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얼이 담긴 문화재

석가탑 역사 미스터리?

창현마을 2007. 3. 21. 09:04

 

 

 

석가탑 역사 미스터리?

 

 

[중앙일보] 2007년 03월 21일(수) 오전 05:08

 

 

[중앙일보 조현욱] 중수기 판독을 통해 석가탑에 숨어 있던 비밀은 한꺼풀 벗겨졌지만 의문점도 남는다. 중수기 판독문에 따르면 '석가탑의 최초 완공 연대는 신라 혜공왕(재위 765~780)대'이며 '(고려시대인) 1024년 탑을 부수고 나눠 무너뜨렸다'고 돼 있다.

우선 궁금한 것은 탑을 세운 지 244~259년 만에 왜 다시 만들어야 했는지다. 하지만 그 이유는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렇다면 '부수고 나눠 무너뜨린 뒤'에는 어떻게 했을까. 판독문을 번역한 한국학 중앙연구소 안승준 전문위원은 "새로 지을 때 돌을 어디서 구해 왔는지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부수어 쪼갰던 제석(第石.탑의 재료로 쓰인 돌)은 장수사에서 통석(筒石.둥근 통 모양의 돌로 추정) 하나를 마련했고 절(불국사) 남쪽 개울의 돌을(가져다 썼고), 무슨 무슨 돌의 모양은 칠전원(절 이름) 동쪽에 있는 통석을 가져다 조각했다'는 부분이다.

모양이 신라 때 그대로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이와 관련, 국내 석탑 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단국대 박경식(사학과) 교수는 "석가탑은 양식이나 제작기법상 전형적인 신라탑"이라고 강조하고 "만의 하나 고려 때 다시 만든 것이라 해도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까지는 신라 때 만들어 보수한 사실도 흔적도 없는, 원형 그대로의 탑으로 알고 있었다"며 "앞으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탑을 새로이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수기 자체에도 의문점은 있다.

안 위원은 "1024년에 작성한 중수기인데 바로 이때의 고려 왕 이름인 '현종 원문대왕'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종은 죽은 왕에게 붙이는 묘호이니 당대에 쓴다면 '주상' 또는 '금상' 등이라고 표현해야 옳다"며 "탑을 중수한 때와 중수기 작성 시기가 다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중수기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우선 중수기는 1966년 탑신 내부에서 처음 발견될 때 110여 장의 종이가 떡처럼 뭉친 형태로 나왔다.
 
그 안에는 1038년 제작된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석가탑 중수 때의 사정에 대한 기록)도 들어 있다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밝혔다. 1038년에도 탑을 수리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 종이덩어리 속에는
 
▶보시명공중승소명기(布施名公衆僧小名記:보시한 스님들의 이름 기록)
 
▶보협인다라니경 등 총 4종의 기록이 들어 있었다. 발견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문서들의 제목이 이제 나왔을 뿐이다. 안 위원은 "보존 처리가 끝났으니 학자들에게 문서 원본을 공개해 석가탑을 둘러싼 여러 오해를 해소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