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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41) - 암문(暗門) 1 ; 개요

창현마을 2007. 3. 28. 16:55

 

 

 

 

수원 화성 (41) 

 

 

        -  암문(暗門)  1  ; 개요
 

 

성곽에는 흔히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데 이것이 암문이다.

 

화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곧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서남 암문, 남암문이다.

 

 

 

 

 

서남암문

 

서남암문은 서암문의 남쪽 367보 되는 곳에 있는데 용도(甬道)가 실지로 시작되는 곳이고 화양루의 통로가 된다.


  벽돌로 된 홍예는 안쪽의 너비가 7척 높이가 8척 5촌이고 바깥 너비 6척 높이 8척이다. 위에는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그 안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포사(鋪舍)이다.

 

  서남포사는 암문 위에 있어 높은 곳에 의거해서 멀리까지 볼수 있기 때문에 군졸을 두어서 경보를 알리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집의 제도는 사방 1간이고 높이는 8척 5촌이다. 여기에 온돌 을 놓고 사면에 판문(板門)을 설치하고 그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었는데, 단청은 3토를 사용하였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서암문

 

서암문은 서장대의 남쪽 44보 되는 곳, 즉 팔달산 남쪽 기슭 사이에 있다. 
성을 쌓은 것이 꺽이어져 있어 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문이 있는지 모른다. 벽돌로 홍예를 만들었는데 안 쪽의 너비는 5척 6촌 높이는 7척 7촌, 바깥 쪽은 4척 1촌 높이는 7척 2촌이다.

안팎으로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곳의 제도와 같다.


문은 산의 허리에 있고 길은 성 위로 났기 때문에 문 안의 체석(石)은 저절로 네모난 구덩이가 되었다. 돌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 위로 드러난 길과 숨겨진 길을 통하게 하였다.

 

 

 

동암문

 

동암문은 동장대 서쪽 166보 되는 곳에 있다. 동쪽에 자리잡고 북쪽을 향하여 있으며 벽돌로 안과 밖의 홍예를 만들어 말 한필이 지나갈 수 있다. 

안쪽 너비는 7척 높이는 8척이고 바깥은 너비가 6척, 높이가 7척 5촌이다. 문 위는 벽돌을 깔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오성지와 한 개의 큰 둥근 여장을 설치하였는데 마치 나무로 만든 전붕(戰棚)의 제도와 같다. 좌우는 각각 비예를 갖추었고 안쪽은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였다. 나머지는 남암문과 같다.

 

 

 

 

북암문

 

북암문은 동북각루의 동쪽 40보 되는 벽돌로 쌓은 성 사이에 있다. 
안과 밖의 홍예 역시 벽돌로 쌓았다.

 

안쪽은 너비가 4척 6촌 높이가 6척 5촌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4척 높이가 6척이다. 문위에는 둥근 여장을 설치했는데 제도는 동암문과 같다. 홍예 사이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여 들어가는 곳은 높고 나오는 곳은 낮게 만들었는데,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남암문

 

남암문은 팔달문 동쪽 79보 3척이 되는 곳에 있고, 남쪽을 향하고 약간 후미진 곳에 있다. 암문이라는 것은 성의 사잇문이다.


고제에는 사잇문을 후미진 곳에 두어서 적들이 그 길을 알지 못하도록 하고, 사람·가축·수레·양식은 모두 이 문으로 통하여 들여온다. 흙으로 문을 막으면 성과 같이 되어 통하게 할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어 임기응변할 수 있게 하였다.


성벽에다가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제도는 정문과 같이 하였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 안쪽의 너비는 13척 1촌이고 높이는 12척이다. 바깥 쪽의 너비는 11척 8촌 높이는 11척 5촌이다.


  문 위에는 덮개판을 대고 판 위에는 회를 더 붙여서 안과 밖을 여장으로 겹으로 쌓았다. 밖은 비예(煞)만을 설치하고 누는 세우지 않았다.

 

다만 흙을 채우고 잔디를 덮어 성 위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문선(門扇) 안은 쇠로서 빗장을 설치하였는데 정문과 같게 하였다.

 

현재 모두 복원·수리되었으나, 남암문은 아직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