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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궁궐 알아보기 3 - 덕수궁 4

창현마을 2006. 8. 23. 17:41

 

 

 

 

가슴으로 궁궐  알아보기 3  -  덕수궁 4

 

;  덕수궁에 대하여

 

 

 

 

 

 

 덕수궁 德壽宮
 
 

 

지정번호
 
:

사적 제124호

 

 

지정연월일
 
:

1963년 1월 18일

 

 

시 대
 
:

조선 선조 26년(1593), 고종 광무 1년(1897)

 

 

규모·양식
 
:

19,115평

 

 

재 료
 
:

석조 기단, 벽돌조

 

 

소 유 자
 
:

국유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국 정동 5-1

 

 

 

덕수궁 터는 원래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지어진 성종의 형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 저택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義州)까지 피난 갔다가 이듬해 10월 서울로 돌아와서 거처할 왕궁이 없자, 왕실의 개인 저택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아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규모가 좁아서 인근에 있던 계림군(桂林君)과 심의겸(沈義謙)의 저택을 합하여 궁내로 편입시키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불렀다.

 


선조는 1608년 2월 이곳 침전에서 승하하고, 광해군이 행궁의 서청(西廳, 즉조당으로 추정)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즉위 3년(1611)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하였고,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7년(1615) 다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에는 선조의 계비(繼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만 거처하게 되었다. 1618년에는 광해군이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유폐시키면서, 경운궁을 '서궁(西宮)'이라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이 경운궁의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하니 그가 인조이다. 인조는 즉위 원년(1623) 7월에 선조가 거처하던 침전인 즉조당과 석어당(昔御堂)만 제외하고 경운궁을 월산대군 후손에게 돌려주었다.

 


경운궁은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경운궁이 왕궁으로 다시 사용된 것은 고종 건양 1년(1896)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경복궁에서 시해되자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하여 러시아 공사관 옆에 있던 경운궁에 헌종의 계비인 왕태후 홍씨와 태자비의 거처를 옮기고, 그 후 고종이 1897년 2월 2일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고종은 선원전(璿源殿), 함녕전(咸寧殿), 보문각(普門閣), 사성당(思成堂) 등을 조영하여 왕궁의 면모를 갖추고 궁궐의 영역도 넓혔다. 광무 4년(1900) 1월에는 궁담을 쌓았다. 1904년 4월에 큰 화재가 나서 함녕전ㆍ중화전ㆍ즉조당ㆍ석어당과 각 행각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함녕전ㆍ즉조당ㆍ석어당은 그해에 복구되었다. 이때 경운궁의 외곽에 있던 가정당(嘉靖堂), 돈덕전(惇德殿), 구성헌(九成軒) 등은 불에 타지 않았다. 돈덕전은 1901년 건립된 2층 양관(洋館)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현재 덕수궁 경내에는 정전이었던 중화전(中和殿, 보물 제819호), 정전 정문인 중화문(中和門), 편전이었던 함녕전(보물 제820호), 덕홍전(德弘殿), 침전이었던 즉조당·석어당, 그리고 광명문(光明門), 준명당(浚明堂), 대한문(大漢門) 등이 있고,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석조전(石造殿)·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들도 있다.

 


옛 덕수초등학교ㆍ경기여자고등학교 자리와 미국대사관 서쪽 지역 등이 경운궁 영역이었으나, 비운의 근대사와 함께 궁궐 영역을 여러 대사관과 개인들에게 넘겨주어 현재의 영역은 20,000평에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축소되어 있다. 1907년에는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후 이곳에 거처하였는데, 이때부터 고종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경운궁의 건물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궁의 중심인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선원전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이 있는 부분이다.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은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中和門),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大安門),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중화전은 고종 광무 6년(1902)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처음 중층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진 건물로, 2층으로 조성된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였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단층 건물로 축소 되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만 남아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즉조당·준명당이 동에서 서로 있는데, 석어당과 즉조당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 뒤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 그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이 있다.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석조전과 석조전 별관이 있다.


중화문 서남쪽에 위치한 광명문은 황제의 정침(正寢)인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광명문 속에는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 국보 제229호)와 흥천사(興天寺)의 동종이 전시되어 있다.

 


즉조당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08년에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으로 추정되며, 1623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뒤부터 즉조당이라 불렀다. 광무 8년(1904)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광무 원년(1897) 10월에는 태극전(太極殿)이라 불렸다가 다시 중화전으로 바꾸어 불렸는데 후에 중화전이 신축되면서 본래의 즉조당으로 환원되었다.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에 타버린 뒤에 즉조당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 창건되었으나 광무 8년(1904)에 소실되어 같은 해 재건되었다.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덕홍전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함녕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양성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重明殿)이 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이 건물과 서관(西館)이 들어서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이 조성되면서부터 이웃한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석조전은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영국인 하딩(G. R. Harding)이 설계한 이 건물은 1층은 시종신(侍從臣)의 거실, 2층은 황제의 접견실과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으며,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석조전 앞의 서양 정원은 한국 최초의 것으로, 중앙의 분수대는 1937년에 조성되었다. 현재 석조전 본관은 궁중유물전시관,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 차례 옮겨졌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시켜 놓았다.

 


덕수궁은 조선 왕조의 다른 궁과 달리 뒤편이 작은 언덕을 이룬 사방이 열린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이곳에서 열강의 세력과 맞서며 정치를 한 것은 한양 도성 구조를 경운궁을 중심으로 재편하려 한 의도에서였다.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 있는 중명전은 1905년 11월 8일 오전 2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이 맺어진 곳이다.

 

 1907년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純憲貴妃) 엄씨(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다.

 

 

 

 

 

 

출처 ; 서울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