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해안선 기행 (3) 남해(하)
경남의 해안선 기행
(3) 남해(하)
남해의 해안선은 절경으로 이름이 나 있다. 그 중에서도 드넓은 상주·송정 해수욕장, 드높은 금산과 보리암 등지가 유명하다. 이름처럼 아름다운 미조항 끝에서 툭 트인 남해 바다를 바라보는 즐거움도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매번 같은 곳을 찾는 일정이 반복됐다면 흥미가 반감된다.
이럴 때 남해의 옛 이야기 몇을 알고 간다면 여행은 운치를 더하게 된다. 남해군 고현면 일대의 노량해전 관련 유적이 예가 된다. 또 이동면 노도에서 유배 끝에 죽은 서포 김만중 등 남해 곳곳에 스민 유배문학의 흔적도 포함된다. 남해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곳곳의 해안비탈에 만들어진 다랑논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남해의 섬 ‘창선’ 사람들은 더 독하다고 한다. 어지간했으면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물 속으로 10리를 간다’고 했을까. 이들은 산비탈 대부분을 일구어 고사리밭으로 만들었다. ‘죽방렴’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기잡이도 하고 있었다. 남해의 해안선 여행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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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했던 바다는 미조면 항도마을 앞에서 잔잔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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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이 이동 노도에서 쓴 구운몽
기자는 이동면 노도로 직접 건너가지 못했다. ‘해안선’이
아니라 ‘유배문학’만을 다룰 다음 기회로 넘겼다. 해안선 위의 국도에서 노도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생을 마친 김만중의 문학 이야기를 남해역사연구회
정의연 회장에게서 들었다.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같은 소설을 이곳에서 쏟아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견도 있지요. 소설 속에 나타나는
불교 원리를 되새기면 그 내용이 ‘관음 성지’라는 남해와 무관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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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선면 단항의 왕후박나무. | ||
지난해 열렸던 ‘남해 유배문학 한마당’에서 진주교육대 송희복(국어교육과) 교수는 “사씨남정기의 본질에 구도자의 깨달음이 있다는 사실, 구운몽 속 존재의 상이 인연을 따라 윤회·전생한다는 금강경의 사상을 닮았다는 점에서 김만중 문학의 불교적 색채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는 말년의 자신을 성찰하면서 관음의 성지인 남해에서 불심을 통해
자기 나름의 초월의 길을 찾으려 했다”고 추정했다. 금산의 보리암, 화방사와 용문사 등은 관음 성지 남해를 대표한다.
조선 중종
때의 기묘사화로 13년 간 남해에 유배됐던 자암 김구의 문학 자취가 설천면 노량의 충렬사 일대에 남아 있다. 특히 유배기간 중에 남해 곳곳을
돌아다니며 ‘남해문견록’을 지었던 후송 유의양에 얽힌 일화는 당시 유배생활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가 유배를 오자 관리가 나와 “하인을
두겠느냐”고 물었고, “데리고 온 사람으로 족하다”고 답했다 한다. 그러자 관리가 “그러면 식량만 드리겠소”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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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선면 가인리 공룡 발자국 화석. | ||
서포 김만중·자암 김구 등 곳곳에 유배 유적지 산재
유배지에
가족이나 하인을 데리고 올 수 있었고, 별도로 사람을 살 수 있었다. 식량은 관아에서 제공됐다.
이동면을 지나 상주에 접어들었다.
곧 금산 보리암 오르는 길이 나타났고, 상주·송정 해수욕장 입구가 잇달았다. 명성에 걸맞게 금산은 금산대로 높고, 상주해수욕장 백사장은
남해안에서 가장 넓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만큼 시간을 아껴 남해에서 가장 큰 항구 ‘미조’로 찾아들었다. 남동쪽으로 달리던
남해의 해안선은 미조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자라목 끝의 미조항은 갈치회와 멸치회·물메기탕으로도 유명하다.
△‘섬 중의 섬’ 창선에 들다
미조에서 항도 노구 등지를
지나면 방조림으로 유명한 물건마을이 나타난다.
해안의 마을마다 크든 작든 방조림이 있지만 물건 방조림은 그 규모에서 압도적이다. 느티나무 포구나무로 무성한 방조림의 역할에 대해 정의연 회장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제방 뒤의 울창한 숲이 단순히 바람이나 파도를 막는 역할만 한 게
아닙니다. 마을을 은폐하고, 본래 그늘을 찾아다니는 고기들을 모으는 역할도 했지요.” 물건의 방조림은 남해안의 다른 어촌이 대부분 봉변을 당한
2003년 태풍 매미 때에 마을을 온전히 보호해 더욱 부각됐다.
삼동면 지족에 창선을 잇는 다리가 있다. 다리 주변에서 죽방렴으로
고기를 잡는 현장을 볼 수 있다. 참나무나 소나무로 다리를 세우고, 이를 대나무발로 길게 연결해 고기를 잡는 것이다. 멸치가 주로 잡힌다.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일반 멸치보다 다섯 배나 비쌀 만큼 영양상태가 좋다 한다. 창선대교에서 죽방렴을 보며 ‘섬 중의 섬’ 창선에 들었다.
산비탈마다 볼 수 있는 고사리밭이 독특하다. 요즘은 누런 색깔을 하고 있어 보기도 좋다. 다른 곳에선 손조차 대지 않을 산비탈을
고사리밭으로 개간했다 한다. 흔한 중국산과는 맛 자체가 달라 지금도 수요를 채우지 못한다. 직접 맛보지 않아도 고소한 듯 하다. 그렇게 창선
사람들의 억센 생활력을 비유해 정 회장이 이런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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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비탈 ‘다랑논’·독특한 고기잡이 ‘죽방렴’ 볼거리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도 물 속으로 10리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희한한 비유라 잠시 해석이 안됐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들이 아닌 모양이다.
섬의 동쪽은 해안 따라 길이 나 있지 않지만 당저·연곡을 거쳐 적량과 가인리를 찾았다. 적량에는 적량성, 가인에는 공룡발자국
화석이 기다렸다. 정작 공룡발자국 화석보다 그 입구의 ‘세심사’라는 가건물 형태의 절이 더 눈길을 끌었다. 보통의 절 건물도 아니고, 절이 있을
위치도 아니다. 묻고 싶었지만 절을 지키는 개가 무서웠다.
곧장 달려 창선·삼천포대교가 있는 당항·단항·대벽 등의 마을이 창선 북쪽 해안에 있었다. 수령 500년의 천연기념물인 ‘왕후박나무’는 전남 진도와 남해에서만 발견된다 한다. 짭짤한 바닷바람을 쐐야 나무가 자라는 모양이다. 인근 사천해전에서 부상 당한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과 함께 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할 만큼 우람하다.
△바다는 다시 고현 설천으로 이어져
다시 삼동면
지족으로 돌아 나온 해안선은 이동면을 거쳐 남해읍에 이른다. 이곳 해안에는 노량해전 당시 조선군과 연합했던 명나라 도독이 명령해 돌에 새겨
지었다는 마애비와 왜성 등의 임란 유적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는 처음 출발했던 고현과 설천의 바다로 해안선은 돌아온다. 왜군이 노량바다 옆 관음포와 연결된 곳으로 착각했다는 강진만이 해안선 옆에 광활하다. 경남의 해안선은 다시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군 금남·진교 등지와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사천시 곤양면의 해안선으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