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연과 월정사
금강연과 월정사 | ||||
-오대산 물 휘돌아 沼를 이루고…-
남호암골에서 내려 온 다음날, 투명한 햇살이 온 산에 스며들고 있었다. 보름 가까이 빗발이 흩어지던 산이었으니 이른 새벽의 동살을 머금은 찬란함은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차마 눈이 부셔 바라보지 못하는 햇살이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늘 안개에 덮여있던 오대천은 보석같이 반짝였지만 산에서 빛나는 것은 오대천만이 아니었다.
장마를 지나며 더욱 짙어진 나뭇잎일망정 햇살 앞에서는 맑은 속내를 드러낸 채 계류 위에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꽃들은 앞 다투어 자태를 뽐내고 새들은 또 어떤가.
나뭇가지에 부서지는 햇살을 물어 집이라도 지으려는 양 분주히 이리저리 옮겨
앉으며 지저귀지 않는가.
비록 땀은 흐를지언정 마음조차 환히 열리는 듯했던 것은 오로지 햇살 덕분이 아니었겠는가.
동대 관음암도 기웃거리고 월정사 부도밭에서 다리쉼을 하고 남대 지장암도 들여다보며 다다른 곳은 월정사 언저리였지만 선뜻 절 마당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언제 흙탕물이 흘렀나 싶게 맑은 오대천의 반석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옛 시인묵객들이 다녀가며 새겨 놓은 각자(刻字)가 보이고 얕은 폭포가 굉음을 내지만 이내 조용해 졌다.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결코 급하게 흘러가는 법이 없다.
그는 높이와 속도를 지닌 다음에는 깊이와 넓이를 지닌 채 흐르는 듯 마는 듯 머물러 있다가 다시 떠나는 것이다.
아! 눈앞에 펼쳐진 이곳이 금강연(金剛淵)인가. 서대의 우통수를 비롯하여
중대의 옥계수(玉溪水), 동대의 청계수(靑溪水), 북대의 감로수(甘露水) 그리고 남대의 총명수(聰明水)가 오대천을 따라 흘러서 모이는 곳
말이다.
그의 문집인 ‘원재고’(圓齋●)에 시 몇 편이 남았는데 ‘금강담’(金剛潭)이 바로 이곳을 노래한 것이다.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를 씻어 내는구나.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나무가 사람을 몹시 근심스럽게 한다.”
또 그는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당은 문을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라며 월정사를 노래하기도
했다.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에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넓은 반석과 그 위에 고인 맑은 물, 그리고 두어 자 남짓한 폭포만이 있을 뿐이다. 글에 따르면
폭포의 높이가 적어도 3m 남짓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는 4월16일부터 5월1일까지 관동지방을 유람하고 ‘관동록’(關東錄)을 남겼는데 집을 떠나 평해와 울진의 불영사를 거쳐 삼척·강릉의 대관령을 넘어 뉘엿뉘엿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 오대산에 다다랐는데 그날은 4월26일이었다.
흐르는 물은 못을 이루고 그 깊이는 배꼽 정도에 닿으며 그 넓이는 수
묘(畝)에 이른다. 중의 말에 따르면 전에는 이 깊이와 넓이보다 두 배는 더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지난해 장마에 물길이 막히고 달라져서 그리
되었다 한다.”
이번 장마의 호된 경험은 물길뿐 아니라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놓지 않았는가. 그로 미루어 정추가 말한 금강연이나 그 후 많은 시인묵객들이 노래한 금강연의 모습은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노래되어 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 넓은 물에 비친 옥색 물빛만은 잊히지 않는다.
서대의 우통수에서 한강의 물길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오대산 각 대의 물이 모인 이곳이야말로 한강의 또 다른 시작이 아니겠는가.
미수 허목(1595~1682)의 문집 ‘기언’(記言)에 남아 있는 ‘오대산기’의 마지막에 월정사 아래에 있는 금강연이 한강의 원류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미수가 어찌 우통수를 몰랐을까.
그는 오히려 우통수를 신천(神泉)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굳이 그것 하나를
한강의 물줄기로 본 것이 아니라 오대의 모든 물길을 한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로 본 것이며 그 물줄기들이 모이는 금강연이야말로 한강의 발원지라고
한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언저리에 가 닿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지 않으면 부처님에게로 갈 수 없으며 햇살에 눈부시도록 빛나는 금강연의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 또한 허허로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오대산에 들어섰으면 전나무 숲길을 걸어 월정사만 보고 돌아 설 것이 아니라
월정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금강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거늘 수영금지 팻말은 걷어치우고 금강연의 내력을 담은 팻말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자연에 취하고 나면 더러 부처님에게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될 일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부처님을 찾기보다 대신 전나무 숲에 기대기로 했다. 아직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울창한 숲에는 느지막이 비춰든 햇살이 비스듬하게 걸려 있었다.
금강연을 지나며 더욱 넓어진 물길은 숲길을 따라 흐르고 저만치 스님 두엇이
포행이라도 나섰는지 느린 걸음이다.
아무리 못해도 수백 번은 걸었을 길이건만 이제야 눈에 띄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볕도 잘 들지 않는 작은 바위에 오대동문(五臺洞門)이라고 새겨 놓은 각자가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 쌍계사 들머리의 우람한 바위에 새겨진 굵고 활기 넘치는 글씨는
아닐지라도 분명 이곳이 오대산의 들머리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길에 대한 익숙함이 가져다 준 소홀이거나 혹은 오만이 내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십 여 년 전부터 해마다 스무 차례도 더 찾았던 길이었기에 마치 동네의 골목길을 지나다니듯 그렇게 무심했던 것이다.
그러니 잘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눈여겨보지 않는 우를 저지른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 연재를 처음 시작하기 위해 오대산을 찾았던 날도 서너 번 왕복을 하며 걸었건만 오대동문이라는 각자는 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마다 참으로 알아서 누구나 진실로 행한다면 온 저자 거리가 신선의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孰不曰知 眞知爲難 孰不曰行 實行爲難 人人眞知 人人實行 則滿市皆神仙矣)라는 글이 나온다.
그 글이 책상머리에 붙어 있어 날마다 되뇌면서도 생각은 했으되 행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또 깨닫는다.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나 자신 속에서의 익숙함이 빚어내는 소홀함이라고 말이다. |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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