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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문화재를 찾아서 61 - 국보 제 67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求禮 華嚴寺 覺皇殿)

창현마을 2015. 1. 1. 14:39

 

 

국보급 문화재를 찾아서 61

- 국보 제 67호 구례 화엄사 각황전 (求禮 華嚴寺 覺皇殿)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 큰절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각황전터에는 3층의 장육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만여점이 넘는 조각들만 절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앞면 7칸·옆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집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라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인데, 벽쪽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경사지게 처리하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건물이 매우 웅장하며 건축기법도 뛰어나 우수한 건축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문화재청 자료>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본래 이름은 장육전이다.

부처님의 몸을 가리켜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고 해서 본래 장육전에는 석가 여래의 모습만한 금색의 불상을

모셔놓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본래 이 건물은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에 의상대사가 3층, 사면 7칸의

장육전을 건립하고 사방벽에 화엄석경을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장육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당시의 모습이나 불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화엄사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30년 만인 조선 인조 14년(1636년) 벽암선사가 복구했으나 각황전만은

복구되지 못했다가 조선 숙종 25년(1699년) 계파대사가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643년(인조 12년)에 재건한 것이다.

성층(成層)으로 높이 쌓은 석단(石壇) 위에 서향(西向)하여 서 있다.

정면 7칸(26.8m), 측면 5칸(18.3m), 높이 15m로 내부 전체가 한 칸의 방으로 만들어졌다.

중층(中層)의 웅대한 건축물로써 그 내부에는 청판(廳板)을 깔아 중앙의 5칸 3면에 기둥을 세웠다.

기둥 하나 하나는 한 그루의 나무로만 만들어져 있다.

중앙에 불단을 설치하여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천장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주변이 경사지게 한 것은

한국에서 그 예가 드물다.

 

 

 

 

 

 

 

 

 

 

 

 

 

 

 

 

 

 

 

 

 

 

 

 

 

 

 

 

 

 

 

 

 

 

 

 

 

 

 

 

 

 

 

 

 

 

 

 

 

 

 

 

 

 

 

 

 

 

 

 

 

 

 

 

 

 

 

 

 

 

 

 

 

 

 

 

 

 

 

 

 

 

 

 

 

 

 

 

 

 

 

 

 

 

 

 

 

 

 

 

 

 

 

 

 

 

 

 

 

 

 

 

 

 

 

 

 

 

 

 

 

 

 

 

 

 

 

 

 

 

<일부 사진 문화재청 및 위키 백과사진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