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명찰 순례

원원사지(遠願寺址), 신라의 호국사찰

창현마을 2006. 7. 27. 16:09

 

 

 

        원원사지(遠願寺址), 신라의 호국사찰

 

-한여름 땡볕에 절터를 갑니다. 텅 빈 절터 에서 마음속에


무언가를 충만하게 채우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6-07-15 09:27:46

 

부산이나 울산 쪽에서 국도를 타고 경주로 오다보면 어느 순간 신라의 땅이다 싶은 느낌과 냄새가 나는 곳에 들어선다. 본능적으로 매번 느껴지는 이런 기분은 나의 주관에 따른 것이겠지만 누구라도 유심히 살펴보면 들판이 보이고 문명이 아직 덜 스민 풍광이나 산과 하늘이 비로소 넓게 보이는 것에서 대충 고개 끄덕여 질 것이라 믿는다.

그 지점이 대충 경주시 모화읍 쯤 이다.

기다림이 있다는건/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 없이 하루도 힘든데/ 오늘 철길 따라 걷는다.// 떠난 기차는 정시에 돌아오지 않는가/ 그냥 스치어도 좋다. /나, 사랑할때 슬픔은 기억하나/ 외로움은 낯선데/ 오늘/ 모든것 그리웁구나// 내릴사람 없고/ 반길 사람 없어도/ 기차를 보련다./ 너무나 그리워/ 기차라도 만나련다.

(모화역에서 / 구광렬)

◇ 원원사지 전경 ⓒ 들찔레

그 곳은 경주의 가장 남쪽에 해당하며 7번 국도가 부산으로부터 경주를 거처 포항 지나는 길로 연결된다. 모화읍 에서 7번 국도와 같은 방향으로 난 동해남부선이 지나가는 철길을 지나 토함산 자락에 연한 봉서산 기슭으로 발을 옮기면 신라의 호국사찰중 하나인 원원사지(遠願寺址)를 만날 수 있다. 서라벌 땅의 첫머리에서 만나는 절터 이다.

절터는 언제나 비어있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혼자이거나 같이 간 일행만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서 바람을 만나고 바람이 무너진 돌 틈 사이에서 자라는 풀을 키우는 그 자리에 앉아 현재의 세상과 그 속을 살고 있는 나를 한 발 떨어져 조망하면서 마음을 우선 텅 비워 본다. 그러면서 다시 마음속에 무언가를 충만하게 채우는 기쁨이 절터를 찾는 이유이다.

더구나 절터는 그 곳을 찾은 계절, 시간, 기후에 따라 늘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예컨대 고달사지나 거돈사지 혹은 성주사지 처럼 평지의 넓은 절터는 해가 질 무렵에 찾으면 좋고, 진전사지나 선림원지처럼 산중 깊은 곳은 겨울눈을 밟고 찾으면 제격일 것이고 숲이 짙고 물소리 좋은 무장사지 같은 곳은 가을 단풍 길에 오르면 기쁨이 배가 될 것이다. 어느 봄날, 매화향 가득한 길에서는 지리산 밑의 단속사지가 좋을 것이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은 영암사지에 가서 쌍사자 석등이나 사자개를 보거나 나원리사지의 오층석탑을, 법천사지에서 비에 젖어 천 년 세월을 두고 다시 꽃이 핀 듯 연화문 조각 잘 된 돌들을 보면 코 끝이 "쏴아" 해지는 감동을 받을 것이다.

◇ 동 삼층석탑 ⓒ 들찔레

원원사지(遠願寺址)를 처음 찾았던 것이 6-7년 전 이었고 지난겨울 까지 여러 번 찾았던 곳인데 굳이 더운 날씨의 한여름 대낮에 그 곳을 가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솔숲에 에워싸인 한여름의 풍경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경주의 수많은 절터들 중 많은 곳이 소나무 숲 속에 있고 그런 푸른 곳을 보는 때는 한여름이 제격이다. 토함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봉서산 기슭 매미 소리 요란한 그곳에 땀 흘리며 찾은 시간, 사방이 고요하고 높은 터 위에 자리 잡은 3층 석탑 두 기가 솔숲에 싸여 어서 오라고 씩 웃어준다.

원원사지(遠願寺址)는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김술종 등이 함께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신라의 호국사찰이다. 이는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인 명랑법사가 세운 사천왕사, 금광사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신인종(神印宗) 중심도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천왕사나 금광사 역시 호국사찰인데 이는 명랑법사를 중심으로 하는 신인종이 밀교적 성격을 가진 종단으로 호국에 대한 염원을 불력으로 이루고자 했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터는 1000년 넘게 숲속에 잠들어 있었지만 불국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때문에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지표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무너졌던 탑과 절터가 1931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지금까지 유지되어온 관계로 사적지(47호) 지정도 비교적 빨리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약사불의 권속인 십이지신상이 불교석탑에 나타나기 시작한 탑의 효시라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봄에 이르러서야 주위 괘릉의 무인, 문인석, 사자상등과 같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서 삼층석탑 ⓒ 들찔레

금당 터 소나무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며 햇볕이 쏟아지는 남쪽의 동, 서 두 탑과 그 사이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을 본다. 2층 기단의 면면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이나 1층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의 화려한 부조가 없어도 탑은 단아한 품새를 보이며 깨어진 지붕돌의 상처가 있어도 균형 잡힌 상승미를 갖추고 절제된 윤곽을 가진 삼층 석탑은 그 자체만으로도 풍성한 가치를 보여준다.

낮은 1층 기단은 각각 두 개 씩의 전형적인 바깥기둥과 안 기둥이 있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2층 기단 역시 같은 형식이다. 아래 기단의 덮개돌은 끝으로 갈수록 약간 처진 듯 하고 각각의 덮개돌에는 2단의 괴임 받침을 두어 2층 기단석과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은 모서리 바깥기둥과 두 개의 안 기둥으로 삼분되어 각 면마다 3구씩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였다. 십이지신상을 새긴 최초의 탑이 이 원원사지 탑인데 십이지신상은 사람의 몸에 동물머리를 한 채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괘릉, 김유신장균 묘, 방형분, 진덕여왕릉 등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입상의 무인복장을 한 십이지상과는 다르게 평상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동 삼층석탑, 십이지신상. 소(牛)만 "우향우" ⓒ 들찔레

이 탑의 십이지신상 중 소상(牛像) 만이 오른쪽을 보고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왼쪽을 보고 있다. 왜 소상(牛像) 만이 왼쪽을 보고 있을까? 이 탑의 조성 연대가 소의 해 였을까? 아니면 이 탑에 봉안했던 사리의 주인인 어느 고승의 속가 나이가 소의 띠를 가졌었을까? 알 수 없는 상상을 혼자 한다. 또한 두 손을 앞가슴에 모아 예를 드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불법수호신으로서의 십이지상이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있는 것 또한 다른 특징이다.

그런데 십이지신상은 이 탑에 왜 새겨 넣게 되었을까? 십이간지는 갑을병정(甲乙丙丁)의 십간(十干·天干)과 자축인묘(子丑寅卯)의 십이지(十二支·地支) 글자를 아래위로 맞추어 날짜 이름으로 쓴 것은 이미 3000년 전 중국부터이다.

이렇게 시절과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간지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그 의미가 바뀐다. 우리나라 십이지신앙은 약사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삼국 통일 전까지는 밀교의 영향으로 호국적 성격을 지녔으나 삼국통일 이후로는 단순한 방위신으로 신격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밀교의 영향을 받은 이 절에서, 특히 호국 사찰로의 역할을 하던 기능으로 보아 탑 기단에 십이간지상을 새겨 넣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절을 창건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김유신의 경우 삼국통일이라는 호국적 과업을 이루려했던 바램이 이 절을 조성함으로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김유신은 그렇게 믿지 않았을까? 그의 무덤 호석으로 둘러쳐진 십이간지상 또한 그런 의미가 깃들여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란 혼자 생각을 해본다.

◇ 서 삼층석탑 서방 광목천왕 ⓒ 들찔레
◇ 서 삼층석탑 북방 다문천왕 ⓒ 들찔레


















1층 몸돌의 사면에 새겨진 사천왕상은 서탑의 경우 남면의 증장천왕상만이 깨어져 있고, 동 서 북방의 상들은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동탑 또한 사천왕상들 가운데 남쪽면의 증장천왕상만이 깨어져 있을 뿐 동 서 북방의 상들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서탑에서 동방의 지국천왕은 정면을 응시하며 오른손에 든 칼을 왼 손으로 받쳐 들고 있으며 굳건히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당당하다. 서방의 광목천왕은 오른쪽으로 약간 몸을 튼 상태로 다리를 벌린 채 무기를 아래로 내려 잡고 있어 일면 딱딱한 느낌을 주지만 갑옷의 무늬나 굴곡이 섬세하다. 북방의 다문천왕은 오른쪽을 응시하며 오른손에는 보탑을 왼손에는 보주를 든 상태로 특이하게 양 발 아래 두 마리의 악귀를 밟고 있는데 고개를 쳐들고 발버둥치는 악귀의 모습이 사실적이다.

동탑에서의 사천왕상의 모습도 서탑과 유사한데 두 탑 모두에서 남면의 증장천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서탑이 동탑에 비해 많이 깨어진 부분이 많지만 사천왕상의 경우는 서탑의 부조가 상대적으로 더 잘 남아 있는데 다만 서방 광목천왕의 경우 얼굴부분은 동탑에서 잘 살아나 있다.

이렇게 사천왕상이 부조된 1층 몸돌에 비해 위의 2, 3충 몸돌은 그 높이가 1/3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산 중의 탑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절터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위로 보이는 탑의 모양을 올려다보게 되는 관계로 착시를 응용한 상승감과 탑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했던 점을 엿볼 수 있다. 각 층의 몸돌을 덮은 지붕돌들도 전형적인 5단의 층급받침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경사는 비교적 급하게 흐르다 추녀의 끝은 알맞은 정도로 절제되어 반전되어 있다. 몸돌과 지붕돌의 단순한 균형이 비례미를 더해주는 모습이다. 상륜부는 노반 하나와 그 이에 얹혀진 앙화만 남아 있는데 멀리서 보아도 앙화의 연꽃 문양이 뚜렷하여 하늘 가운데 걸려 있는 모습이 소박하다.

◇ 원원사지 석등 ⓒ 들찔레

두 탑 사이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다. 지대석을 받침으로 복련과 앙련이 큼직하게 새겨진 아랫돌(하대석)과 윗돌(상대석), 팔각형의 쭉 빠진 중간돌(중대석)은 완전한 형태를 하고 있고 깨어진 덮개돌(옥개석)이 덩그러니 얹혀 있는데 이는 양 옆의 탑에 비해 단촐하다. 아마도 전형적인 석등의 구조로 화사석도 팔면의 구조에 네 면에는 화창이 열려 있었고 나머지 네 면에는 수려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머리속으로 꾸며 본다.

천천히 동쪽 대밭을 헤치고 부도를 보러 가는 길, 서탑 보다 한 길 아래에는 작은 이름이 붙어져 있지 않은 작은 사당 하나가 있다. 이 전각은 신라시대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용왕전(龍王殿)으로 안에는 정방형의 사각 우물이 있고, 벽면에는 최근에 그린듯 한 용왕 그림이 있다. 절을 조성할 당시에도 이 용왕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의 역사와 더불어 민간 신앙이 결합된 형태로 볼 수도 있으나 마음속으로는 감은사지 금당 밑으로 물이 흘렀던 것처럼 호국사찰이었던 원원사에 김유신이 동해의 용왕을 모시기 위해 파놓은 것쯤으로 상상하는 편이 편하다.

◇ 원원사지 돌덤벙 ⓒ 들찔레
◇ 용왕전 앞 수로 ⓒ 들찔레


















우물이 있는 용왕전 앞에는 기다란 석조 수로가 남아있으며, 이 수로는 몇 개를 연결해 놓은 것으로 오래된 돌의 형태로 보아 신라시대부터 있어온 것이란 상상을 뒷받침 하는 것 같아 흥미롭다. 수로의 중간에는 작은 물고임 시설이 있어서 이곳에서 물이 고였다 차면 넘쳐 흐를 수 있게 하였는데 신라시대의 우물과 배수로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일 가능성이 있다.

여름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조릿대 밭을 헤치며 걷는 일은 보기보다 어렵다. 거미줄이 몸보다 얼굴에 먼저 걸려 땅이 난 얼굴에 끈적이며 들어붙는다. 어둡고 습한 골짜기의 작은 길은 언제 사람이 지나갔는지 작은 오솔길 한 가운데까지 대나무가 점령한지 오래라 머지않은 부도까지 가는 길이 생각보다 멀게 느껴졌다.

아무 표식도 없는 이곳에서 부도를 찾는 일은 숨바꼭질 하는 것과 같다. "용 용 죽겠지" 하면서 나를 놀리다 기어이 소나무 숲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부도는 3중 기단 위에 복련과 앙련이 조성되어 있고 그 위에 석종형의 몸돌에 간단한 상륜부가 일체형으로 붙어 있다. 1층 기단은 부서져있고 2층 기단 상면에는 아래위로 연잎을 조각해 놓았으며 맨 윗 기단 측면에는 각 면마다 연잎과 범자를 번갈아 조각 하였는데 12자의 범자가 남아있다.

◇ 원원사지 서 부도 ⓒ 들찔레

신라나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된 부도탑의 경우 대개는 팔각원당형이고 보면 주인을 알 수 없는 이 부도는 그 구성상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집작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부도가 동쪽 밭 가운데도 세 기가 남아 있는데 그렇게 세련된 조각 기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렇게 쉬지 않고 절터의 이곳저곳을 바쁜 걸음으로 정신이 팔려 다니다 보니 옷에는 거미줄과 오래된 풀이 여기저기 붙어 있고 속옷은 젖어 엉망이다. 계곡 속을 흐르는 작은 물에서 얼굴을 씻고 그늘에서 몸을 말린다. 한 시간 여 돌아보다 목을 축이려니 두어 모금 남은 물병이 아쉽고 점차 더위를 먹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내려오는 길, 점차 절집의 규모를 늘리고 있는 지금의 원원사 마당가에 놓여 있는 당시의 돌덤벙(석조,石槽)에서 물 한 모금 더 마신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이것도 오래된 유물일진대 조금 정갈하게 사용하던지 아니면 어느 깨끗한 곳에 두고 맑은 물 받아서 이 여름 수련 한 포기나 물옥잠 두어 송이 피워 두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절 초입에 기계로 깎아 새로 조성한 사천왕상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옷은 새 옷을 입힌 사천왕상이로되 제대로 된 석탑 속의 사천왕을 보고 나온 터라 나도 그것들을 그냥 눈 한번 흘겨주고 지나친다. 7월, 태풍이 한차례 지나간 남녘의 어느 산 밑은 참 덥다.

 

 

 

 

출처 :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