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따라서 훌쩍 떠나는 테마여정

경남의 해안선 기행 (2) 남해(상)

창현마을 2006. 9. 16. 03:52

 

 

경남의 해안선 기행

 

 

(2) 남해(상)

 

놀라운 이야기 하나. 한반도 전체의 해안선 길이는 1만1542㎞로 지구 둘레의 4분의 1을 웃돈다. 그만큼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다. 섬 하나 하나의 해안선 길이를 모두 합한 수치라니 이해가 간다.

 

 

   
그 중에서도 남해안이 7510㎞로 65%를 넘는다. 경남의 해안선 길이는 2022㎞. 전남에 이어 전국 두 번째다. 시·군별로는 통영시가 616㎞, 거제시가 386㎞로 다도해의 모양을 그대로 반영했다. 섬 자체가 전국에서 네 번째로 크다는 남해가 302㎞로 그 다음. 다른 섬이면서 같은 행정구역인 남해군과 창선면을 2회로 나누어 싣는다.

설천면에서 고현면·서면 방향으로 해안선을 따라 돌기로 했다. 남해도의 서쪽에 해당되는 이 지역에서는 설천면 충렬사와 고현면 관음포 등 이순신의 노량해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면에 만들어진 스포츠파크와 남면에 조성 중인 골프장은 해안선과 해안 생태계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서 비교가 됐다. 남면의 선구와 항촌, 가천 다랭이마을과 이동면 화계에서는 바다로 인해 생긴 사람들의 풍속이 흥미로웠다.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해안선 굽이굽이에는 20~30도로 경사진 비탈에도 논·밭을 만드는 남해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스며 있었다.

 



 

   

△꼭 들러볼 만한 노량해전 전망대

남해대교는 하동군 금남면 노량과 남해군 설천면 노량을 잇는다. 노량 바다를 사이에 끼고 있어 이름이 같다 하지만 이순신의 노량해전을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짐작된다. 남해대교가 끝나는 곳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설천면 노량의 해안도로를 볼 수 있다. 그 길의 가운데에 충렬사가 있다. 여기서 남해 해안선 여행을 시작한다. 안내를 맡은 남해역사연구회 정의연(51) 회장이 일찌감치 사당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1598년 11월19일 이른 아침 이 지점에서 2~3㎞ 떨어진 고현면 관음포 앞 바다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충렬사는 장군의 시신을 처음 옮긴 곳이라 전한다. 당시에는 이곳이 해안의 언덕배기 울창한 숲속이었다.

군청 자료에는 장군의 시신이 여기서 3개월간 안치됐다 고향 아산으로 운구됐다고 전했다. 반면 정의연 회장은 “안치된 기간은 알 수 없다. 다만 전라도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운구됐다는 기록은 있다”고 했다. 사당 뒤 가묘가 있어 더욱 생생하다.

설천의 해안도로는 이곳의 횟집만큼이나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다. 낚시도 하고 굴이며 조개를 채취하기도 한다. 자연해안을 없애버린 해안도로가 워낙 오래 전에 만들어졌는지 그 안쪽에 좁은 갯벌이 다시 생겼다.

고현 쪽 국도와 연결된 길을 2㎞ 정도 가니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 유허지가 나타났다. 신경을 써야 발견할 수 있는 푯말이다. 조금 더 크게, 더 많이 설치할 수 없을까.

 

말도 어려워 차라리 ‘노량해전 전망대’라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입구에 한자로 쓰인 장군의 유언도 거슬린다. 장군이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뜻의 한자로 유언을 말했을까.

‘이락사(李落祠)’라는 사당을 지나 500m를 더 걸으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여기서 400여년전 노량해전을 실감한다. 전망대 아래 순천만 광양만 갈사만 등으로 이어지는 해안지도를 보면 왜 이곳에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철군 결정에 따라 왜군 본대가 노량해전 직전 사천과 창선 사이의 바다에 집결했으나 조명연합의 수군에 의해 순천만에 갇힌 소서행장의 군대를 구하고자 했던 왜군이 함대 500척을 노량으로 투입했던 것이다.

   

△ 관음포 바다의 또 다른 사연

이즈음 정의연 회장은 일화를 하나 전했다. 200척 이상의 왜군 함선이 왜 한꺼번에 관음포 안쪽에서 퇴로가 차단돼 격침됐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여러 형태의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왜군이 지형을 잘못 알았다는 내용이죠.

 

임란을 예측했던 유성룡의 형이 왜의 밀정을 간파하고 포식으로 잠을 재운 뒤, 그가 가진 지도를 변형시켰습니다. 관음포와 반대쪽 강진만 사이는 뭍인데도 연결된 바다로 그려 넣었던 거죠.” 지금은 양쪽이 매립됐지만 임란 당시에는 실제 관음포와 강진만 사이가 100~200m 정도로 잘록한 형태의 뭍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런 유형의 ‘난센스’같은 이야기가 이동면 임진성에 하나 더 있었다. 이곳 역시 푯말에는 ‘조선 세종 때 축성됐다’고 되어 있지만 정 회장은 다른 일화를 전했다.

“임진년에 축성돼 임진성이라고 합니다. 이곳 역시 일본의 지형파악 능력을 의심한 결과로 성을 쌓았습니다. 당시 성 밑이 옥포만이었는데 왜군이 거제 옥포에서 대파 당하자 보복전을 우려한 남해 사람들이 왜군의 오인을 우려했던 겁니다.” 왜군의 허술한 지형 파악이 때로는 전술로 활용되고, 때로는 성까지 쌓는 곤욕을 치르게 했던 것이다.

임진성 성곽에서 한창 진행되는 골프장 공사현장을 볼 수 있었다. 남면에 12홀 규모의 골프장이 들어서는 것이다. 이 중에는 바다에 직면한 홀이나 편의시설 공사도 많았다.

장차 골프장 잔디에 뿌려질 농약으로 주변 농·어업 피해 우려가 컸지만 결국 성사됐다. 바지락 키조개 등 어패류가 풍성해 주민이나 관광객들이 즐겨 찾던 남면 일부의 바다가 이제 곧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것이다.

 

TV 속에서나 봤던 바다 위의 환상적(?) 홀을 기대하는 모양이다. 이곳 골프장 공사에서 참고할 시설이 바로 옆 서면의 스포츠파크가 아닐까. 여러개의 축구장과 배구장, 호텔 등 편의시설이 해안선 위에 들어선 선례에서 장단점을 따져 해안환경을 살려야 할 것 같았다.



 

   
▲ 남면 항촌마을의 두살배기 암소에게 멍에를 씌우기가 쉽지 않다.

 

 

 

△ 남해 사람들의 억척스런 생활력

서면 염해와 중리마을 사이 해안언덕에 올랐다. 물론 마을안쪽 망운산에 오르면 더욱 분명한 전망을 볼 수 있다. 해안언덕에서도 맞은편 여수·순천·광양의 시가가 보일 만큼 간격 좁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은 비탈진 언덕 위에도 손바닥만한 땅도 남기지 않고 농토를 만들었다. 여름엔 벼, 수확 후엔 마늘·고구마 농사로 땅이 쉴만한 틈을 주지 않는다.

특히 남면 가천·항촌 등 여러 마을은 산비탈에 수십 계단의 다랑논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얼마나 촘촘히 다랑논을 만들었으면 만든 당사자도 자신의 다랑논을 잊어버린다 할까. 그 농민이 한참을 찾다가 자신이 벗어놓은 삿갓을 들어보니 그 밑에 논 하나가 있더란다.

   

항촌의 유경환(61) 씨는 그런 다랑논 하나를 갈고 있는데, 교육 겸 데리고 나온 두 살배기 암소가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일이 하기 싫은지 소는 계속 딴전을 피운다. 남해 사람들 독한 것 같지 않은 모양이다.

남해 사람들의 생활력은 어업에서도 드러난다.

이동면 화계마을 한 가운데에 풍어제를 지내는 비석 ‘배선대’가 있다. 비석 앞에는 20m 가까운 높이의 ‘솟대’가 솟아있다. 대보름 때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풍어제를 지낸다. 개인적으로는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마다 제사를 지낸 곳이다. 그 솟대가 저 멀리 노도를 바라보고 있다. 조선 숙종 때 3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서포 김만중이 운명했던 곳이다.                          

 

 

 

   - 경남도민.06.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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