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는다](3)
- 금강대와 오대산사고, 영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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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 참견하며 오르자니, 몸에 물길이 열려…-
오히려 허방다리라도 짚은 듯 폭포로 떨어지고 나면 거친 숨을 고르느라 소(沼)나 연(淵)이 되었다가는 이내 다시 흐르곤 할 뿐이다. 그처럼 물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며 낮은 곳에서 더욱 낮은 곳으로 향하는 질주본능을 지닌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이슬과 같은 영롱한 지저귐으로 반기던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으며,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바람은 또 어디에서 잠이 들었는가. 울창한 숲은 적막할 뿐 오로지 오대천 물소리만 온 산에 가득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분주히 길섶을 오가던 다람쥐마저 흠칫 놀라 멈춰서는 시간에 다시 상원사에 오른 까닭은 지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가 한 해가 지나자 그동안 찍은 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100평 남짓한 터에 앉은 암자를 일년 동안 수십 차례나 오르내렸으니 사진이 볼 만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만그만했다.
왜 이러냐고 묻자 머쓱해진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사시사철을 오른들 암자에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며 당연히 사진 또한 그만그만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맞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서로의 언어로 소통이 가능할뿐더러 내가 너에게
혹은 네가 나에게 다가가거나 오기가 수월하지만 사물이나 자연은 그렇지 못하다. 사물이나 자연이 나에게 먼저 다가올 수 없으므로 그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의 적극적인 몸짓을 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이 숙종 21년인 1695년 윤8월7일, 마침 오늘과 같이 빗발이 흩어지는 날 오대산을 찾았다.
그가 쓴 ‘오대산기’(五臺山記)에 따르면 강릉의 구산서원(丘山書院)을 출발한 그는 대관령을 넘어 횡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빗길을 걸어 다다른 월정사에서 밤을 밝혔다. 8월8일은 맑게 개었으며 이윽고 남호암골을 거닐었다.
오죽하면 물 흐르는 소리마저 거문고소리나 비파소리 같다고 했을까.
그러나 지금도 귀 기울이면 과연 그렇다. 그지없는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이미 취해 버렸는데 흐르는 계류 소리인들 어찌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이어지는 둔중한 비올라나 첼로 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그윽하고 외딴 곳에 있어 쉴 만한 곳이다”라고 했으니 사고와 영감사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암자가 다소곳이 있었다는 말이다.
금강대로 가는 길은 온통 안개에 쌓여 있을뿐더러 사람의 흔적이 배어 있지
않은 아름다운 숲을 지나야 했다. 얕은 능선을 두엇 가로질렀을까. 조개골에 들어서자 희뿌연 안개 속에 희나리를 잔뜩 쌓아 놓은 금강대가 넌지시
보였다.
흔한 단청이나 현판조차 걸려 있지 않아 약초꾼들의 초막과도 같은 집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내며 스님을 찾았다.
화들짝 놀란 스님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 든 이를 내치지는 않았지만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에 머문 지 90일 만에 처음 찾아온 사람이라고 하니 반갑기는커녕
익숙함이 깨져버린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났던 것이다.
나에게는 용맹정진중인 스님을 방해할 아무런 까닭도 지니고 있지 못했으며 굳이 샅샅이 산을 뒤져 이곳까지 찾아든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 골방이나 다락방이 절실했듯이 스님들 또한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필요하리라.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거칠어질 무렵 단원(檀園)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사고’(史庫)도를 꺼내들고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그림을 그린 시기는 정조 12년인 1788년 가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무렵 사고로 오르는 길에는 멀리 남호암골의 들머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고의 오른쪽 아래로는 암자와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금강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시 사고 주변에는 모두 다섯 곳에 사고를 호위하는 승군(僧軍)들이 묵는 암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그려진
것이다.
완당(阮堂) 김정희(1786~1856)도 이 길을 걸어 사고에 오른 적이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예문관검열의 관직에 있을 때로부터 규장각 대교로 임명된 1819~23년 사이의 일이지 싶다. 그때 완당은 포사관(曝史官)이 되어 오대산을 찾았던 것이다.
포사관이란 ‘포쇄관’이라고도 하며 사고에 있는 책을 꺼내 햇볕을 쬐며
거풍(擧風)시키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대개 예문관검열이 이 직책을 맡았으니 완당이 오대산으로 향했던 것도 그 즈음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물론 완당 스스로가 불교친화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부처와 산신령이 사고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뜻밖이 아닐 수 없다. 불경을 번역했는가 하면 사고 뒤의 영감사와 상원사의 중창기를 쓴 괴애(乖崖) 김수온(1410~81)이나
교산(蛟山) 허균(1569~1618)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앞세웠다가 유신(儒臣)들로부터 탄핵을 받기까지 했으니 더욱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법당 한 채와 요사 한 채가 단출한 절 마당에서 잠시 사고와 영감사의 중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이내 돌아섰다. 삼연이나 완당이 그토록 아름다움을 노래한 길을 다시 걷고 싶어서였다.
꼬박 두어 시간, 자리를 뜨지 않고 그를 봤다. 열흘이 넘도록 큰 비가 내린
탓인지 그는 잠시도 머물 틈이 없는 듯했다. 강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물줄기이지만 바다가 드넓은 것은 이 가느다란 물줄기를 모두 받아들인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찾아든 사람들로 인해 산은 더욱 넓어지고 커질 뿐 결코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통수에서부터 내려올수록 물줄기도 굵어지고 산도
굵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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