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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이야기 (2) - 소쇄원에서 '5월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다

창현마을 2006. 9. 19. 00:57

 

소쇄원 이야기 (2)  -

 

 

소쇄원에서 '5월 광주정신'의 뿌리를 찾다
▲ '산은 내장이요, 절은 백양이라'
친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실로 오랜만에 떠나는, 나 홀로 아닌 여행. 혼자 걷는데 익숙한 내게, 가끔 동행이 있는 여행은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북적북적 여행의 흥은 더욱 달아오르게 마련이며, 혼자 다닐 때보다 맛난 음식과 술 한 잔 걸칠 기회는 확실히 많다.

이번에도 역시 여행계획은 나의 몫이다. 회계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워낙에 내가 여기저기 쏘다니길 좋아해 전국 지도를 꿰고 있는지라 모두들 내게 여행 계획을 미루는 탓이다.

결국 우선 전국 전도를 펴놓고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고른다. 산은 너무 덥고, 바다는 차후 각자의 연인들과 함께 할 터, 결국 내가 결정한 곳은 소쇄원, 전남 담양의 소쇄원이었다.


소쇄원에 대한 기억

 
▲ 백양사 초입의 아름다운 풍경
소쇄원은 내게 항상 아련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독특한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무엇보다 소위 X세대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었던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묘사된 소쇄원의 모습을 난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는 것이다.
 
소쇄원에 설치된 집과 담장 그리고 화단과 물살의 방향바꿈 그 모드가 인공의 정성과 공교로움을 다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손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연을 경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기에 우리는 조선시대 원림의 미학이라는 하나의 미적 규범을 거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애틋함에도 불구하고 소쇄원과의 인연은 쉽게 닿지 않았다.
 
학부 시절 몇 번이고 있었던 사학과 답사 기회는 이런저런 핑계로 놓쳤으며, 가끔 광주 망월동에 가더라도 담양 소쇄원은 그 표지판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소쇄원에 대한 기대가 커질 수밖에. 때문에 요번에는 아예 작심을 하고 그 목적지로 소쇄원을 잡았다.

친구들과 차를 몰아 소쇄원 가는 길에 백양사를 들른다. '산은 내장이요, 절은 백양이라'는 말이 있듯이 백양사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소쇄원이 목적이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백양사는 나중에 내장산을 오르며 다시금 정리할 기회가 있으려니. 이윽고 전남 담양. 한국 죽림의 종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담양 곳곳에는 대나무와 관련된 표지판이 보였으며 지명에서 풍기는 이미지대로 그 길들은 정갈했다. 어디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 길이 그냥 보존되겠는가.

소쇄원의 미학

▲ 죽림의 종가 담양.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역시 대밭 소리가 싱그럽습니다.
드디어 소쇄원. 찌는 듯한 더위 속에 따가운 햇볕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모두들 소쇄원의 진가를 찾아서 온 사람들인가? 아님 홍보의 결과?
 
어쨌든 사람들은 북적거리고 있었고, 난 조용히 사색을 하겠다던 꿈을 고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미 관광지가 되어버린 소쇄원에서 은둔의 자취를 찾겠다던 나의 바람부터가 무리였을 것이다.

주차장을 지나 입구께 들어서니 역시 빽빽한 대나무 숲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열심히 입장권을 건네는 한 사내.
 
소쇄원의 창건자 양산보는 소쇄원을 가리켜 '남에게 팔지도 말 것이며 어리석은 자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지가 지금까지 지켜진 탓에 그의 후손들은 국가를 대신해 입장료를 받고 이 아름다운 정원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면 으레 국가 소유를 당연시하던 내게 소쇄원의 그 광경은 낯선 충격이었다. 국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한 가계의 힘.
 
어쩌면 소쇄원이 지금까지 그 모습을 잃지 않고 보존되어 온 것은 국가가 아닌 한 집안이 관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국가에게는 소쇄원이 많은 문화재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집안 후손들에겐 소쇄원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가보이기 때문이다.

▲ 소쇄원의 담장은 너와 나의 경계일 뿐입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흙돌담이 보이기 시작했다. 백양사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투박해 보이는 담장. 그
 
러나 그것은 도시의 높은 담들과 같이 내 것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지키기에는 너무 낮고 허술했으며, 그냥 장식이라고 칭하기에는 높고 단단한 것이 단지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담이면서 동시에 담이 아닌 모습.

▲ 안과 밖이 하나이기에 가능한 담장의 모습
▲ 담벽을 받치는 바위들의 해학
담이 가지고 있는 소쇄원의 미학은 담 밑으로 흐르는 물길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담을 쌓기 위해 물길을 돌리는 현대와 달리, 물길을 위해 담을 뚫는 우리 선인들의 모습. 안과 밖이 곧 하나임을 알았기에 가능했던 사고리라. 유홍준은 이를 가리켜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라고 칭했던가. 어쨌든 그 담 아닌 담 밑으로 삐죽이 얼굴을 내밀며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의 웃음이 보기 좋았다.


소쇄원, 아는 만큼 보인다

▲ 소쇄원의 주인 제월당
송시열이 '소쇄처사 양공지려'라고 써놓은 담벼락 밑의 매대(梅臺)를 지나고 나니 그곳에 제월당(霽月堂)이 있었다.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처럼 맘을 씻는다'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제월당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느 할아버지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아마도 문화재 해설가 아니면 이 소쇄원을 관리해 온 양씨 집안사람이겠거니.

 
▲ 소쇄원의 역사를 친히 설명해 주신 양인용 할아버지. 명함을 보자면 전남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시인협회 소속의 가사문학 해설자이시다.
친구들과 함께 슬그머니 사람들 속에 섞여들어 해설을 듣기 시작한다.
 
 평소 아무 편견 없이 혼자 느끼고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이드나 해설자 곁에는 얼씬도 안하는 나였지만, 그분의 설명은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명찰을 보니 양씨인 바, 집안 내력을 설명하기 때문에 더 구수하고 열정적이시던가.


할아버지는 양산보가 소쇄원을 만든 내력부터 시작해서 제월당 곳곳에 새겨져 있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송순, 정철, 고경명 등의 한시까지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해 주셨다. 이어지는 소쇄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설명.

그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호남에서 많이 궐기했던 이유와 동학농민운동이 호남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유 등을 소쇄원에서 찾으셨다. 결국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많은 지사들이 이곳 무등산 자락에서 후학을 길러내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심지어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까지도 이어졌다. 결국 다른 곳과는 달리, 1980년 광주 사람들만이 불의에 항거해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소쇄원으로 대표되는 호남의 그 바른 정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광풍각 옆의 아름다운 계곡
논리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할아버지의 말 속에 광주 민주화 항쟁이 등장한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 시대의 아픈 손 광주.
 
할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맡은 바에 충실하면서 그 날을 잊지 않고 상기시키고 있었으며, 그 희생을 바탕으로 화석으로 굳어가는 문화재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비록 잔인한 현실은 휘휘 돌아가지만, 호남인들이 그날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이상 결국 역사는 바르게 기록될 것이라는 듬직한 신뢰감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소쇄원처럼.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난 뒤 소쇄원을 둘러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워낙 오래 전부터 소쇄원에 관해 큰 기대를 했던지라 그 작은 규모에 조금은 실망하고 있던 난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쇄원에서 내가 찾고자 했던 건 규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소쇄원을 만든 이들의 정신이 아니었던가.
 
여쭈어본 바, 할아버지가 소쇄원 가계의 양씨가 아니면서도 소쇄원의 내력을 그토록 꿰고 계셨던 것은 결국 그 열정과 믿음 때문이리라.

제월당을 나와 광풍각으로 들어선다. 작은 계곡 옆에 자리 잡은 광풍각. 정자에 몸을 기대는 순간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따 시원한 거." 이곳에 와 풍류를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까. 신발을 벗고 양말까지 벗은 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청산을 읊조린다.
과거 우리네 선인들이 그랬듯이. 한 여름 이곳만한 무릉도원이 어디 있겠는가.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소쇄원을 언급하는지 이제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련을 뒤로 한 채 소쇄원을 나선다. 시원한 바람과 시원한 대 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지만 어디 담양이 서울에서 보통 먼 지역인가. 집으로 향하는 길, 그냥은 힘들어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 길에 잠깐 들러 아쉬움을 달랜다.

소쇄원, 그 곳에 가면 해설을 꼭 한 번 들으라고 추천하고 싶다.

▲ 담양의 명소 메타세콰이어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