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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왕릉 찾아보기 - 1, 왕릉의 구조와 그 의미

창현마을 2006. 9. 4. 13:46

 

이조시대 왕릉 찾아보기 - 

 

              1,  왕릉의  구조와 그 의미

 

 


 능이란 무엇인가? 세간에서 통상적으로 이해하기를, 능이란 무덤의 또 다른 의미이자 죽은 자의 육신이 묻히는, 즉 사자死者의 매장처를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모든 이의 무덤을 능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아주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능은 왕 또는 왕의 인척의 분묘를 뜻한다.

 

뒤의 내용에서 좀 더 세분화하여 언급하도록 하겠다. 현존하는 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왕들의 묘이지만, 오늘날 한국에는 왕이 아니었던 사도세자의 묘도 엄연한 능으로 현존하고 있다.

 

 이번에는 능이라는 상당히 국지적인 명칭을 내려놓고,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인 고분이란 단어를 살펴보도록 하자.

 

고분이란 한자어를 풀이한 그대로 모든 오래된 무덤을 통칭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적인 개념으로 엄격히 구분하자면 특정시대에 한정된 무덤 양식을 말한다. 즉, 넓게 보자면 죽은이가 묻힌 그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장 당시에 행해졌던 매장의례에서 남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능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고분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분이라고 해서 특별히 선사시대의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 비약을 하자면 지난해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의 무덤 또한 고분으로 통칭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능의 구조와 그에 담긴 의미를 알아볼 것인데, 그 이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면 좋을 것이 있다. 바로 죽음死이 그것인데, 이것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는 능과 같은 매장처의 의미를 조금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이 섬뜩한 단어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해오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우리들 중에도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이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죽음은 우리의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때에는 이 죽음과 함께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모든 동기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의 존재에 대한 인지를 인간의 모든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인이자 이유로 보기도 한다.

또한 필리프 아리에스처럼 과거인과 현대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죽음의 역사로 다루어 서술하는 이도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좌절에 대한 우리 현대인들의 감정과 중세말엽 사람들의 감정 사이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차이점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결정적인 좌절과 우리의 인간적인 품행으로 연관시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확신과 삶의 불안정은 우리의 실존적 페시미즘과는 무관한 것이다.

 

반대로 중세말엽에 사람들은 인간이란 집행유예 상태에 놓여 있는 죽음의 존재이며, 죽음은 인간 자신의 내부에 상조하면서 인간의 야망을 깨부수고 즐거움을 망가뜨린다는 대단히 날카로운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죽음의 표현, 자신의 전기에 대한 각자의 인식의 표현, 그리고 살아가면서 소유했던 사물들과 개체들에 대한 정열적인 애착의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장소였던 셈이다.”

 


 이렇듯 죽음의 의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천되어 왔다. 소소하게나마 예를 들어 보자면, 무덤의 위로 덮는 비석을 살펴 볼 수 있을 듯하다.

 

옛날에 무덤의 비석은 매장된 시체에서 악귀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봉인석의 역할을 위해 올려졌다. 하지만 오늘날 비석은 과거의 역할보다는 고인에 대한 죽음의 축복, 이를테면 애도의 뜻을 담은 글 내지는 죽은 이의 신상명세를 기록하는 역할을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또한 매장문화에 대한 시대의 의식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인류의 탄생과 함께 나타났듯, 죽은 이를 ‘처리’하는 방법 또한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호모 사피엔스의 단계부터 남아있다.

 

즉, 그 이후로는 매장의 풍습이 점점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시대와 지역에 따른 차이는 존재하지만 구덩이에 시체를 안치한 후 덮어버리는 형태의 움무덤과 같은 양식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어느 시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여러 종교의 해석에 따라 이제 죽음은 하나의 이념으로써 구체화 된다. 어떤 종교에서는 확실한 사후세계관을 정립해 놓고 있으며, 어떤 종교에서는 죽음과 사후에 대한 질문에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라고 답하며 특별한 죽음관을 확립해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무기로써, 아니 사후세계를 무기로 하여 민중을 지배하는 종교 또한 엄연히 존재했으며, 지금도 그 권세를 잃지 않고 힘을 온 세계에 떨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너는 전생의 업으로 인해 지금 이렇게 불행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천당에 가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도 모두 이에 속한다. 하다못해 목숨과 재물을 담보로 죽음을 무기화하는 사이비 종교도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죽음은 인간을 속박하여 어디까지나 관계하고 있다. 고분은 지난날 죽음의 물질적 사료이다. 고분 연구는 우리에게 과거의 죽음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죽음에 대한 폭넓은 이해는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다방면의 시각을 주며, 그것은 마치 아르고스의 눈과도 같을 것이다.

 

 자, 죽음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두어도 될 것 같다.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능의 구조와 그 곳에 스민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시간이 온 것이다.


 시작은 앞에서 약속했던 능의 분류가 될 것이다. 앞에서는 능을 왕과 인척의 무덤으로 규정했는데, 정확히 하자면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으로,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死親의 무덤들을 원으로 칭한다.

 

그 이하의 무덤은 모두 묘라 한다.

 

 하지만 그 관례와는 어긋나는 것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앞에서 예를 든 사도세자의 능이 그것이다. 사도세자는 왕세자 때 당파싸움에 휘말려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었다.

그의 아들인 정조대왕은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여 영조 때 수은묘라 불리던 사도세자의 묘를 영우원과 현릉원으로 격상시키고, 그 후에는 융릉이라는 추존 왕릉까지 올린다.

 

또한 왕족 중에서도 왕세자가 아닐 경우에는 모두 묘라 했으며,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묘로 불려지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왕의 장례를 치르는 임시 기구인 도감들이 설치되고, 3개월에서 5개월 동안의 국장 기간 동안 왕릉 터가 고려되었다.

 

왕릉 터는 한양 주변 백리 안팎의 배산임수와 같은 풍수지리를 조건으로 삼아 선정된 장소 중에 최종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선정된 장소에는 이미 무덤이 있다고 해도 그 묘는 왕릉의 후보지로 선정되었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양반이라도 예외는 없고, 평민들은 이장 비용도 보상받지 못했다고 하니 그 당시 왕의 권세와 힘을 가늠해볼만 하다.

 

이렇게 선정된 왕릉터에는

단릉(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형태),

쌍릉(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하게 조성한 형태),

삼연릉(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조성한 형태),

동역이강릉(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이 있는 경우, 즉 같은 지역 내의 다른 언덕위에 봉분이 있는 경우),

 

동원상하봉(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경우),

합장릉(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하여 조성한 형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동시에 우상좌하(우측에 왕, 좌측에 왕비)라는 데에서 유교적인 색채를 들러내고 있다.

 조선왕릉에서는 이런 특징이 드러나기도 한다.


 왕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천교衿川橋이다. 땅기운이 더 이상 넘어가지 말고 멈춰 있으라는 풍수지리 이론에 따라 홍살문 앞에 개천을 조성해 돌다리를 만들어 놓는 데 이것이 바로 금천교이다.

 

경복궁에서도 궁궐이 있는 땅의 기운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근정문 앞에 금천을 조성해놓고 있다.

 금천교를 건너 능역陵域으로 들어서는 길에 우리는 하나의 관문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홍살문이다.

 

홍살문이란 궁전, 관아, 능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이다. 홍살, 즉 붉은 화살이라는 의미인데, 한자어로 모두 적는다면 본래 홍전문紅箭門이 되어야 하지만 한글과 한자어가 뒤섞여 있다.

 

다른 말로는 홍문이라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교 건축의 일주문-금강문-사천문-불이문과 같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붉은 색은 유교에서 악귀를 쫓는 의미를 가져 능의 입구임을 알리는 역할을 맞는다.

홍살문은 30자 이상의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은 형태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이제 정자각으로 곧게 뻗은 길이 있고, 그 옆에 네모진 돌 두개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판위版位이다.

 

판위는 왕과 세자가 대기하는 돌이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리고 판위 옆에는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과 능의 청소와 허드렛일 등을 담당하는 일종의 관노인 수복守僕이 거쳐하던 수복방守僕房이 위치해 있다.

 

그 옆에 정자각으로 이어진 길은 참도라 하는데, 다시 어도御道와 신도神道로 나뉘어진다. 당연히 어도는 왕이 걷는 길이고, 신도는 죽은 왕의 귀신이 걷는 길이다.

 

어도의 폭이 좁고 신도의 폭이 넓은 데에서 우리의 전통인 유교적인 예를 볼 수 있다. 참도는 정자가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지는데, 반대편에는 신도는 없고 어도만 놓여있다. 이는 귀신은 봉분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기 때문이다.

 

 참도를 따라 걷다보면 정면에 정자각이 보인다. 정자각은 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우리가 성묘하는 것처럼 봉분 바로 앞까지 가서 제물을 봉헌하고 제사를 올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능에서는 봉분이 있는 쪽을 사초지라 하여 아무도 올라가지 않는다.

 

왼쪽에 제사를 지낸 후 축문을 태우는 곳인 망료위望燎位가 보인다. 그 뒤로는 제사에 사용한 음식과 축문을 태운 재를 묻는 곳인 예감이 있다.

또, 정자각 뒤로는 비각이 있는데, 이곳에는 무덤의 주인인 선왕의 업적을 새긴 비를 안치해둔다.

 

 정자각 뒤쪽의 참도를 따라 걷자면 이제 작은 동산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사초지莎草地이다. 조선 왕릉에서 이 사초지는 두 가지의 특별한 풍수지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풍수상 땅속을 흐르는 생기는 흙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생기의 몸인 흙으로 된 동산 위에 왕릉의 봉분이 위치하여 생기를 많이 받을 것이라는 목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곳보다 높은 권자에 등극한 왕처럼 보이기 위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유교 왕조의 통치술로서의 의미로 풀이된다.

 

다른 이름으로는 강이라고도 부르며, 사초지 위로 오르면 장대석이라고 부르는 긴 돌들이 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놓여있다.(장대석은 축돌, 혹은 섬돌이나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장대석 위로 정중석이라는 돌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 네모진 돌은 조선왕릉 중에는 유일하게 건원릉에서만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중석은 불교식으로 직접 절을 하던 곳이다.

 


 

 사초지에 오르면, 가장 높은 곳이자 중앙에 봉분이 위치해있다. 봉분을 위시하여 곡장曲墻이라 불리우는 담장이 주변에 둘러져 있고, 봉분을 감싸고 병풍석이 조성되어 있다.

그 주위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이라 불리는 평평한 돌이 받쳐져있다. 혼유석魂流錫은 보통 제단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이곳은 혼이 노니는 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보통 무덤 당 하나씩 배치되며, 합장릉의 경우 둘이 있으며, 쌍릉의 경우 각각의 봉분 앞에 하나씩 모습을 보인다.

 

 혼유석 앞에는 능묘 앞에 세워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기능을 갖고 있는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져 있고, 양 옆에는 망주석이 있다. 망주석望柱石은 무덤의 앞면을 잘 감싸기 위한 역할과 동시에 풍수 지리적으로 좋은 기운을 봉분에 붙잡아 두기위한 역할도 맡고 있다.

 

양쪽에 세워진 두 망주석 앞에는 무인석과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그리고 석마石馬가 위치하는데, 이곳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능에 따라 무인석이 강하게 조성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그것이 왕권이 강하던 강함과 약함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망주석 뒤쪽으로는 석호石虎, 석양石羊이 줄지어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조선에서 풍수지리는 사대부로써 꼭 갖추어야할 필수사항으로 여겨졌다. 왕이 서거하면 조선 왕실에 소속된 풍수지관들이 왕릉의 후보지를 탐색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드물긴 하지만 이들 역시 높은 벼슬에 이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점에서 역관이 중인의 계급에서 더 이상의 계급적인 진출을 제한 받았던 고려시대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또한 풍수지리는 민간신앙에도 스며들어 많은 이들은 조상의 무덤자리를 좋은 풍수지리에 쓰고자 했으며, 불교건축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 조선 왕조의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에도 풍수지리와 무학 대사의 왕십리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태조의 한양 천도 또한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