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현마을
2006. 1. 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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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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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慧璘)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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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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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이 타계한 다음 그의 법을 이는 진각 혜심(眞覺 慧諶) 스님은 수선사의 전통을 이어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다시 절이 비좁게 되었다. 강종(康宗)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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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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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에 응선(應禪)화상께서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지리산에 계시던 부휴 대사를 모시어 불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때 600여 명의 제자들이 송광사에서 부휴 대사의 지도로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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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8년(1842)에 큰불이 나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정유재란 이후 두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부터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년(1856)까지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려 2,1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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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중창으로부터 70, 80년 뒤인 1922년에 주지 설월(雪月)스님과 율암(栗庵)스님에 의하여 1928년까지 퇴락한 건물들을 고치고
개와를 바꾸는 등 전반적인 중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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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과 6.25사변의 발발은 조계산 송광사 일대를 공비의 노략과 살육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산중에 은신한
이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국군 토벌대는 작전상 절 주변의 숲을 벌채하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공비들이 1951년 2월 절을 지키던 노인들을
학살하고 5월에는 절에 불을 질러 대웅전등 중심부를 불태워 버렸다. 1955년부터 주지 금당(錦堂)스님과 화주 취봉(翠峰)스님의 원력으로 5년
동안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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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九山)스님께서는 승보 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된다는 원력에, 사부대중이 뜻을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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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도 계속하여 관음전, 문수전, 정혜사(定慧社) 등의 해체 중창과 산내암자 복원불사 및 국보 국사전과 국가보물인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등의 보수를 하였고, 특히 2000년부터 임경당, 해청당, 사자루, 응진전, 불조전, 월조헌, 취정루 등의 중요 건물을
대대적으로 해체 보수하고 종무소, 선호당(善護堂), 다송원(茶松苑), 효봉영각, 수석정, 죽림정사, 목우농원 등을 신축 또는 중창하여 현재
80여 동(棟)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으며, 지금도 계속하여 산문 진입로의 옛길 복원 및 건물 보수불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송광사에서는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보 제42호인 목조삼존불감, 국보 제43호인 고려고종제서, 보물
제572호인 수선사형지기, 보물 제1366호인 화엄탱화, 보물 제1376호인 티베트문법지 등 기타 동산문화재(動産文化財)와 고문서(古文書)
전적류(典籍類)의 과학적인 보수(補修) 및 보존처리와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계속하면서, 성보박물관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각종 특별전시회를 기획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조계총림의 선원, 율원, 강원에서는 150여명의 스님네가 모여 보조국사의 정혜결사정신을 이어 여법히 정진하면서 내실(內實)있는
수행불사(修行佛事)를 진행 중이다. 또한 해마다 유명한 여름수련회와 각종 세미나를 열고 사보(寺報) 발간 및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포교하면서 제4의 사이버 종찰(宗刹)이 되도록 정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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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의 사계절 아름다운 정경들

송광사 전경

대웅보전의 웅장한 모습

송광사에 첫눈 내리고...

송광사의 대표적인 명소 - 우화각에 봄이찾아 오고...

초파일의 연등이 가득찰때면 ........

아직은 초봄의 기운이 동백에 머물러 있어.......

화사하게 만개한 벗꽃따라 봄빛이 영글어 가고......




우화각에도 여름으로 계절이 익어갈때면 쪽빛으로 변하기시작하는 물빛이.........




아래 사진은 송광사 3대 명물(능견난사, 쌍향수, 비사리구시) 중의 하나인
비사리구시
1724년 남원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조선 영조이후 국제를 모실때 밥을 저장했던 통이다.
약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비사리구시가 만들어진 것이 280년전이고 나무가 이정도 크려면 수백년은
되었으리라.
그리고 이 비사리구시로 밥을 먹었을 사람들은 또 얼마일까?
장구한 세월의 흔적에 잠시 숙연한 마음이 ........

송광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로 알려진 임경당과 우화각.
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사진을 찍는 곳이며 송광사 입장권에 이 사진이
있다.





선암사로 넘어가는 길에 들러가는 쌍향나무

송광사 앞마당에도 흰눈이 내리면 보는이의 마음이 정갈해진다
















대웅보전뒷편의 설법전

관음전엔 가을이 깃들고....

우화각에도 흰눈이 내리면 한해가 같이 저물어간다
출처 : 송광사 홈
송광사
바로가기 www.songgwangs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