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창현마을 2008. 1. 28. 11:12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삼국시대의 조형미술은 불교의 수입과 더불어 아름답게 꽃피웠다.

 

특히 서기 6~7세기는 삼국의 불교문화가 절정을 이룬 것이며, 이중에는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단연 정수로 손꼽힌다.

 

 

 



 

 

 이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총높이 83.2cm이며, 현재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그리고 현재 국보 제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어디에서 출토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보살상에 대해서도 황수영교수가 쓴 해설에는 신라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수막새(와당) 등에 나타나는 삼국의 미술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고구려적인 특징이 훨씬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강우방, 이화여대 교수).

  삼국 시대 말기의 신라 미술은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므로, 그런 영향 속에서 신라에서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기는 하나, 강하고 예리한 옷주름이나 볼륨감은 고구려적인 특징을 훨씬 많이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보살상의 관은 탑형(塔形) 보관(寶冠)이라고 불리기도 하고(황수영 등), 일월식(日月式) 보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강우방).

 아래 그림은 국보 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 보살 반가 사유상이며, 백제시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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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 최대의 금동반가상이다. 기본형에 있어서 한쪽 다리를 걸치고 손에 가볍게 턱을 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성을 보인다.  이것은 곧 백제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반가 사유상을 제작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것을 본받았으면서도, 그들만의 간결하고 부드러운 문화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국보(國寶) 제78호 반가상이 직절적(直截的)이고 날카로우며 장식적이고 기교적이라면, 이것은 풍요 원만한 지체(肢體)와 간소 명랑한 표현형식이 오히려 감각적인 육체를 통하여 생동하는 미를 볼 수 있다는 평가다.

  머리에는 조그맣고 둥근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얼굴은 거의 원(圓)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한데, 눈은 가늘고 눈썹은 아름다운 고선(孤線)을 그리며,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길게 늘어진 귓불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상반신은 전라(全裸)의 모습이며, 몸에는 목에 2줄로 표현된 목걸이가 걸려 있을 뿐 아무 장식도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좌(蓮座)를 밟고, 오른발은 그 무릎 위에 얹어 놓았는데, 왼손으로 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아랫몸을 덮은 하상(下裳)은 매우 얇아서 아랫몸의 표현에 충실하고, 쌍판(雙瓣) 복련(複蓮)의 대좌(臺座)를 덮은 옷주름은 깊고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연화대(蓮華臺)가 거의 다 드러나 있는데, 왼쪽으로 규옥(圭玉)을 맨 상의(裳衣)띠가 내려가고 있다.

 

뒷머리부분에 긴 촉이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원래 광배(光背)가 있었던 것 같다. 온몸에는 도금(鍍金)한 위에 칠금(漆金)을 올렸던 듯 금빛이 은은하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에 의한 조사를 한 결과, 머리부분에서 몸통에 걸쳐 4각 막대기의 지주가 박혀 있고, 왼발부분에는 보수한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도 못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 불상은 막연히 경주(慶州) 오릉(五陵) 근처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전하나 근거 없는 말이며, 아직 그것이 전해져 오는 유래를 알 수 없다. 다만 조각수법으로 보아 국보(國寶) 제78호 반가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三國) 말기에 가까운 시기의 제작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외와 같은 반가사유상은 신라 역시 제작 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삼국은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모방하엿으면서도, 또한 나름대로의 개성적이고 고유한 미적 세계를 추구 하였다.

 

이 반가 사유상은 삼국이 상호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이 반가사유상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견해도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목조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이 국보 1호로 지정되었고, 또 그것은 백제의 것을 모방하였거나 백제에서 내려온 하사품이라는 것에 있다. 우리나라의 민족적 우월주의를 내세우자는 뜻이었을까? 일본에서는 국보의 가치에 따라 번호를 매긴다고 하는데, 그러나 국보가치에 서열을 둘 필요가 있겟는가?


 국보로 지정되었을 때는 그 모든 유물들이, 고유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은 오랜 默想(묵상)끝에 도달한 깨달음의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고뇌와 번민에 가득찬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마도 이러한 미의 세계 속에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열하였던 삼국시대에, 평화와 안식을 찾으려는 그시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출처 : 히스토리어님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