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무장사지 가는 길
창현마을
2006. 7. 27. 16:43
무장사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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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세 번 물길을 건너고 겨울바람 맞아 찾아 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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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06 09:2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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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내일부터 강추위가 내습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벼르고 벼르던 무장사지를 찾아 나섰다. 흔히 경주에는 시내뿐 아니라 남산골이나 향교근처 그리고 낭산 주변이나 토함산 주위로 100여 군데가 넘는 절터가 있다고 한다. 그 절터들 중에는 퍼뜩 생각해 보아도 신라의 미소라 칭하는 막새기와편이 나왔고 아도화상이 3세기 말 신라에 처음 불교를 들여오면서 만들어진 흥륜사터나 우리가 잘 아는 황룡사지, 감은사지가 생각난다. 그 외 탑이 예쁜 토함산 장항사지나 남산의 용장사지, 경주 길가에서 지나치며 보게 되는 흥복사지, 천군동사지, 7번 국도를 따라 줄을 잇는 감산사지, 홍복사지, 원원사지 등도 손꼽을 수 있다. 그 중 늘 숙제처럼 가봐야지 하면서 못가다가 이 추운 겨울날 무장사지를 가게 되었다. 늘 마음만 있을 뿐, 시간에 쫓기던 탓과 절터를 찾아가는 길이 멀고 험하여 경주를 찾았다가도 선뜻 가보지 못하던 곳을 때마침 시간이 날 때 나서보자고 앞 뒤 재지 않고 길을 나선 것이다 절터를 다니다보면 의외로 쉽게 찾기는 경우도 있지만 예상외로 길을 잃게 되거나 헷갈려서 고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무장사지 역시 길 찾기는 쉬운 편이 아니다. 또한 길을 찾았다 해도 절터의 소재지인 암곡(暗谷)이라는 지명이 일러주듯 깊은 바위 골짜기를 2-3Km 걸어야 한다.
지난여름 영동 영국사(寧國寺)를 찾았다가 뙤약볕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산길을 돌고 또 걸었던 것처럼 무장사지 또한 개울을 건너는 길 없는 길을 걸어야 했다. 계곡을 파고드는 바람에 얼굴이 따끔거려 바삐 서둘게 되는 마음과 손을 주머니에 넣고 첫 개울물을 건너다 살얼음이 언 바위에 미끄러져 물에 빠져 넘어지고 말았다. 개울을 건너는 것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한 탓이다. 발은 물론이거니와 하반신은 다 젖고 상의의 주머니에도 물이 가득 찼으며 카메라가 바위에 부딪히고 모자가 물에 떠내려가는 중에도 이것저것들을 수습하여 물가로 나오려다 다시 한 번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바람 외에는 아무도 그 곳을 지나는 사람이 없는 겨울 오전에 우수수 바람결에 우는 나무들만이 무심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데도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조금의 방심으로 길 초입에서 부터 미끄러지고 만 스스로에게, 그 순간 온전히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또 한 번 물길에 빠져버린 황망함 때문이었다. 언 발을 바위에 두고 양말의 물을 짜내면서, 물이 고인 신발을 털면서 도로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길을 걸어 절터로 갈 것인가 잠시 혼돈과 갈등이 오고 갔다. 와보지도 않고 늘 가봐야지 하면서 미루던 일을 입구까지 왔는데 온 몸이 젖어버렸다고 포기하기에는 잠시의 혼돈과 갈등이 너무 나약한 생각이란 생각이 스치면서 젖은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고 길을 재촉하였다. 어떤 일을 하든지 성취해 가는 과정에 갈등과 고비는 있기 마련이라. 첫 물을 건너는 일조차 버거운 나는 어렵지 않은 일을 하는데도 조심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열 세 물줄기, 그 중 처음 빠진 물은 올 한 해를 살면서 나에게 주어진 경고음으로 돌리고 나머지 열 두 물줄기는 열 두 달이라 친다면 조심스럽고 신중한 처신이 나를 온전하게 올 한 해 넘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애써 자위를 해 본다.
따라서 무장사지의 얼굴을 만나기까지 내가 만난 열 세 곳의 개울 중 나머지 열 두 번의 개울을 건너는 일은 물속의 돌 하나를 밟는 것부터 훨씬 신중해졌고 젖은 몸을 겨울바람에 내맞기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며 마음은 어느 듯 여린 나뭇가지에 슬슬 물이 오르는 모습까지 감상하고 있었다. 무장사의 창건 역사는 <삼국유사> 권3, 흥법 무장사미타전에 근거가 남아있다.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인 대아간 효양이 파진찬을 지냈던 숙부를 추모하여 세운 것이며, 절 위쪽의 아미타전은 신라 제39대소성왕의 비 계화왕후가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 적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라고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불우조에도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무기와 투구를 골짜기 속에 감추었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 숙부를 위해 창건하였고, 또 효양의 손자며느리였던 계화왕후가 죽은 남편인 소성왕의 명복을 위해 미타전과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던 것으로 보아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에는 상당히 번성하였던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게 찾아간 무장사지는 검은 암곡(暗谷)의 한 귀퉁이에서 옅은 햇볕을 받고 날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밝은 얼굴로 맞는다. 우리나라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런 석조물들은 겨울에도 낯설지 않아서 좋을뿐더러 질감이 주는 매력은 금속성이 아니어서 차갑지 않고, 대리석처럼 매끈거리지 않아서 더욱 좋다. 내가 찾던 것들, 돌로 된 두 점의 보물도 그래서 언젠가 만났던 엣 친구처럼 반가웠다. 그 중 위의 높은 쪽에 낮게 자리 잡은 무장사아미타불조상사적비이수 및 귀부(보물 125호)가 드러나지 않게 웃어 보인다. 절터를 다니다 보면 이것처럼 비문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이 합체 된 모습의 것들을 자주 볼 수가 있는데 어쩌면 때때로 비문 없이 귀부와 이수만 있는 이 자체가 하나의 형식을 가진 문화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미타전에 보관할 아미타불의 조상사적에 대해서 기록한 비가 현재 비신은 부서져 파편만 몇 조각 남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귀부 비좌 4면에는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비좌의 옆에 놓여있는 이수는 6마리의 용이 운무 속에서 용틀임을 하면서 앞발로 여의주를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다. 신라의 것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남아 있으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물이라고 한다. 이곳의 귀부는 거북 두 마리가 받치고 있는 쌍귀부 형태이나 지금은 머라 부분이 둘 다 잘려나간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석재 자체가 마모가 심하여 부조된 조각을 완전한 형태로 알아보기가 어렵지만 또 그러면 어떠랴.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는 숭복사지의 귀부, 또, 창림사지의 귀부, 포항 법광사터 귀부 등도 쌍귀부 형태를 보인다. 발걸음 조금만 옮겨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 126호)이 숨겨 놓았던 제 몸을 내보인다.
두 층으로 된 낮은 1층 기단부 위에 8개의 돌로 짜 맞춘 2층 기단부가 조성되어 있다. 1. 2층 기단 부 모두 각 면의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 2개씩을 만들고 덮개돌을 올린 목탑의 양식을 살리고 있으며 2층 기단부에 있는 안상(眼象)이 각 면 3개의 기단돌에 두개씩 음각 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으로 9세기 이후에 조성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기단부에 음각 된 안상은 이 탑의 유일한 문양으로 모서리 기둥에 닿을 만큼 호방하고 시원스럽게 만들어져 있는데 가장 단순한 무문(無紋)의 탑에 화려하지 않게 작은 변화를 줌으로서 나름대로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숨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산지의 절에 조성된 탑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1층 몸돌에 비해 2, 3층 몸돌은 과감히 축약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에 의해 인위적인 비례미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부서져 흩어져 있던 몸체를 지난 1963년 일부를 보충해 다시 복원한 탓에 각 지붕돌의 완전한 형태가 상실되었지만 전형적인 지붕돌의 형태를 보이는 바, 층 끝이 완만한 경사로 들려지고 풍탁이 걸렸던 구멍들이 나 있으며 층끝받침은 보편적인 5단을 이루고 있다.
내려오는 길, 다시 열 셋 개울을 조심스럽게 건너고 걷는 길 중에서 물에 빠졌던 나를 기억한다. 한 해의 시작이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산길에서 물에 빠진 기억은 올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많은 약(藥)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한다. 사찰을 돌다보면 대개 대웅전 외벽에서 심우도(尋牛圖)라 부르는 열개의 불화를 볼 수가 있다. 다른 말로 목우도(牧牛圖)나 시우도(十牛圖)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목동(수행자)이 소(본성=本性)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구비구비 길을 걷고 물을 건너면서 문득 심우도(尋牛圖)생각이 났다. 나는 수행자도 아닌 범부에 그칠 뿐이라 사람도 소도 공(空)이라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나 있는 그대로 전체를 깨닫는다는 반본환원(反本還源),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중생제도를 위해 길거리로 나가는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무엇인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사는 일이 모두 이렇게 길을 걷고 물을 건너는 것이며 모롱이를 돌고 돌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심우도(尋牛圖)의 첫 단계로 동자가 소를 찾기 위해 고삐를 들고 산 속을 헤매는 장면인 심우(尋牛)만 자각하고 살아도 좋을 법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직은 선(善)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로 공부를 시작하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루를 살면서도 방향감각을 잃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이런 기본적인 자각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젖었던 몸이 마르고 질퍽거리던 신발도 말라간다. 쌀쌀한 바람도 여전하건만 무장사지 돌아 나오는 길이 그리 춥지 만은 않았다. |
출처 : 데일리안/배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