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갈대가 6백년 자란 이성계의 건원릉
함흥 갈대가 6백년 자란 이성계의 건원릉 | |||||||||||||||||||||||||||||||||||||||||||||||||||||||||||||
동구릉 안내도를 보면 9개 왕릉이 들어선
검안산 모롱이마다 실한 열매가 조롱조롱 맺혀 있는 모습이다. 풍수에서 명당이란 산세에서 열매가 맺는 자리에 자리하게 된다하니 동구릉도 그런
것인가 싶어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1392년 7월 17일 조선 500년 왕조를 개국한 이성계의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 능상 위에 잔디 대신 무수히 솟은 함흥 갈대가 그것이다.
함흥의 갈대 외엔 다른 지역의 갈대는 이곳에선 결코 살지 못하다는. 건원릉은 일년에 딱 한 번 벌초를 해야 한다.
방원이 1398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비의 소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태조는 정치에 완전히 뜻을 잃고 한씨의 소생인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무학대사의 청으로 다시 한양에 돌아오지만 태종에 대한 증오는 컸다.
신덕왕후 강씨(?~1396)는 태조가 총애하던
여인이었고 강비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으니 자신의 아들들이 이복형인 방원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지 못해 운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6백년 전 시대로 되돌아 가보면
고려의 개혁파였던 신진사대부들과 혁명의 왕국을
일으킨 풍운아였던 이성계도 결국 여인을 잘못 다스려서 이런 비극을 맞은 것이다.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남온은 유학의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던 개혁주의자였고 그들이 방원의 편에 서지 않던 이유는 방원을 왕으로 앉히면 유교를 바탕으로 세운 개혁 왕국을 이룰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다.
방원이 누구인가? 고려 때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문무를 겸했고 막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왕자 중 인중지룡이었다. 정도전과 남온의 계산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신권(臣權)이 주도권을 잡는
국가가 목표였는데 방원에겐 도저히 씨도 먹혀 들어가지 않았을 것으로 봤고 그들의 판단은 옳았다.
조선시대 내내 장식했던 사림과 훈구의 대립은
조선초기부터 이렇게 피가 튀었다. 방원이 승리함으로 조선초기는 훈구파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
사실 쿠데타라 평하는 조선의 시조 이성계는
일반적인 주입식 역사공부를 배운 현대의 시각에서 벗어나 냉정한 눈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눈으로 보면 이성계는 진보 개혁사상으로
무장된 혁명아였다.
고려를 망친 원나라에 대한 친원은 애국이고 충이며 친명은 불충이란 논리가 이해 가는가? 이성계가 친명을 택한 것은 원나라에게 지배당했던 약소국이 시들어 가는 원 대신 신진 강대국인 명나라를 택한 솔직한 계산이었을 뿐이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조라는 불신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받고 있었다.
물론 태종은 태조가 죽자마자 정릉을 현재
자리로 이장시켜버리고 봉분을 깎았으며 묘로 강등해서 강비를 후궁으로 격하시켜버리고 만다.
이성계가 자신의 수릉으로 잡았던 것은 정릉이고
현재의 동구릉은 태종 방원이 잡은 자리다. 당시 태종의 명으로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길지를 물색하던 중 김인귀가 이곳의 길지를 추천해
영의정부사 하륜 등에 의해 정해진 곳이 지금의 동구릉이다.
천재 건축가 박자청
이성계의 건원릉은 고려 왕릉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공민왕의 현릉(玄陵)을 본 따서 박자청이 주도해 만든 능이다. 조선초기의 능인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은 조선왕릉의 기본제도를
마련한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의 작품이다.
뛰어난 궁중건축가였던 박자청은 무신출신이었으나
공조판서로 세종대까지 조선초기의 중요 건축에 빠지지 않던 인물이다. 당시의 건축기술로는 난공사였던 연못 위에 건물을 짓는 경회루를 완성한 것도
박자청이고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 지휘한 작품이다.
이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의 사부가 김사행이고
김사행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왕릉을 호화판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들은 건축가이다.
잠시 생각해보지만 역사란 아이러니하다. 호화판
건축으로 백성 등골 뺀 건축들은 거의가 중요 문화재로 남아있다.
고려의 국교가 불교이니 불교의 흔적이 초기의 조선왕릉에 남아 있다. 장명등만 해도 사실 불교의 석탑에서 나온 석물이다. 나중에 이 장명등에 대한 해석을 왕릉은 사후의 대궐로 보아 등불을 밝히는 역할이라 억지를 부렸지만.
아들과 원수처럼 극적인 갈등을 보였던 태조 이성계. 어쩐지 아들 방원보다는 이성계가 나약하고 감성적인 인물로 느껴진다. 이성계에 대한 평가는 개개인에게 달렸지만 냉혹한 철의 남자인 방원과 달리 버들잎 따서 물바가지에 띄워준 강비에게 반한 이성계에게 연민을 느낀다.
내가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이라서, 그리고 우리를 문맹의 구덩이에서 구해준 왕이기에, 또한 수백 년 후 인터넷 시대를 내다보고 자음모음으로 구성된 과학적인
이진법 언어를 세종대왕이 반포하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가 아이티 강국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놀라운 혜안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