통 선명한 배경 때문에 더욱 새하얀 빛을 발하는 듯 하다. 메밀꽃을 즐겨 그리는 정연서(52) 화백은 “흐린 날에 오히려 꽃의 하얀색과 줄기·잎의 녹색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한다.

 

 


장돌뱅이의 봉평장·물레방아·당나귀

소설 속으로 추억 속으로

 

봉평은 가산 이효석의 고장이다. 이효석 생가터가 있는 ‘효석문화마을’은 소설에 등장하는 물레방아, 주막 등을 재현해 놓았고, 키 큰 돌배나무들이 서 있어 쉬었다 가기 좋은 초미니 ‘가산 공원’도 있다. 허생원이 재미를 별로 못 봐 허탈해 했던 봉평장(2·7일)은 물론 요즘도 열린다.

 

지난 2일 봉평 ‘효석문화마을’. 마무리 수해 복구 작업 하느라, ‘효석문화제’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아직 마을에 흐르는 흥정천에 섶다리도 놓기 전이고, 옛날 장터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관광객은 속속 몰려들었다.

 

봉평의 메밀꽃밭은 총 15만평. 한군데 몰려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분산돼 있다. 축제는 올해로 8회째. 워낙 사람들이 몰려 사무국측은 “사람 발에 밟혀 없어지는 메밀꽃밭 규모가 한 2만평은 될 것”이라고 했다. 한 여행전문가는 “축제 기간 중 메밀꽃을 제대로 편안하게 보려면 아주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효석문화마을’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기본적으로 돌아보는 곳은 이효석 생가터, 물레방아, 주막 ‘충줏집’, 이효석문학관 등. 마을 자체는 예쁘장한데, 소설과 축제의 인기 때문에 식당과 펜션 등 각종 건물이 너무나 가득 들어차 한갓진 느낌은 사라졌다.

 

 

 좋게 말하면 활력. 그러나 소설의 낭만을 기대한 여행객은 얼떨떨하다. 이효석 생가(엄밀히 말하면 생가터)는 2개의 커다란 식당·찻집에 끼어버린 모양새. 물레방아, 초가집, 원두막, 당나귀 모형 등은 이 마을의 인기 장식품이 됐다.

 


기왕이면 차가 다니는 큰 길(언더 위 문학관까지는 일반차량 진입 금지. 언덕 아래 주차장에 세워놓고 가야 한다) 대신 몇 분짜리 미니 산행에 가까운 언덕 길을 올라 ‘이효석 문학관’(033-330-2700)에 가보자.

 

이효석의 집필실까지 꾸며 놓은 작은 전시관이다. 문인들의 육필 원고도 전시해 놓았다. 문인들의 잘 생긴 펜 글씨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세계의 메밀 음식’ ‘세계 메밀의 기원과 전파’ 등 문학관의 전시내용치고는 좀 느닷없지만 나름대로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코너도 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효석문화제 기간에는 일반·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평창무이예술관’(033-335-6700)은 폐교를 다시 꾸민 그림 전시장 겸 도예 작업실. 마룻바닥이 삐그덕 거리는 복도를 지나가면서 옛 추억에 빠지는 어른들이 있을지 모른다.

 

축제기간 중 ‘평창무이예술관’에서는 메밀꽃 압화체험(4000원·목걸이나 휴대폰 줄을 만들어갈 수 있다) 등 행사를 마련한다. 조각공원으로 조성해 놓은 예술관 뜰은 밤에 가면 더욱 운치 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초등학생~고등학생 1000원(문화제 기간에는 1000원씩).

 

 


제8회 평창효석문화제:

 

9월 8~17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물론 메밀꽃 밭이 하이라이트다.

 

 메밀꽃밭에 길을 내서 관광객들이 좀 더 편하게(꽃밭을 훼손하지 않고) 둘러 볼 수 있게 했다. 흥정천에 놓인 돌다리·나무다리·섶다리도 건너보고, 봉숭아 물들이기, 종이배 만들기, 지게지기, 찹쌀떡치기 등을 해 볼 수 있다.

 

 최대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경험을 위해 ‘메밀꽃 필 무렵’의 주요 등장 동물인 당나귀도 관광객들을 위해 사진 모델로 나선다. 헌책방이 등장하고, 1930년대 시골 장터도 재현한다. 8~9일 오후 7시30분 봉평 달빛극장에서는 ‘수해복구지원 봉평 달빛 극장 자선음악회’도 열린다. 달빛 음악감상 시간이다. 문의는 유시어터(02-3444-0651).

 

 

가는 길:

 

서울 쪽에서 떠날 경우 영동고속도로 ? 장평 나들목 ? 봉평 방향 6번국도. 지난 1일 금요일 아침 서울을 출발, 봉평까지 2시간 40분쯤 걸렸다. 자세한 축제 문의는 평창군 문화관광과 (033)330-2741, 효석문화제위원회 (033)335-2323, www.bongpyong.co.kr 효석문화제 홈페이지에 가면 축제를 찾아가는 다양한 여행상품 안내가 나와있다.

 

메밀 맛 안 볼 순 없지

봉평에 갔는데 각종 ‘메밀 메뉴’를 먹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폭신한 것 좋아하는 탄수화물 마니아가 비교적 죄책감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밀 전병, 메밀 부침이 기다린다. ‘어느 식당이 제일 잘 하냐’고 주민들 붙잡고 물어보니 “글쎄, ‘현대’ 좋다는 사람도 있고, ‘진미’ ‘고향’ 좋다는 사람도 있고…” 같은, ‘어디 한 쪽 편 들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효석문화마을에서는 아예 ‘봉평 메밀 음식점 안내’라는 큰 간판을 마련했다. ‘묵사발’ ‘메밀꽃 필 무렵’ ‘농촌’ ‘고향막국수’ ‘풀내음’ ‘메밀먹거리’ ‘초가집옛골’ ‘현대막국수’ ‘진미식당’ 등 봉평의 주요 식당을 대부분 올려놓았다.

 

그 중 ‘현대막국수’(033-335-0314).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소한 메밀 냄새가 난다. 메밀의 맛은 순박한 메밀꽃을 꼭 닮았다.

 

순하디 순한 맛을 만끽하고 싶다면 백김치, 부추 올린 메밀 부침(5000원)을 추천한다. 야들야들하면서도 담백한 팬케이크다. 매운 김치를 넣은 메밀전병(5000)도 있다.

 

‘메밀 80%’라는 ‘순 메밀국수’ 6000원, ‘메밀 50%’라는 일반 메밀국수는 4000원(비빔 5000원)이다. 식당에서는 “반죽을 따로 하기 때문에 함께 온 일행이 ‘일반’이면 ‘일반’, ‘순’이면 ‘순’으로 주문을 통일시켜 달라”고 한다. 봉평의 일부 메밀 식당에서는 ‘순 메밀국수’의 경우 2인부터 주문을 받기도 한다.


 

봉평(2·7일)장은 정선장 등에 비하면 ‘시시하다’ ‘귀엽다’ ‘조촐하다’ 등 반응이 나올 만한 규모. 아침 겸 점심으로 ‘올챙이 국수’(2000원·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국수가락이 뚝뚝 끊어지기 때문에 숟가락으로 먹는다), ‘수수부꾸미’(1000원) 먹으면서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정도만 기대하고 가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