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수원 화성 (4) - 성문 3 ; 팔달문

창현마을 2007. 3. 21. 17:52

 

 

 

 

 

  수원 화성 (4) 

 

              -  성문 3 ; 팔달문

 

 

 

 

 

 

 

 

 

 

 

 

 

 

 

 

 

 

 

 

 

 

 

 

 

 

 

 

 

 

 

 

 

 

 

 

 

 

 

 

 

 

 

 

 

 

 

 

 

 

 

 

 

 

 

 

 

 

 

 

 

 

 

 

 

 

 

 

 

 

 

 

 

 

 

 

 

 

 

 

 

 

 

 

 

 

 

 

 

 

 

 

 

 

 

 

 

 

 

 

 

 

 

 

 

 

 

 

 

 

 

 

 

 

 

 

 

팔  달  문

 

 

 

 

 

화성의 남문 팔달문은 도시의 한복판에 그것도 도로의 한가운데 외로이 서 있다. 북문인 장안문은 쇠 구름다리를 놓아서 사람 냄새라도 맡을 수 있지만, 팔달문은 오늘도 쓸쓸히 혼자 서 있다.

 

화성의 정문이면서도 임금의 행차를 먼저 맞이한다는 이유로, 정문의 자리를 장안문에 내주었던 시절에는 그래도 지금처럼 쓸쓸하지는 않았다. 팔달산에서 내려온 성벽이 이 문을 지나 남수문으로 연결되면서 좌우로 남서적대와 남동적대를 거느렸고, 남공심돈과 남암문도 지척에 있었다.

그러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팔달문 일대가 먼저 번화한 거리가 되면서 주변 시설을 모두 잃었다. 도시화로만 본다면 정문에 걸 맞는 영화도 누린 셈이다.

 

 더구나 6.25 전쟁 때도 폭파되지 않아 보물로 지정을 받는 영광까지도 누렸다.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다." 이 말대로 팔달문은 보물 402호, 서문인 화서문은 403호로 지정 되어 보호 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우리가 진정으로 팔달문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먼저 주변을 에워싼 환경과 도로 때문에 팔달문이 받게 되는 물리적, 혹은 화학적 손상을 측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기적이고 정밀한 점검을 통해 보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이 팔달문 주변의 교통 통제다. 일정 무게 이상의 차량을 못 다니게 하거나 속도를 줄이게 해야 한다. 아니, 안내판을 설치해서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세계의 문화유산을 소유한 시민이 되는 것이고, 화성을 잘 지켜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직까지 별 일 없었다고 방심할 일이 아니다. 이미 노쇠한 팔달문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노익장을 과시하듯 팔달문이 굳건한 것은 그 기초가 튼실하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약 26미터, 동서로 약 56미터를 약 4.2미터 깊이로 파내고 모래를 다져서 기초하였다.

 

장안문의 기초보다는 약 1미터가 더 깊은 셈인데, 땅을 다섯 자쯤 파내려 갔을 때 샘물이 솟아나와서, 여럿이 두레박으로 나흘 동안 번갈아 퍼내고 아홉 자를 더 파내려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깊고 튼튼한 기초 덕분에 팔달문은 자동차의 홍수 속에서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팔달문을 비롯한 사대문의 견고성을 엿볼 수 있는 게 또 하나 있다. 팔달문 바깥 남동쪽 오른 편 석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가 그것이다.

공사 실명제를 실천한 흔적인데 석벽의 일부를 고운 정으로 다듬고 글씨를 새겼다. 석축을 쌓고 아름다운 무지개 돌 문을 만든 주인공들인데 석수는 김상득을 비롯해 85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감동관은 공사 감독이나 감리의 일이라고 보여지는데 김낙순과 이방운 등 전직 관료가 맡았다고 쓰여 있다.

 

이름을 걸고 하는 공사였으니 그 엄정함이 대단했을 것이다. 이백 여년 전의 공사 실명제인 셈인데 요즘의 부실 공사와 연관 지어 생각하면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그러나 어제 새긴 듯 선명한 글자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이 기울인 정성에 비해 너무도 대접이 소홀하다는 느낌이다

 



팔달문은 석축의 무지개 문과 이층의 누각, 그리고 벽돌로 쌓은 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 좌우로는 남동적대와 남서적대가 있어 문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공사 일정을 보면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팔달문의 완공은 1794년 9월 15일이어서 장안문보다 열흘이 늦고, 남옹성은 1795년 5월 20일 완공되어서 장안문의 북옹성보다 약 3개월이 늦다. 그러나 좌우 두 적대는 장안문의 적대와 같은 날인 1795년 2월 28일 완성되었다.

그런데 팔달문의 적대들은 장안문 적대들의 현안이 셋 씩인데 비해 현안을 둘 씩만 두었다. 이런 공사 일정과 적대들의 현안 숫자가 나타내는 것이 바로 장안문과 팔달문의 중요성 차이라 할 것이다. 대개의 성들에서는 남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지만 수원의 화성에서는 북문인 장안문이 제1정문, 팔달문이 제2정문인 것이다.

 

이는 두 문의 공사비를 봐도 알 수 있다. 팔달산의 이름에서 문 이름 팔달을 취했는데 이는 팔방으로 통할만큼 교통이 매우 편리한 모양을 나타내는 것이니 세상의 어느 문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이라 하겠다. 팔달문 주위를 에워싸고 흐르는 자동차의 물결들을 보면서 기초를 생각하고, 공사 실명제를 떠올린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아내라고 하는 것이 팔달문이 주는 좋은 교훈이다. 팔달문에는 과거의 이백 여년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다가올 새 천년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글출처 : 수원 화성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