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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왕릉 찾아보기 - 2, 왕릉의 개요

창현마을 2006. 9. 4. 15:33

 

 

이조시대 왕릉 찾아보기 - 

 

               2,    왕릉 개요

 

 

 

 

[왕릉상식]

조선시대의 묘제에 있어 왕실의묘는 능 원 묘로 구분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 사친(私親) 왕세자와 그 비의 무덤 묘는 대군 공주 옹주 후궁 귀인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명칭을 다르게 정한 것이다.
왕실에서 국상을 당하면 곧 "빈전, 국장, 산릉도감"을 설치해 장례준비를 하게 된다.
왕을의 배치상 몇가지 형식이있는데,

[능의 종류]

단릉:왕이나 왕비 어느 한쪽만을 매장한 형식.
쌍릉:왕과 왕비의 능을 같은 소구릉에 나란히 배치한 형식.
동원이강릉: 정자각 좌우로 두 개의 소구릉에 각기 1능씩 두는 형식.
합장릉:부부을 같은 봉안에 합장하는 형식


[도감의 조성]

빈전도감: 장례일까지의 염습, 성빈, 성복등 진전에 관한 일을 담당.
국장도감:장의에 필요한 재궁 거여 책보 복완 능지 명기 길흉 의장 포연 제기 제전 반우 등의 의식과 절차를 관장
산릉도감: 현궁과 정자각 비각 재실등 봉분조성과 부대시설에 관한 일을 담당.

[택지조성 및 완성]

택지와 능역은 대략 3개월에서 5개월정도 걸렸으며, 능역에 동원된 인원은 6,000명 내지 9,000명이라고 기록에 전해진다.

택지는 상지관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뒤에는 산이 앞에는 물이 흐르는명당지,와 북쪽의 높은 산을 주산으로하고 주변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형상을 남쪽에는 안산 그리고 묘역안에 개울이 있어야하고 물이 동쪽으로 흘러 모아지는 곳이면 좋은 묏자리가 되는 것이다.

 

 


능은 좌향(坐向)을 중시한다.좌(坐)란 혈의 중심이 되는곳이고 좌의 중심이되는 방향이 향(向)이된다. 왕릉의 좌향을 보면 대부분 북에서 남으로 향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왕릉의 구조를 보면 궁궐에 들어갈 때 명당수가 흐르는것처럼, 왕릉을 입구에는 작은 내(川)가 있다.능역 입구에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서있다.그 뒤로 얇고 넓직한 길을 길게 깔려있는데 이를 참도라한다.살아서나 죽어서나 흙을 밟지 않는 임금에 대한 예우가 담겨있다.

 

홍살문 바로 오른쪽에 벽돌을 반듯란 모양므로 깐 판위가 있다 왕이 선왕의 제사를 지내러 올 때 바로 이곳에서 절을 하고 들어갔다.참도를 따라 올라가면 전면에 정(丁)자 모양을 하고있는 정자각(丁字閣)이 서 있다.이곳에서 제례를 올리게 된다.정자각을 오를때는 반드시 동쪽 계단으로 올라갔다가 제사가 끝난뒤에는 서쪽계단으로 내려온다

봉분쪽으로는 섬돌처럼 장개석을 3단 형식으로 쌓았다 첫단 공간에는 석마와 무인석 둘째단 공간에는 문인석이 각가 한쌍식 서로 마주 보도록 세워저 있다 .

 

문인석 사이 한가운데에 팔각형으로된 장명등(長明燈)을 앉혔다. 마지막 단에는 봉분 바로 앞에 제물을 차려놓는 상석(床石) 그 좌우로 망주석이 세워졌다.붕분 밑부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을 둘러 봉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또다시 난간석을 두르고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두쌍을 각각 좌우로 벌여 놓았다 석호는 능을 지키는 수호신의 뜻을 갖는다 석양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함께 명복을 비는 뜻을 담고있다.다만 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릉(덕종등)은 한쌍으로 줄어 왕릉과 차별을 두었다.
그리고 봉분주위오는 능을 감싸듯 앞면만 터놓은 담장,즉 곡장(曲墻)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