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1) - 우통수와 열불암
[한강을 걷다](1)
- 우통수와 열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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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안개가 드리운 그 길에는 더러 빗방울이 들이치기도 했으며, 빗물을 잔뜩 머금은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며 쏟아놓는 물방울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마다않고 그 길을 되짚어 걸었던 까닭은 온 산을 에워싸고 있는 습기가 몸뿐 아니라 마음에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의 현재는 꼭 쥐면 손아귀에서 바스라질 것만 같이 메말라가고 있었으니 선뜻
우통수를 맞닥뜨린다고 한들 어찌 그를 맑고 밝은 눈으로 맞이하여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과 함께 상원사로 가는 이십 리 길, 그 아름다운 흙길을 아예 맨발로 걷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를 앞질러 지나치면서도 말을 거는 것은 삼갔다. 홀로 걷는 그이의 집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나의 집중 또한 흐트러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지독히 이기적인 행동이긴 했지만 내가 언제, 어디에서 또 이토록 찬란한
장면과 조우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는 사람들치고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싶기도 했던
것이다.
발을 들여 놓자마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빼곡하게 들어 찬 나무들 탓에 길은 어두컴컴하기만 했으며, 나뭇잎과 빗줄기는 한 치의 타협도 없는 바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은 곤혹스러울지언정 그 장면은 나의 해낭(奚囊)을 열어젖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기신기신 비탈길을 오르다가 우두커니 서서 혹은 그루터기만 남기고 쓰러진
고목에 걸터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해낭에 주워 담기를 예닐곱 차례, 몇 굽이를 돌았는가 싶자 나는 어느새 우통수가
코앞인 능선 길에 서 있었다.
들이치는 빗발에 얼굴이 아파도 개의치 않았다. 비에 맞은 얼굴이 얼얼할 즈음이면 어느새 짙은 안개가 어루만져 주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으며 날을 세운 듯 매몰차게 달려들던 바람 또한 잠시 잦아들어 숨을 돌리게 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열고 닫기를 반복하던 해낭을 더 이상 열지 않았다. 이처럼
넘치도록 황홀한 정경을 두고 그 주머니에 무엇을 담고 또 무엇을 담지 않을 것인지를 가늠하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순정한 시간의 기억들은 오랫동안, 긴긴날을 두고 나에게로부터 떠나보내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가 잊었다고 하더라도 내 몸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며, 어느 순간 맞닥뜨린 바람 한점이나 얼굴에 와 닿는 한 방울의 비로도
그 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스란히 되살아 날 것만 같다.
비에 취하고 바람에 흔들린 마음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 우통수로 향했다.
지척인 곳, 닿자마자 물을 한 바가지나 떠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아직 삶의 경험이 일천하여 비록 품천(品泉)의 경지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물맛은 여느 곳과는 달리 아주 깔끔하다.
입에 닿거나 삼켜도 입안에 맛이라고는 전혀 남지 않으니 과연 물이란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른 무엇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물 그 자체의 맛을 느낄 수 있으니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지 이전에 샘 그
자체로서도 빼어난 존재인 것이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가다 한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는데,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가 중령(中령)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아니하여,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으므로 한강이라 이름 짓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우통수의 근원에 수정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옛날 신라 때 두 왕자(王子)가
이곳에 은둔하여 선(禪)을 닦아 도를 깨쳤기에, 지금도 중으로서 증과(證果)를 닦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거처하기를 즐겁게 여긴다.…”라고
했다.
권근 또한 양자강의 중령을 실제 보고 맛까지도 봤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중령이란 중국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 서북쪽의 양자강에 있는 샘을 말하는 것이다. 그 샘에서 솟아 난 물은 맛이 차기로 소문났는데 황토가 넘쳐나는 강바닥을 흐르면서도 다른 물과 섞이지 않았다고 한다.
우통수의 물 또한 그와 같이 긴 여정을 떠나 한양에 다다를 때까지도 그 맛과
기운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우통수의 물을 한 바가지 마시는 것은 한강의 가장 맑고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호를 성소(惺所)라고 쓰던 조선 중기의 허균(1569~1618)이 남긴 ‘화사영시’(和思潁詩)중 ‘소회를 쓰면서 소자정에게 답한 운을 쓰다’(書懷 用答邵資政韻)의 끝 부분에 봄날이 끝나갈 무렵 차를 끓여 갈증을 달래고 싶지만 어찌하면 우통수의 물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거기에 덧붙여 “우통은 오대산 상원사 곁에 있는데, 한강의 상류이며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샘이다(于筒在五臺山上院寺側 是漢江上流 爲東國第一泉)”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곧 그 샘물이라야 차를 제대로 끓일 수 있는데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귀양살이의 답답한 현실을 빗대어 읊은 것이지 싶다.
고개를 돌리자 그 곁에는 너와로 만든 지붕을 이고 있는 암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굵은 빗발을 감당하고 있었다.
서대 염불암(念佛庵)이다. 앞서 말한 권근이 수정암이라 불렀던 곳이다. 빗줄기는 지붕에서 물보라가 일어나도록 거세게 퍼부었으며 곧 지붕이라도 뚫어버릴 듯이 내려 꽂혔다. 그는 자유낙하의 자유로운 몸짓이 아니라 마치 목적을 두고 달려들 듯이 그렇게 쏟아졌다.
그 앞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나는 다만 큰 나무 밑에 서서 간혹
사진기의 셔터를 누를 뿐,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장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 방해를 받고 싶지도 간섭을 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뜻하지 않게 나로부터 훌훌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는데 기어코 그것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우통수로부터 흐른 물이 바다에 닿기까지 갖가지 형태와 맛으로 달라지지만 우통수는 한결같듯이 허공 또한 천변만화하며 갖가지 모양으로 달라지지만 허공의 본질은 결코 변하는 법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허공은 갖가지 모습으로 천변만화하며 가려 있는 탓에 투명한 그 본질을 꿰뚫어 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통수의 맑은 물 한잔을 마시고 염불암 마당에 서면 우리들에게 드리운
엷은 막이 사라지고 본래의 나와 불현듯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본래 면목이 그리운 사람들아, 서둘러 우통수로 올라보라. 그곳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네 자신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이지누〉
나라 안의 그 어떤 골짜기라도 그의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한강 또한 10년이 넘도록 제집 드나들 듯 발품을 팔아 답사를 했다. 올해 봄에는 폐사지 답사기인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을 출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