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별서정원(別墅庭園) 혹은 원림(園林)이라 부른답니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경치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된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합니다.
곧,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 한 공간,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므로 간소하고 한시적 체류를 휘한 구조로 지어졌으며 남자들만의 전유공간을 이루집니다. 정자건물은 가운데 방을 두고 주변에 마루를 개방한 형식을 취하고, 온돌방과 마루가 공존함으로써 기숙과 휴양을 같이 할 수 있는 일상 생활터가 될 수 있는 곳이지요.
S자 코스 "입구"
좌우의 대나무숲 사이로 난 이 길은 약간의 경사로로 되어 있는 오솔길로 뭔가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고 이끌려가면서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과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시작부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소쇄원 안으로 걸어 올라가면 사람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이 함께 하여 정원의 구성들이 하나씩 시야에 전개되며 나타나게 됩니다.
담장
외원과 내원을 구분 지어 주는 경계인데 대문이 없는 특징입니다. 이는 개방적, 선별적이며 함부로 접근금지의 의미부여를 가지는데, 흙과 돌로 쌓여진 ㄷ자형의 담장 높이는 2m이고 그 위에 기와가 덮여 전통적인 양반 집의 담장 형식을 하고 있다.
다만 그 높이가 다소 낮아 방어를 위한 폐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바람을 막아주고 영역의 한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설에 소쇄원의 형국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 지네의 강한 氣를 눌렀다는 얘기도 있고 한편으로는 지네와 대응하여 소쇄원 반대편 마을이름을 닭뫼라고 부른답니다.
대봉대
대숲이 끝나 가면 앞쪽으로 담장과 대봉대가 보인다.
대봉대라는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小亭)를 지었는데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 하니, 귀한 손님이 오기를 기다려 맞는다는 다정한 뜻과 정겨움이 가득한 곳이다.ㄱ자로 꺾인 담장과 조그마한 이 草亭은 근래에 옛 모습을 본따 새로이 지은 것입니다.
손님을 봉황이라 칭하고, 주인은 성인군자로 상징하여, 앞에 대 (竹)와 단풍나무를 심고 벽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는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원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는 생활철학으로 도연명의 안빈낙도사상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봉대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입구 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조금 더 큰 연못이 있다. 나무 속을 파낸 홈대와 도랑을 타고 온 계곡물은 먼저 작은 못을 채우고, 그 물이 넘치면 다시 도랑을 따라 큰못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다. 큰못에서도 넘쳐난 물은 돌로 만든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애양단(愛陽壇)
대봉대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쪽 담에 [애양단]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있는데, 겨울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세운 단으로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기 때문에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孝의 공간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 48가지를 노래한 [소쇄원 48영]의 詩들을 목판에 써서 입구에서부터 애양단까지의 직선 담장에 붙여 놓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애양단의 겨울 낮(愛陽冬午)'에서 한겨울에 계곡은 아직 얼었는데 이곳의 눈은 모두 녹았다고 노래했답니다.
양산보는 평소 도연명을 존경하여 도연명이 했던 그대로 동쪽 담 아래에 국화를 심었다는데 역시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에 동쪽 울타리아래 국화를 심었는데 점점이 핀 형국이 늦가을의 풍상과 잘도 어울린다는 대목이 있다. 현재는 애양단 앞에 동백나무(孝의 상징)가 심어져있습니다.
오곡문(五曲門 )
애양단을 지나면서 담은 ㄱ자로 꺾이면서 [오곡문]이라는 판이 새긴 담이 있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죽 이어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입니다. 담 밑에 터진 구멍으로 소쇄원으로 흘러드는 냇물이 자연 그대로 흐르도록 하였다.
흘러든 물이 암반 위에서 다섯 굽이를 이룬다고 해서 붙여진 [오곡문]의 이름인데, 원래는 수구 옆에 일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냥 트여있습니다(트임문의 형태). 담 밑으로 흘러든 물은 굽이를 이루고 폭포를 이루며, 그 가운데 일부는 나무 홈통을 타고 대봉대 아래 작은 연못으로 내려갑니다.
한편, 오곡문 주변의 돌담은 제주에서 온 일꾼들이 음양의 조화를 맞춰가며 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소쇄원이 있는 마을을 지석리(支石里), 즉 관돌마을이라 불렀었다고 합니다.
매대(梅臺)
오곡문에서 제월당에 이르는 직선통로의 위쪽에 높이 1m, 폭 1.5m정도의 축단에 매화나무를 중심으로 난초가 심어져 있고 이 같은 단(花階)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梅臺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말라죽은 선측백나무 한 그루와 소쇄원 동호인회에서 42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으며, 문화재관리국에 의해 측백나무를 새로 심어 가꾸고 놓고 있습니다. 산수유나무도 한 그루 있으나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때에 심은 듯 합니다. 매대 뒤의 담에는 瀟灑處士梁公之廬(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조촐한 집)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의 글자판이 박혀있습니다.
매대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제월당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한복판의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어 선비들이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고 거문고를 타는 등 앉아서 즐겼다고 합니다.
광풍각
처음 이름은 침계문방(枕溪文房) 또는 계당(溪堂)이었다고 하는데 손님의 공간인 사랑 격으로, 소쇄원의 풍광을 맘껏 누릴 수 있는 중심 공간입니다.
上池와 下池를 지나 수차를 돌리며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고, 유락공간(遊樂空間)이요 한적할 때는 사색의 공간이 될 만한 곳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1칸만 온돌방이고 빙 둘러가며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돌방은 한면만 벽, 나머지는 삼분합문(들쇄로 들어올리면 완벽한 공간 환원을 이룸)이며, 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단 높게 달려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고 합니다. 온돌방의 따뜻함과 협소함, 마루의 시원함과 넓음, 작지만 당차고 아담한 공간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모이고 확산되는 정점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광풍각은 " 마치 물위에 떠있는 것 같아 옷깃을 열어 젖히는 " 곳으로 계곡과 큰 나무들 사이에 있어서 그늘져 시원한 곳으로, 손님의 공간인 사랑채와 같으며, 김인후와 같이 친근한 장기 투숙객이 기거했다고 합니다. 양산보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는데 송나라 명필인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른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胸懷灑落 如光風霽月) " 라고 한 데서 [광풍각]과 [제월당]의 이름도 따온 것이지요. 광풍각과 제월당의 현판 글씨는 이 지역 대부분의 현판 글씨와 마찬가지로 우암 송시열이 쓴 것입니다.
제월당(霽月堂)
" 달빛에 저절로 밝아지는 방 " 으로 가장 높은 양지에 서서 항상 밝은 곳이다. 주인의 공간인 사생활적 공간인 안채와 같으며,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월당은 몇 개의 단을 올라 위치하고 있으며, 매대의 담장을 따라 ㄷ자 마당을 지나 고개를 숙여야만 지날 수 있는 조그마한 대문으로 이어지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칸방이 있고, 나머지 두칸은 마루로 트여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있습니다.
넓지 않은 토방과 좁고 긴 마당이 있으며 앞뜰은 거의 空地로 남겨져 있지만 모퉁이에는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파초가 심어져 있습니다. 또한 매화나무로 운치를 더했는데 이는 방안, 대청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위치에 맞추어 관상용으로 심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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