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릉의 실체는 .........??
구형왕릉의 실체는 .........??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는 가락국(駕洛國) 제10대 왕인 양왕(讓王)의 능이라고 전하는
돌로 된 무덤이 있다.
이 석능(石陵)은 그 형식이 층과 단을 이룬 모난 형으로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앞면이 7단을 이루고 뒷면으로 갈수록 경사가 저서 층계의 높이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정상(頂上)은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앞면의 높이가 총 7.15m이고 제4단 동쪽면에 가로 세로 각 40㎝에 깊이 68㎝의
감실(龕室)이 있다.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에 의하면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년) 겨울에 구형왕이 방장산(方丈山)의
태궁왕(太宮王)에서 마치니 시(諡)를 양왕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일설에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고 전한다.
왕릉은 한때 잊혀지고 있었던 것을 다시 찾게 되었다고 하는데, 왕릉을 다시 찾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왕릉의 윗쪽 산 속에 왕산사(王山寺)라고 하는 절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만나 왕산사에 들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왕산사에는 언제인가부터 법당 들보 위에 커다란 나무궤(木机)가 하나 얹혀 있었는데
누구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손댈 수 없는 것으로만 전하여 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를 피하는 일행 중에 민경원이란 분이 있었는데 평소에 담력이 센 분으로서 꼭 그 목궤를
내려 볼려고 하였더니 주지는 물론 일행 모두가 강력히 만류하였는데도 끝끝내 이를 물리치고
신비에 쌓인 궤를 내려서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그 속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影幀)과 옷 그리고 활과 칼같은 유물이 나왔고,
또한 명승(名僧) 탄영(坦瑛)의 왕산사기(王山寺記) 등이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자손들이 수축하였으며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서기 1793년(조선 정조 17년)에
덕양전(德讓殿)을 짓고 오늘까지 전하여 오면서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구형왕릉은 1971년 2월 9일에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