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강릉 선교장 (船橋莊) 7 - 선교장에 대하여 5

창현마을 2006. 6. 29. 14:13

 

 

     강릉 선교장 (船橋莊)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활래정의 운치와 금강송

 

 

―현재 선교장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선교장의 중간사랑에 전시되어 있는 ‘돈궤’가 볼 만합니다. 높이 150cm, 너비 3∼4m 크기인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궤일 겁니다. 선교장의 부를 상징하는 유물이죠.”

 

종손인 이강륭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7월 하순 연꽃이 한창일 때 선교장을 방문하였다. 선교장을 지키고 있던 이강백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홍련이 그림처럼 피어 있는 활래정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달빛 속에서 큰 부채만한 연꽃잎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듣는 호사를 이틀이나 누렸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도 하고 개인사업도 하다가 집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10년 전부터 선교장에 거주하는 이 집 차남 이강백씨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서 대장원을 지키고 계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저희 집이 1703년에 처음 지어졌고 1983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니까 2002년이면 집 역사로는 300주년이 되고 공개되기는 20주년이 됩니다.

 

그런데 목조건물은 사람이 거주해야 생기를 유지하는데, 사람이 살지 않으니까 건물들이 급속하게 낡아 걱정입니다. 작년에 강원도 백두대간을 휩쓴 산불이 났을 때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선교장 1km 전후방까지 산불이 왔었어요.

 

강풍 때문에 소방 헬기도 못 떴어요. 송진에 불이 붙은 불똥이 수백m까지 날아다녀 언제 집에 불이 붙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어요. 그때 집은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집 뒤의 소나무만큼은 제발 무사하라고 기도했습니다.

집이야 불타도 재건축할 수 있지만, 집 뒤의 수백년 된 소나무는 한번 불타면 다시는 복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람이 1시간만 더 불었어도 다 탔을 겁니다. 저는 선교장 건물보다 저 소나무들에 더 애착이 갑니다. 저 소나무만 바라보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어떤 종류의 소나무들입니까.

“수령이 대략 300년에서 600년 된 금강송(金剛松)입니다. 근래에 솔잎혹파리로 인해 많이 죽고 한 20여 주가 남았어요. 동해안의 강릉 삼척 영월 일대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죠. 키가 큰 미남 같은 소나무입니다. 사진기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소나무 숲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연차·연엽주·연잣…

 

―활래정의 연꽃을 가지고 연차(蓮茶)를 만든다고 하던데요.

“연으로 여러 가지를 만듭니다. 저희 집에서 어른들이 연차를 만들 때는 연꽃 잎만 따서 물에 달여먹었어요. 연꽃의 꽃술은 사용하지 않아요.

 

꽃술에는 독이 있다는 것 같아요. 연잎을 가지고 연엽주도 담그죠. 연 뿌리는 코피 멈출 때 효과가 있고, 연꽃 열매인 연잣(실)은 한약재로 씁니다.

닭을 연잎으로 싸고 그 위에 황토를 바른 다음 장작에 구우면 맛이 아주 좋습니다.

닭에 연향이 배어들기 때문이죠. 제가 경험한 바로는 비오고 난 뒤에 태양이 뜰 때 연향이 가장 진합니다. 머리가 상쾌하고 몸이 가뿐해지죠.”

 

―선교장은 계속 유지될 것 같습니까?

 

“재산상속법이 문제입니다. 요즘 상속법은 옛날같이 장남이 전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차남들과 딸들도 동등하게 유산을 분배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법에 따르자면 선교장도 여러 자식에게 골고루 분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집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지죠. 저희 대에는 저를 포함한 동생들이 자발적으로 상속권을 포기하고 장남인 형님에게 유산을 몰아주었는데 다음 대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집 후손 가운데 서울에 있는 열화당 출판사의 이기웅(李起雄, 61) 사장 역시 선교장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열화당 출판사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미술 전문 출판사인데, 사장인 이기웅씨는 고등학까지 선교장에서 다녔다. 종손 이강륭씨의 당숙이다.

 

―열화당이라는 출판사 이름은 선교장의 열화당에서 따왔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열화당 아궁이에 지피는 군불은 제가 땠어요. 그래서 유년 시절부터 열화당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화당은 단순한 사랑채가 아니라 족보도 찍고 문집도 발행하는 출판기능을 가진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그 기본 정신은 저희집 열화당의 인문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지었습니다.

 

출판사 열화당은 1971년에 시작되었지만 선교장 열화당의 시작은 1815년이었으니까, 통틀어 계산하면 열화당 출판사의 역사는 1815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받은 이기웅 사장의 명함에도 열화당 출판사의 출발은 1815년이라고 자그마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열화당 출판사는 한국에서 가장 뿌리 깊은 출판사가 된다.

 

한국의 인문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이사장의 신념이 담긴 대목이다. 그것은 선교장의 깊은 역사에서 배어나온 자부심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출처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