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영국사 - 충북 영동

창현마을 2007. 1. 4. 10:48

 

 

 

 

 

                        영국사   -  충북 영동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산 379번지 지륵산(일명 천태산) 동쪽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에 속한 고찰이다. 영국사는 지륵산과 주변 계곡의 경관이 좋아 양산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국사의 창건 시기는 조선 고종 16년(1879)에 쓰여진《영국사사적문》에 樑大統元年 新羅王子圓覺國師始……. 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의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4년(527)에 원각국사가 창건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시대상황이 맞지 않고 원각국사는 고려중기에 활약한 승려이기 때문에 이 기록은 신빙할 수가 없다.

 

단지 영국사 경내에 있는 원각국사비를 비롯한 유적 유물을 통하여 대략 고려 초기에 창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요사 등의 건물과 보물 제532호인 석조부도, 보물 제533호인 삼층석탑, 보물 제434호인 원각국사비, 보물 제535호인 망탑봉 삼층석탑 그리고 지방유형문화재인 석종형부도와 원구형부도, 목조삼존불상, 동종, 법고, 영위판, 각종 불화 등이 있다.

 

 

 

고려 문종 때 원각국사가 창건하였고,고려 고종 때 감역 안종필이 왕명을 받아 탑과 부도 및 금당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국청사,산 이름을 천주산이라 하였다. 뒤에 다시 공민왕에 의하여 영국사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하여 진다.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홍건적들이 황해도를 건너서 개경까지 육박하자, 왕은 이 절로 피난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하는 한편, 이원 마니산성에 근위병을 포진하여 놓았다. 이 절의 맞은편에는 팽이를 깎아놓은 듯한 뾰족한 봉우리가 있는데,왕은 그 봉우리 위에 왕비를 기거하도록 해놓고 옥새를 맡겨 두었다.

 

그뒤 마니산성의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함정에 빠뜨려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여 난을 평정하자,공민황은 부처님께 감사드리고 평국민안이 되었으니 절 이름을 영구사로 바꾸라 하고 현판을 써준 뒤 떠났다 한다. 또, 일설에는 조선 태조 때 세사국사가 산 이름을 지륵 으로 절 이름을 영구사로 하였다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뒤의 역사는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보물 제533호인 영국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제534호인 원가국사비,보물 제 535호의망탑봉삼층석탑,보물 제 532호의 부도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또한, 절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높이 3.5m의 석성지가 남아 있다.


 

영국사대웅전

 

* 소재 : 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 61호.

* 정면 3칸, 측면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3출목 7포작 집

대웅전은 목조와즙이고 천태산을 배경으로 해서 신좌을향으로 되어 있다. 130cm 높이의 석축 위에 여러 차례 불타고 허물어져서 중창한 나머지, 신라·고려시대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 중기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대웅전 안은 정면에 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중앙이 석가여래좌상이고,좌우 양쪽이 관음보살좌상이다. 삼존불 뒷벽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다. 서쪽 벽에는 신장탱화, 동쪽 벽에는 삼장탱화, 뒤쪽에는 칠성·독성·상단정신조성탱화가 걸려 있고,동쪽 앞편에 동종이 놓여 있다. 이 건물은 1980년 해체,복원되었다.

 


 

영국사삼층석탑

 

* 건립 : 통일신라 말기(9세기 경)

* 높이 3.15m, 보물 제533호.


 

원래 옛 절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42년에 주봉조사가 지금의 대웅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장대석 4,5개씩을 일변으로 삼고 석단을 구축한 위에 건립하였는데 현재의 사찰방향을 따라 동향을 취하고 있다. 석탑은 신라식 일반형으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봉안하였다.

 

지대석은 따로 없으며 하층기단 면석 하단에 굽을 둘러 통식의 각형 받침을 삼았고, 면석은 4매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3구씩의 세장한 안상이 조각되었다. 하층기단 갑석도 4매석으로 결구하였는데 상면의 모서리에는 각기 합각이 표시되었고 특히 상단부에 반전의 표현이 있어 주목된다. 상면 중심에는 큼직한 4분원이 몰딩고하 각형의 낮은 받침을 각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상층기단 면석은 널찍한 판석을 각 면에 1매씩을 세워 4매석으로 조립하였고, 각 면에는 우주나 탱주가 없으며 우주 부분가지 꽉 차도록 전면에 1구씩의 큼직한 안상을 음각하였는데 정교한 각 안상의 수법이 주목된다. 상층갑석은 1매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 부연이 있으며 상면의 네 귀퉁이 부분은 하층갑석 상면과 같이 합각이 뚜렷하다.

 

상면 중앙에는 원호의 몰딩과 높직한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 옥개석이 각각 한 돌이며, 각 옥신은 양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고 초층에만은 1면에 문비가 모각되었는데 문비는 장방형으로서 두줄의 융기석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내면은 중앙에 세로선을 음각하여 양쪽에 걸쳐 큼직한 좌물쇠 하나가 양각되었고 그 밑으로 양쪽에 한개씩의 둥근 문고리가 조각되어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받침이 4단씩이고 처마에는 낙수홈이 정연하게 음각되었으며, 정면 중앙에 각형으로 1단씩 받침을 각출하여 그 위의 옥신을 받치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하고 4면의 합각이 뚜렷한데 각 귀퉁이에 곡선이 있어서 다른 탑에 비하여 융기된 인상을 주며, 아울러 네 모서리의 전각에는 반전이 심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각 전각에는 중심부와 좌우 양면에 각 1개씩 도합 3개의 충경공이 뚤어져 있는데 그 유퓸은 하나도 없다.

 

3층 옥개석 윗면에는 각형 1단의 노반받침이 각출되고 그 중심에 지금 7.5cm, 깊이8cm의 찰주원공이 있다. 상륜부는 각각 한 돌로 앙화.보륜.보개.수연등이 남아 있으나 노반은 없어졌다. 앙화는 방형 통식으로서 하면에 각형의 받침이 있고, 상면의 주연에는 복엽의 입상형 양련이 조각되었으며 중앙에 찰주원공이 관통되어 있는데 연판은 각 변 중앙에 1판식, 그리고 네 귀에 1판식으로 도합 8판을 배치하였다.

보륜은 통식의 원형으로서 중앙에 찰주원공이 관통되어 있고, 측면에는 8판의 복엽연화문이 조식되었는데 각 판내에는 장식문양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보개는 팔각으로 각 처마가 유려하게 곡선을 이루었고 전각의 반전도 심하여 잘 어울리며 , 그상단에는 山형의 귀꽃이 조각되었는데 귀꽃의 상부는 곧 낙수면의 각 합각과 연결되었고, 그 상부은 十자로 된 각 면에 유려한 화염문이 조각되고 , 정상의 중심에 찰주원공이 관통되었는데 전체의 형태는 통식을 따라 구형을 이루었다. 이 석탑은 기단과 탑신부의 양식수법으로 보아 ,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사망탑봉삼층석탑

 

* 고려시대의 삼층석탑.

* 높이 3m. 보물 제535호


 

현재의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약 500m 되는 곳에 속칭 망탑봉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고 이 정상에 삼층석탑 1기가 건립되어 있다.망탑봉이라는 이름은 사찰이나 동리에서 모두 똑같이 부리고 있는데 언제부터 호칭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봉우리에 석탑이 건립된 뒤부터 탑을 바라본다는 연유에서 붙여진 것 같다.

 

거대한 화강암반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암석 상면을 평평히 다듬고 자연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조성하였다.즉, 암반 상면 중앙에 돌출된 형태의 방형 기단부가 마련되었는떼 치석한 암상에 2단의 높직한 각형받침을 각출하고 그 위에 면석을 조성하였다. 단층기단으로서 각 면에는 양우주를 각출하고 중앙의 1탱주로 양쪽으로 나눈 구간에 안상 1구씩을 조각한 통형으로,상단 주현에 갑석의 표현이 뚜렷하며 상면에는 아무런 받침이 없고 그대로 탑신이 놓였다.

 

탑신은 신·개가 별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층의 옥신석에는 양우주가 정연히 각출되었고,특히 각 층마다 상부가 하단부보다 약간씩 좁혀져서 주목된다.

초층옥신 하단에 1단의 각형굄이 조출되었는데 이것은 기단부 갑석 상면에 탑신받침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그 대신으로 모각한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 초층옥신 각 면에는 중심하부에 동일한 규격으로 문비가 양각되었는데 그 형태는 통식이 아니고 상·하부의 양단이 돌출된 액장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내면은 문양이 없어서 흥미롭다. 초층옥개석은 옥개받침이 5단인데 하부 3단은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추녀가 직선이고 낙수면이 평박한 편이며, 전각에 반전이 있으나 풍경공은 없다. 정면에는 각형 1단의 옥신받침이 각출되었는데, 그 위의 2층 옥신 하단에 모각된 1단의 각형받침과 중첩되어 마치 2단의 받침을 마련한 것처럼 보인다.

 

2층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정면에 옥신굄 1단이 각형으로 조출되었고, 그 위의 3층옥신에는 양우주 외에 아무런 조식이 없다. 3층 옥개석은 옥개받침이 4단이고 정면에 각형의 노반받침이 1단 각출되었으며, 그 상면 중앙에는 지름 4.5cm,깊이 3cm의 찰주원공이 만들어져 있는데 현재 노반석은 결실되고, 다만 1석으로 조성된 연봉형의 보주가 놓여 있을 뿐이다.

 

각 층 옥개석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네 귀통이의 전각에도 반전이 뚜렷하여 경쾌하다. 한편, 각 옥신의 상부가 좁혀졌으므로 석탑 전체의 형태는 안정감이 있으며 더욱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겠다. 그러나 석탑의 조성양식으로는 정형의 규범에서 약간씩 벗어남을 보이고 있다. 곧 단층기단인것과 그 갑석의 수법이 약화된 점,그리고 옥개받침과 옥신굄의 각출이 정연하지 않으며 각 옥신석의 비율이 같지 않은것 등이다.


 

영국사부도

 

* 높이 1.76m. 보물 제532호

* 건립 : 고려 명종 10년(1180) 경으로 추측


 

고려시대의 팔각원당형 부도로써 지대석부터 보주까지 부재가 완전한 이 부도는 지대석위에 1 단의 높은 굄과 2단의 낮은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하대 측면을 받치고 있는데 각 면에는 가늘고 긴 1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그 위에는 팔각으로 된 한장의 굄을 놓고, 굄 아랫면에는 1단으로 된 낮은 각형굄이 조출되었고,윗면에는 각형으로 된 3단받침이 낮게 각출되어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 대는 1석으로 된 팔각으로,각 면에 1구씩의 안상 이 있다. 상대석은 측면부터 원형을 이루고 있는 데 아랫면에 팔각으로 된 2단의 받침이 각출되어 중대 위에 놓였다. 측면에는 단엽 24판씩의 앙련 이 상하에 중판으로 조식되어 화사한 연화대를 이루었다. 위면 주연에는 띠를 둘렀고 중심부에는 3단굄을 조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팔각으로 각 면 좌우에 우주가 각출되었다.

 

1면에는 장방형의 문비가 있고 그 개면의 위부분에 자물쇠가 양각되었다. 팔각으로 된 옥개석의 아래에는 상대의 탑신굄대와 대치을 이루는 33단의 받침이 조출되었고 추녀에는 각 모서리마다 무늬가 있다. 낙수면의 합각머리의 선조는 꼭대기에서부터 유려한 곡선을 이루면서 전각까지 흘렀다.

 

각 면마다 기왓골이 정연하게 모각되었는데 처마의 곡선과 전각의 반전 등이 잘 어울려서 경쾌한 맛을 주고 있다. 옥개석 꼭대기에는 팔각으로 된 상륜굄을 조출하여 그 위에 복발과 보주를 얹었다. 복발과 보주는 원형인데 복발에는 측면 중앙부에 굵은선과 가는선으로 된 두 줄의 선이 둘러졌고 연봉오리모양의 보주 아랫면에는 낮은굄이 있다.


 

영국사원각국사비

 

* 고려중기의 승려 원각국사의 비.

* 전체높이 371cm, 비신높이 165cm, 너비 78cm, 두께 13cm.

* 보물 제 534호.

현재 귀부와 이수는 전하나 점팜암의 비신은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있으며, 훼손이 심하다. 귀부는 전형적인 고려양식으로 둔중하다. 이수에는 형식적인 운룡문이 새겨져 있고 앞면 가운데에는 '圓覺國師碑銘'이라는 전액이 양각되어 있다.

 

원각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선사·대선사가 되었던 명승으로, 명송 4년(1174)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하였다. 비문의 찬자·서자와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동국여지승람>>·<<대동금석서>>에 의하면 찬자는 한문준이며,건립연대는 1180년이다. 글씨는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로. 당시 성행한 사경의 영향이라고 본다. 비의 뒷면에는 원각국사 문도들의 직명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