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머무는 여행지

남한산성 1 - 역사의 숨결이 숨쉬는 곳

창현마을 2006. 2. 7. 16:00

 

 

 

 

 

 

 

 

 

 

 

 

 

 

 

 

 

 

        남한산성 개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나머지 20%가 평야부에 속하는 경작지이다.
높고 낮은 산이 많으며 좁고 긴 하천이 한강을 향하여 북 또는 북동쪽으로 흐른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 산성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 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민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남한산성 지형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광주시의 지질은 회색화강암과 편마암지대 이며, 지형은 광주산맥의 영향권 안에 있다. 토양은 편마암계나 화강암을 모암(母巖)으로 하는 사질양토(砂質壤土)나 양토(壤土)이다.
남한산성은 청량산(497m)을 중심으로 급경사로 된 화강편마암의 융기 준평원으로 내부는 약 350m의 구릉성 분지이다. 또한 산성리에서 엄미리에 이르는 지방도에 걸친 연변은 약 8km에 이르는 긴 협곡을 이루고 있다. 분지 내에는 고산지대인 관계로 하천의 발달이 미약하고, 산성천이 유일한 하천으로 침식곡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산정의 급경사면에 비해 북부 산록에는 경사가 하부로 갈수록 완만한 산록 완사면이 발달하고 있다.
한편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은 문형산497m, 매지봉(400m), 검단산(542m) 등과 남북으로 주부(主部)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산릉들은 북동 방향으로 연결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체적 모양이 대략 남북으로 발달된 것은 부분적으로 좌수향(左手向)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평균 기온은 인접 도시와 약4。C 정도 낮은 기온차가 나며, 연평균 강수량은 1,300mm∼1,400mm이며 맑은 날의 평균 일수는 약 204일로 봄과 늦가을에 많이 분포하며여 탐방객의 산성이용에 촉매제 역활을 하고 있다. 산간지역의 계절 변화는 평지보다 1∼2주 늦게 봄이 오고 일찍 겨울이 온다.
 
 
BC 5에 하남 위례성에서 천도해온 이후 신라 문무왕 12년(AD 672) 토성(주장성, 일장성라 칭함)으로 축성하였고,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후금의 침임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 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격고난 후 인조 2년(1624)에 재 시작하여 인조 4년(1626)에 준공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 성벽을 국가사적 제 57호로 지정하였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 도립공원으로 지정(제 158호) 하였으며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남한산성 일반연혁
 

삼국시대

     온조왕   13년(기원전6)
   한산 아래 도읍, 하남위례성 축조
     진흥왕   14년(553)
     진흥왕   29년(568)
   백제 동북부에 신주 설치
   신주 설치
     진평왕   26년(604)
   남천주를 폐지하고 한산주 설치
     경덕왕   16년(757)    한산주를 한주로 개칭
고려시대      태   조   23년(940)    한주를 광주로 개칭
     성   종   2년(983)
     성   종   14년(995)
   설치시 광주목 설치
   절도사 설치
     예   종    양광충청주도 아래 광주 예속
     명   종    충청도, 양광도로 개편, 양광도에 광주 소속
     공양왕    경기좌우도 설치

조선시대

     태   조    4년(1395)    경기좌도, 우도로 개편시 광주는 경기좌도에 속함
     세조원   1년(1455)    광주 좌보제 시행
     연산군   11년(1505)    난언을 한 자가 있다하여 광주를 혁파함
     중   종    6년(1511)    구읍을 회복하고 목사 설치
     인   조   2년(1624)1월
     인   조   4년(1626)
     인   조   4년(1626)
     인   조  11년(1633)
     인   조  14년(1636)
     인   조  15년(1637)
   이괄의 난 발생
   광주목을 산성 안으로 이설
   수어청(장관: 수어사) 설치
   목사겸토사 설치
   병자호란 발발
   목사를 부윤으로 승격
     효   종   3년(1652)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숙   종   6년(1680)
     숙   종   9년(1683)
     숙   종  16년(1690)
     숙   종  17년(1691)
     숙   종  26년(1700)
   부윤겸수어부사 복설
   유수겸수어사 설치
   부윤겸방어사 설치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수영부사 폐지
     영   조   26년(1750)    수어사 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정   조   19년(1795)    경청(수어청)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고   종   32년(1895)    한성부 광주군이 됨
     고   종   33년(1896)    광주부가 됨
     광   무   10년(1906)    광주부를 광주군으로 개칭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삼국시대

     문 무 왕 12년(672) 광주 동쪽에 주장성을 축조(4,360보)
조선시대      선   조   26년(1593)
     선   조   29년(1596)
     선   조   30년(1597)
     선   조   36년(1603
유성룡 남한산성 수어책 주장
유정의 승군 60여명 남한산성 수비
정유재란으로 남한산성 수축론의 대두
2월 남한산성 수축론의 재론
     광해군  13년(1621) 남한산성을 보장지지로 선정, 남한산성 축조
     인   조   원년(1623)10월
     인   조   2년(1624)3월
     인   조  
2년(1624)
     인   조  
2년(1624)4월
     인   조  
2년(1624)6월
     인   조  
2년(1624)7월
     인   조 
  2년(1624)9월
     인   조  
3년(1625)4월
     인   조  
4년(1626)11월
     인   조  
14년(1636)
     인   조  
14년(1636)
     인   조  
16년(1638)1월
     인   조  
16년(1638)
이귀 남한산성 수축주장
영의정 이원익 남한산성 수축 적극주장
목사 유림 인화관 건립
심기원 남한도원수로 임명, 산성보수 명령
남양부사 유림 광주목사로 차출, 담당
총융사 이서, 옛터에 남한산성 개축
총융사 이서, 목사 유림 행궁 상궐, 하궐 착공
행궁 상궐, 하궐 준공
남한산성 개축 완료
병자호란 발발
구송정 건립
남한산성 원성 증, 개축
온조왕묘 건립
     현   종   9년(1668)
     현   조   13년(1672)
수어사 김좌명 연무당을 연무관으로 개칭
부윤 이세화 지수당 건립
     숙   종   12년(1686)윤4월
     숙   종   12년(1686)5월
     숙   종   14년(1688)
     숙   종   19년(1693)
     숙   종   19년(1693)
     숙   종   31년(1705)
     숙   종   37년(1711)
     숙   종   45년(1719)
윤지선 감독아래 한봉성(한봉외성) 신축시작
수어청 군병 동원 한봉외성 신축완료
유수 이세백 재덕당 건립, 현절사 건립
수어사 오시복 한봉외성 신축, 현절사에 사액 내림
우의정 민암 남한산성 봉암과 한봉에 돈대 축조 주장
한봉성에 포루 두 개 증축, 청인이 한봉성을 헐어버림
좌전(26칸), 우실(4칸) 증설
수어사 민진후 신남성(남격대) 신축
 
성곽 문화
 
     분포도
          
 
 
남한산성 : 국가사적 제57호
(南漢山城)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등이 이루어졌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면서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다.
병지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 으로 나가 항복하였으나, 외침에 의하여 정복당한 적이 없는 성이다. 그 뒤 계속적인 수축을 하여 경영되었다.
성곽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은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
명칭 길이(m) 면적(㎡) 비고
원성 7,545 2,126,637 인조 2년(1624년) 수축
남옹성1 426 2,381 인조 16(1638)·정조 3년(1779)증개축
남옹성2 318 3,583 인조 16년(1638)추정
남옹성3 125 839 인조 16년(1638)추정
장경사신지옹성 159 1,447  
연주봉옹성 315 865 인조 2년(1624)원성 수축시 축성
소계 8,888 2,135,752  
봉암성 2,120 7,137 숙종 12년(1686)신축, 숙종 31년(1705) 두개의 포루 증축
한봉성 1,093 2,142,889 숙종 9년(1693)신축
소계 3,213 7,137  
신남성동돈대 134 998 숙종 5년(1719)신남성 신축
신남성서돈대 121 2,379 영조 9년(1753)신남성 두 개의 돈대 구축
소계 255 2,145,268  
합계 12,356    
돈대
쌓을 여건은 안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척후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는데 현존하는 두 돈대는 계유(1753)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편의상 두돈대를 신남성 동돈대와 서돈대로 부른다.
신남성은 7암문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1.5km지점의 검단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신남성 동돈대는 삭평하게 다듬은 정상부를 돌아가면서 원형에 가깝게 축조하였다. 측량의 결과 돈대의 둘레는 134m이고 면적은1,381㎡이다.

돈대의 폭은 약 430m로서 원형으로 구축되어 있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4m 내외인데 안쪽에는 약 1m 정도의 단이 조성되어 있다. 돈대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돈대의 서쪽에 홍예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홍예는 양 측면에 4단의 무사석을 쌓고, 그 위에 15개의 홍예석으로 폭 454cm, 높이 335cm의 반원형 홍예를 구축하였다. 돈대의 정상부에는 여장이나 별다른 시설은 전혀 없으며, 성벽에는 돈대 내부의 물을 밖으로 배출할 수 있는 수구 2개가 조성되어 있다.
이돈대는 영조 29년(1753)에 수축되어 몇 번 개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대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성의 장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형식이 대부분이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의 경우처럼 중층 누각형태의 장대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 누각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금석문
 
 
 
 
  찾아가는 길
 
남문진입로

1) 잠실 - 복정 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 로타리
2) 경부고속도로 양재 IC - 헌인릉 앞 - 세곡동 - 복정사거리 - 약진로 - 남문 - 산성 로 타리
3)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4) 수원 - 신갈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5) 안양 - 의왕시 - 분당 - 모란 - 태평사거리 - 시청앞 - 신흥주공 - 남문 - 산성 로타리

 

동문진입로

1) 워커힐 - 천호대교 - 길동 - 중부고속도로 상일동 IC - 황산 삼거리(국도 43번) - 엄미리(은고개)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2) 중부고속도로 경안IC(서울, 하남시 국도 43번) - 광지원 - 동문 - 산성 로타리

 

 

출처 : 남한산성관리사무소홈발췌

'발길머무는 여행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월의 명승지 요약 1  (0) 2006.02.07
남한산성 2 - 사진갤러리  (0) 2006.02.07
성락원 - 서울 성북동  (0) 2006.02.07
모악산 - 전북 김제 ~ 완산  (0) 2006.02.05
태백산 눈꽃 축제  (0) 2006.02.01