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용주사를 찾아 2 ; 용주사창건 내용 - 경기 수원

창현마을 2007. 6. 19. 16:41

 

 

      용주사를 찾아 2  ; 용주사창건 내용

 

             -  경기 수원

 

 

 

 전강대종사사리탑

 

 

 

 

 

 

 

 

 세존사리탑과 천보루

 

 

 

 

 

 

 

 천보루서편

 

 

 

 

 

 

 

 세존사리탑과 범종각

 

 

 

 

 

 

 

 

 효행박물관

 

 

 

 

 

 

 

 

 

 

 

 

 

 

 

 

 

 

 

 

 

 

 나유타료

 

나유타료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으며 한편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알지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과정일 뿐이니
다시 부모미생전의 한구절로 도는 시험해보세
.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현재 대중회의때 사용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큰 방 내부의 중앙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는데, 용상방은 결제(結制)나 큰 불사가 있을 때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 직책과 해당자를 명시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입니다.

 

내용을 보니 조실(組室)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직명과 스님이름이 적혀있어 중앙선원을 중심으로 한 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전강대선사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선원장인 송담선사께서 당신생존까지는 선사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던 까닭이라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성이라 하겠습니다

 

 

 

 

 

 

 

 나유타료와 지장전

 

 

 

 

 

 

 

 지장전

 

 

 

 

 

 

 

효성전과 부모은중경탑

 

 

 

주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습니다. 갈양사터는 천여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이 창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용주사의 범종(국보 제120호) 오른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연기(緣起)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되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불기 2950년 7월 주기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기록은 1923년 당시 주지였던 강대련(姜大蓮, 1875~1942) 스님이 적은 것으로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는 기록입니다. 또다른 범종 뒷면에는 창건주 염거스님의 명문도 새겨 있는데,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釋) 반야(般若)가 2만5천근을 들여 주성(鑄成)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0일 사문 염거 (廉居)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넣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금상십육년(今上十六年)이라는 연기표현은 신라시대에는 없었던 표기법이고 더우기 범종은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이후 후대에 추각(追刻)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염거화상 이후 갈양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인데, 고려 제 4대 광종(光宗)21년(970), 혜거국사가 수주부(水州府, 수원의 옛이름)의 갈양사가 산수가 빼어나 국가대만대의 복지(福地)를 위하여 국가의 영원한 축원도량으로 삼으라 하여 임금이 이에 따라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으며, 혜거국사는 이곳에서 참선수행에 몰입하고 조계종풍을 드날리다 974년 12월15일 입적하였습니다.

 

국가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적지 않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나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절 자체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선왕조가 전기간을 통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불교는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조선 5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던 가운데도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세조대(世祖代)나 명종대(明宗代)와 같은 불교부흥의 시기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새롭게 창건된 사찰도 의외로 상당한 숫자에 이릅니다. 또한 성리학 관료들의 서슬퍼런 감시 속에서도 역대 비(妃)·빈(嬪)들의 신불행위는 그칠줄 모르는등 그 나름대로의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불교에 대한 획일적인 이해태도는 앞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주사는 정조(正祖)라는 당대의 군주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성리학의 통치이념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사찰창건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시대의 군주·관료·왕비 등이 보여주었던 신불활동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검토하다 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한 많은 수의 인물들이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성리학이 일상생활의 생활규범으로 인식됨과 아울러 정치 철학의 통치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반면, 불교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 즉 종교로서의 위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용주사 창건도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하는 직접적인 배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지극한 효심에서입니다.

도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선( ),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였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였습니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자《한중록(閑中錄)》의 작자로 유명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1735~1815). 사도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는데 그가 이처럼 어린 나이에 세자의 책봉을 받았던 건 그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이미 사십의 나이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한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효경(孝經)을 외웠다고 하며, 7세때에는《동몽선습(童蒙先習)의 내용을 완전히 익혔으며, 또한 수시로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이미 군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하게 갖추었지만 당파의 정략적 음모와 계략으로 갑작스럽게 기행과 패륜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자를 둘러싼 노론(老論)·소론(少論)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부왕과 세자의 원만했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어린 시절부터 노론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냈던 세자가 정사를 맡게 되자 노론세력과 그 동조세력인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숙의문씨(淑儀文氏) 등이 세자를 계속 모함하였으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여 수시로 세자를 꾸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종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세력의 영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았고, 이어 1761년(영조 37)과 그 이듬해에 걸친 나경언(羅景彦)등의 상소로 인해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조는 열한살의 나이로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고 비록 할아버지인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즉위 이후에 보여준 그의 효성스러움을 본다면 얼마나 부친의 죽음에 대해 비통스러워 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5세가 되던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부친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당쟁의 탕평을 위해 진력, 즉위하자 곧 부친을 장헌세자로 추존(追尊)하였으며, 노론의 당론을 앞세우던 벽파(僻派)의 일당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부친의 죽음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을 홀로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해주었고, 노론에 세력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의 젊은 관료들도 적극 등용하였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세손시절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홍국영(洪國榮)마저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탕평의 노력으로 인해 정조대는 정치·사회·문화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일부에서는 이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정조의 치적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정사 못지않게 비명에 간 부친을 추모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대표적 성군(聖君)으로 세종(世宗)과 정조를 들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모습, 즉 탁월한 정치능력과 풍부한 인간미가가 겸비된 데서 따르는 평가인 것입니다. 아래에 소개되는 일화는 정조가 얼마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 양주땅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긴 정조대왕은 자나깨나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져간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경(還京)길에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陵寺)를 당부하곤 하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러치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총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대왕의 눈에 띄자 순간 대왕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하느냐" 하고 송총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대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 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隆建陵) 주변에서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용주사가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음도 정조의 정신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용주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정조의 왕권 강화의 노력과 불교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점이며, 수원성의 축조, 사도세자묘의 천릉(遷陵), 용주사의 창건 등의 사례가 왕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왕실의 능침사찰(陵寢寺刹) 건립이 100여년 이상 중단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용주사 창건을 추진하였다는 사실과, 용주사 이후에는 능침사찰의 건립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없이는 창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또한 재위 초기에 억불의 성향을 보이던 정조가 불교관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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